[액터/액트리스]
[성준] 연기라는 이름의 통과의례
2013-07-25
글 : 윤혜지
사진 : 최성열
성준

정확히 일년 전,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성준에게 물은 적이 있다. 성준이 <나는 공무원이다>의 “치기어린 민기” 역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성준은 민기를 두고 “달리기를 할 때 빨리 가려고 머리부터 들이미는 아이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때의 성준은 딱 민기 같았다. 말수가 적고 말주변이 없는 편임에도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말을 하려고 애쓰는 태가 역력한 것이, 어쩐지 달뜬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은근한 흥분도 가라앉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년 뒤 만난 성준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수원 감독의 <명왕성>에서 전교 1등 유진 테일러 역을 맡아 십대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묵묵히 연기해낸 성준에게 이번엔 그의 갈 곳을 물었다.

성준은 모델 출신 배우답게 껑충한 키와 작은 얼굴을 자랑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쭉 뻗은 몸은 날렵하다기보다 무거워 보였고, 작은 얼굴엔 이유 모를 수심과 피로가 잔뜩 끼어 있었다. 대체 무엇이 아직 이십대의 중턱에도 다다르지 않은 청년에게 이런 묵직한 피곤을 안겼을까. <명왕성>의 촬영을 끝낸 것도 한참 전의 일인데 성준은 여전히 영화 속 유진 테일러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모델로 데뷔했기에 모를 것도 같았지만, 성준 역시 “학원에서 열세 시간씩 붙어 있으면서” 입시지옥을 겪어낸 경험이 있어 <명왕성>의 정서엔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시체로 발견되는 유진은 베일에 싸인 스터디그룹 ‘토끼사냥’을 운영하며 전교 1등을 도맡는 인물이다.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 혹은 이미 죽음 가까이에 다가선 듯 언제나 멍한 표정을 하고 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 덥석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유진을 납득하기란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면서 가끔씩 느낄 불안을, 유진은 항상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자체에도 무딘 인물이니까 그 가까이에라도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유진의 불안을 나도 똑같이 느껴야 했다. 머릿속에 센 에너지를 주입하려고 일부러 잔인한 영상들을 마구 찾아서 봤다.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 같았다. 언젠가부턴 정말로 정신이 불안해지더라. 유진을 이해하는 데엔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지만,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여름을 앓는 청춘

“삶의 갈증을 풀어주는 건 원래 그림 그리는 일이었는데 이젠 연기가 그렇게 됐다”고 일년 전 성준은 말했지만, 오히려 지금에 와 돌아보니 연기는 막막하게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도 “쉬지 않고 달려와 에너지가 방전된 것 같다”고 말할 만큼 그는 데뷔 이후 2년간 한시도 쉬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 사이를 바삐 오갔다.

KBS 드라마 스페셜 연작시리즈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tvN드라마 <닥치고 꽃미남밴드>처럼 비슷한 이십대 남자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에서도 성준은 혼자 튀는 경향이 있었다.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부루퉁한 느낌이 유달리 독특했고,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돋보였다. 성준을 떠올리면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먼저 연상될 만큼 특유의 반항적인 분위기는 그의 가장 큰 재산이다. “반항적인 분위기? 실제로도 반항을 많이 했다. (웃음) 상황에 곧이곧대로 따르는 편은 아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라지만 “의외의 상황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디든 적응을 잘 못하는 편이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성준은 부쩍 불량스러운 청춘으로 찍히는 경우가 많았다. SBS 드라마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현상희는 방탕한 부잣집 막내아들이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최치훈은 남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냉정한 성격의 천재 고등학생이었다. KBS 드라마 스페셜 <습지생태보고서>의 최군으로 궁상스러운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명왕성>의 유진 테일러로 분해서는 십대 소년의 끔찍한 불안을 표현해냈다(<명왕성>은 2012년 여름에 촬영됐다). 그리고 <닥치고 꽃미남밴드>의 권지혁과 <나는 공무원이다>의 민기는 록스피릿으로 충만한 음악청년이었다.

하나 아무리 영혼이 뜨거워도 꿈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준의 캐릭터들은 서툴게나마 슬슬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기 시작했고, 성준은 통과의례 같은 성장통을 앓아야만 했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정훈은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어도 마이너스 통장을 안고 살며 현실과 로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철없는 남자였고, 영화 <무서운 이야기2-절벽>의 동욱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결국 친구를 버리고 마는 인물이었다.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구가의 서>에선 주인공 여울(수지)의 곁을 지키는 듬직한 호위무사 곤을 연기했다. 데뷔할 때만 해도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 덮어놓고 도전했지만, 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목마름만 더할 뿐인 연기는 오히려 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항상 최근작에 나와야 하고, 전작에서보다 더 잘해야 하고, 계속 새롭게 배워나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도리어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구가의 서>를 하면서는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수도 없이 풀이 죽었다. “내가 못한 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연기의 톤 앤드 매너에 대해서도 부족했던 것 같고. <구가의 서>를 끝내고, 팀에 정말 미안한 마음이 컸다.” 여름이란 계절이 주는 감흥이 남달라 마음마저 복잡해진 모양이다. “겨울엔 우울하기만 하다. 여름, 특히 지금 같은 장마철, 답답한 이 시기에 오히려 감수성이 풍부해진다. 자꾸 새로운 일이 하고 싶고, 많은 생각이 든다. 영어학원이라도 다녀볼까. (웃음)”

<명왕성>의 유진을 연기하며 감정을 혹사시켰던 것처럼 <절벽>을 할 땐 “배고픔을 느끼기 위해서 하루에 한끼만 먹기도 했다”. 극중 인물과 상황에 자신을 동일시하려다보니 에너지 소모가 과할 수밖에 없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피로감은 아마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소모하고, 채찍질한 결과인 듯하다. “내가 그 인물로 살아 있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던 꿈은 여전하지만, 일단은 “무기를 다시 날카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며 벌써부터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쯤 되니 성준이 누구인지는 대충 감이 온다. 한차례 여름을 앓고 난 성준에게 이젠 앞으로의 방향을 물어볼 차례인 것 같다.

magic hour

불온한 청춘의 순간

<명왕성>은 성준에게 본격적으로 ‘연기’를 알게 해준 작품이다. 비밀스터디클럽 ‘토끼사냥’에서 악행을 주도하지만, 나중엔 제자리를 찾으려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너무나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해버린 것 같기도 한 유진을 그대로 체화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성준은 나름대로 유진의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궁리했고, 등가교환을 하듯 자신의 일부를 내주고 유진을 얻었다. 그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는 듯이 유진의 체념과 비관이 성준에게도 전이된 것 같다. <명왕성>에서 유진은 죽음이 닥쳐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응적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 태양계에서 쫓겨난 명왕성의 운명을 따르고야 만 것이다. 유진의 때이른 죽음은 이 세계 안에서 정해진 수순이다. 아이들의 연이은 희생에도 사회는 묵묵히 굴러간다. 불온한 혹은 불안한 청춘을 연기해온 성준의 필모그래피도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서툴게 어른의 궤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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