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영화에는 왕가위가 있다.” 2013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1997년 4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왕가위의 세 번째 장편영화 <중경삼림>이 서울에서만 15만 관객을 동원하고 뒤이어 개봉한 <동사서독>과 <타락천사> 역시 흥행에 성공하며 소위 ‘왕가위 신드롬’을 이어가던 바로 그때, 한 신문기사의 첫 문장이다. 실제로 1995년 말, <타락천사>의 개봉을 앞두고 방한했던 왕가위조차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내 영화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어 했을 정도로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서 왕가위는 하나의 ‘아이콘’에 가까운 존재였다. 많은 한국 감독들은 ‘왕가위 스타일’을 흉내낸 영화들을 쏟아냈고, 개봉 당시 비난과 무관심 속에 사라졌던 <아비정전>과 <열혈남아>는 불과 몇년만에 왕가위 팬이라면 누구나 보아야 할 ‘필견’의 영화가 되었으며, 그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강연과 회고전 형식의 상영회도 줄을 이었다.
놀랍게도 16년이 지난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는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발표하여 베스트셀링을 이어가고 있고, 왕가위 역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7) 이후 5년 만에, 9년을 작업하여 완성한 자신의 열 번째 영화 <일대종사>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8월22일 <일대종사>가 정식으로 개봉하기 앞서 오는 8월8일부터 21일까지 CGV압구정과 CGV신촌아트레온에서 ‘왕가위 걸작 기획전’이 준비 중이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왕가위의 장편 데뷔작 <열혈남아>를 비롯하여 <아비정전>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그리고 <일대종사>에 이르기까지 총 7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상영과 더불어 13일 오후 7시30분에는 ‘색채가 넘쳐나는 왕가위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이, 14일 오후 7시 <일대종사> 상영 뒤에는 이동진 평론가의 ‘라이브톡’이 각각 진행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작품들을 필름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갈 때, 가장 운이 좋은 건 물론 동시대에 그의 영화들을 차곡차곡 순서대로 보면서 시간을 함께 쌓아나가는 것이다. 마치 <아비정전>에서 아비와 수리진이 함께 보낸 1분처럼 이렇게 쌓여간 (감독과 ‘나’의)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지 못한 감독의 작품들은 꼼짝없이 되돌려보아야 한다. 이때, 이를테면 허우 샤오시엔이 쉼표를 찍어가며 시간 순서에 따라 차례로 영화를 봐야 하는 감독이라면, 왕가위는 영화들 사이를 점핑하거나 짝을 지어가면서 봐야 하는 감독일 것이다. 말하자면 ‘흐름’과 ‘사이’의 차이. 실제로 왕가위의 영화들은 종종 서로가 서로의 참조점(혹은 시작점)이 되거나(<아비정전>과 <화양연화>), 못다 한 이야기의 그다음(혹은 이전)으로 이어지거나(<중경삼림>과 <타락천사>, <화양연화>와 <2046>, 그리고 <아비정전>과 <동사서독>),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상호변주된다(<중경삼림>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그리고 <해피 투게더>와 <동사서독>).
이러한 맥락에서 영춘권의 ‘그랜드마스터’,엽문의 일대기를 담은 <일대종사>는 왕가위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어떤 영화와도 ‘짝’을 맺기 난처하다. 왕가위는 한 인터뷰에서 <일대종사>는 홍콩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고보니 이전까지 왕가위 영화들 속에서 ‘홍콩’은 땅에 발을 내려놓고 머물 수 없는 곳이거나 떠나야만 하는 원심력의 공간이었던 반면, <일대종사>에서 (중국에 반환된)홍콩은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구심력의 공간이 된다. 사람들은 떠나갔고, 엽문만 그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 있는 엽문을 왕가위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바라본다. <일대종사>는 정말 왕가위 영화의 새로운 시작인 것일까? 이번 기획전에서 직접 확인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