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과의 사투? 배우 하정우에게 테러범에게 협박받는 앵커 윤영화의 연기는 바로 자신과의 사투였다. 한달간의 촬영 기간 중에 그는 다섯대의 카메라에 노출된 채 공간을 장악하고 이야기를 끌어나가야 했다. <더 테러 라이브>는 오롯이 하정우의 페이스로 주도해야 하는 새로운 형식의 영화다. 물론 앵커를 떠올릴 때 좀더 단정한 배우가 연상될 수도 있을 거다. 그렇다. 하정우가 아니어도 가능했다. 그런데 하정우 말고 지금 충무로 배우들 중 이 가정의 상황에 이 정도로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더 테러 라이브>는 배우 하정우의 지금 위치를 점검하고 증명하는 바로미터다.
매 작품 나올 때마다 하정우에게 선택의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더 테러 라이브>도 다르지 않았다. 연초 영화 촬영을 앞두고 만난 하정우는 대본을 손에 들고 대뜸 “영화가 재밌다”고 말했다. 툭 던지듯 내뱉는 말이었지만 신뢰가 갔다. 그가 판단하는 ‘재미’의 지점이 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재미라는 동력 하나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신인감독과 스타감독을 따지지 않으며, 대규모 영화와 저예산 영화에 선을 두지 않고 종횡무진하는 독특한 배우다. 그 결과 하정우의 선택은 일정한 카테고리나 한 가지 패턴으로 묶이지 않는다. 한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는 다종다양할 수 있지만, <추격자>의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과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카리스마 있는 조직 보스, <러브픽션>의 연애 초보 소설가 사이의 간극은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보폭이 크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크리스천 베일처럼
그가 지금껏 맡은 배역을 하나의 점으로 위치시킨다면 <더 테러 라이브>의 앵커 윤영화 역시 상당히 동떨어진 존재다. 생방송 중 테러범에게 마포대교를 폭파한다는 협박 전화를 받은 윤영화는 이 급박한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는 게임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잘나가는 마감뉴스 진행자였다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떠맡은 윤영화는 테러범과의 전화 생중계를 통해 예전의 명성을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모두 빗나갔다. 방송 중 착용한 인이어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 이제 그는 꼼짝없이 스튜디오에 갇힌 채 테러범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인질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의 설정이 윤영화를 바짝 조여오는 구조다. 폭발할 듯한 긴장감과 간간이 터져나오는 웃음, 대한민국 사회구조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하나씩 베일을 벗어나갈 때, 이 영화의 재미도 빛을 발한다.
뻔뻔하게도! 하정우는 97분의 러닝타임을 통틀어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바라볼 것을 강요한다. 장소는 (초반 화장실과 복도의 짧은 장면을 제외하고) 사방이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스튜디오 한곳, 상대역은 전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테러범이 (거의) 전부다. 화면에서 펼쳐지는 모든 리액션은 배우 하정우 한점으로 수렴되는 정교한 세팅. 관객에게 과연 이것이 흥미로운 설전이 될지 혹은 그 혼자만의 과잉연기가 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럼에도 하정우는 이 색다른 실험을 강행하고 나선다. “불리한 것들만 갖춘 영화더라. 신인감독 작품인 데다 한켠에는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담보할 CG가 신뢰를 줄 수 있느냐는 걱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속도감있는 전개로 밀어붙이면 관객이 호응할 지점이 분명 있다고 판단했다.” 준비 단계에서 그는 출근하듯 영화사 사무실을 드나들며 감독과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았고, 빈틈이 보이지 않도록 윤영화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어떤 뚜렷한 인물을 설정하기보다는 윤영화가 가진 양면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초반 뉴스를 진행할 때는 화이트칼라의 전형처럼 그렸다가, ‘온에어’ 불이 꺼지고 토크백으로 이야기할 때는 말끝마다 쌍욕도 서슴지 않는 윤영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가면을 쓴 듯 모습을 바꾸는 윤영화를 위해 하정우가 참고로 삼은 배우는 뉴욕 최고의 증권맨과 살인마를 완벽하게 오간 <아메리칸 사이코>의 크리스천 베일이었다. “그가 가진 이중적인 면모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손석희, 손범수 아나운서도 연구했다. 특히 손범수 아나운서를 직접 봤을 때 인상적이었는데 화면에 비친 인자한 모습 대신 카리스마가 상당하더라. 카메라 앞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윤영화에게도 적용시켰다.”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더 테러 라이브>는 촬영 자체가 새로운 방식이자 일종의 게임이었다. 연극무대 위, 극을 이끌어가는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하정우는 세트에 올라 상황을 이끌어가는 고독한 촬영을 강행했다. “총 21가지의 챕터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보면 된다. 카메라 다섯대가 한꺼번에 돌아가는 상황에서 연극하듯이 한 챕터를 끊지 않고 원신 원컷으로 촬영했다.” 주 5회, 꼬박 4주 동안 5시간씩 이어지는 촬영. 관건은 그가 얼마나 대본을 숙지하고 오느냐의 싸움이었다. 대사 분량이 많았고, 아나운서의 말이 주는 속도감도 빨랐다. 집중을 위해 아예 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빌려 한달간 기거했다. 연극 연습하듯 촬영 전날 밤 혼자 리허설을 했다. “내가 감독님한테 촬영을 끊지 말고 이어가자고 했다. 그런데 테이크를 가면 갈수록 뼈를 깎는 듯한 느낌이더라. 리액션을 받을 게 없으니 혼자 민망한 적도 많았다.” 메모가 가득한 철저한 대본 분석과 연습을 하는 동안, 그는 새로운 연기를 연마하는 재미를 즐겼다. “성격상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잘 안되니 넘어가자 하면 관객이 바로 알아차린다. 촬영 때 하면 늦는다. 두번, 세번 체크해야지 마음이 놓인다.”
힘든 촬영을 해낼 수 있었던 또 다른 동력으로 하정우는 첫 연출작인 <롤러코스터>의 경험을 언급한다. “촬영장에서 감독의 디렉션이 모호할 때 왜 그럴까 싶더라. 그런데 직접 연출을 해보니 감독 역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 기댈 데는 배우밖에 없구나, 내가 현장에서 그런 배우가 돼야겠구나 생각했다. 김병우 감독도 입봉작이고, 나도 신인감독의 입장이 되고 보니 둘이 통하는 부분이 많더라. 이번 촬영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와 이해심이 많아졌다. (웃음)”
윤종빈 감독과 함께하는 <군도: 민란의 시대> 촬영이 한창이지만(짧게 밀어붙인 머리는 억울하게 도적떼에 합류하게 된 영화 속 역할을 위한 설정이다), 하정우의 머릿속 한켠은 연출가로서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롤러코스터>의 후반작업이 남은 데다 내년 2월에는 연출과 주연을 맡은 <허삼관 매혈기>도 촬영을 시작해야 한다. “내가 먼저 연출을 제안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웃음) 캐스팅만 된 상태였는데, 제작사에서 제안을 하더라. 40살 이전에는 이런 큰 작품을 연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안을 받고 보니 피가 솟구치고 가슴이 뛰더라. 물러서서는 안될 엄청난 도전의 기회가 온 거다.” 장르 불문하고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배우 하정우 대신 연출자로서 하정우의 감각과 취향은 웃음과 드라마가 공존하는 휴먼코미디에 가깝다. “촬영장에서의 꼼꼼한 진행은 류승완 감독에게서, 대사의 유머러스한 치고 빠짐은 윤종빈 감독에게서, 컷 분할의 템포는 나홍진 감독에게서, 배우의 디렉션과 현장의 통솔은 김용화 감독에게서 배웠다. 함께 작업한 모든 감독들이 다 스승이고, 다 달리 보인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