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신카이 마코토] 세상의 비밀, 사랑의 약속
2013-08-16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언어의 정원> 신카이 마코토 감독

스틸사진처럼 포착된 사물의 배치와 일상적 질서에 깃든 서정성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특징이다. 때론 그 먹먹하게 아름답고 감상적인 세계가 개인의 내면에 폐칩된 듯도 했다. 전작의 주인공들과 달리, <언어의 정원>의 다카오와 유키노는 얻어맞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세상과 맞설 힘과 용기를 품었다. 송알송알 내리는 빗방울과 풀빛으로 물든 장마철의 공기가 작품에 가득하다. 아마도 가장 행복했을 한순간, 함께 있는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포근하다. 소슬하게 깔리는 소년의 내레이션도, 먼 하늘을 배경으로 엔딩을 휘감는 백그라운드 뮤직도 여전하다. 네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인 <언어의 정원>을 들고, 8월14일 국내 개봉에 앞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먼저 찾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만났다.

-한국에 당신의 팬이 많다. 이번이 몇 번째 한국 방문인가.
=한국에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초속 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의 개봉 시기나 DVD 출시와 맞물려 여섯번가량 방문한 것 같다.

-제목이 <언어의 정원>이다. ‘언어’에 해당하는 표현이 ‘고토노하’ (言の葉)로 보통 ‘언어’로 번역되는 ‘고토바’ (言葉)와 다르다. 뉘앙스에 차이가 있는가.
=‘고토노하’는 조금 고풍스러운 일본어로, 말의 잎사귀라는 인상을 준다. 일본어 고토바가 뭔가 죽 이어진, 단어들이 모여서 된 문장이라는 의미를 풍긴다면, 고토노하는 좀더 하나하나 말의 이파리들, 그 단편적 인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단어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이번 작품에서 본래 두 주인공은 처음에 서로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방에 대해 조각조각 알아간다. 그 느낌에 이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다카오와 유키노가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일본식 정원이다. 그래서 작품 전체가 ‘언어의 정원’인 셈이다.

<언어의 정원>의 세 번째 주인공은 ‘비’

-호수 수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이나 나뭇가지가 늘어진 장면 영상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시각화를 위해 특별하게 고려하는 부분이 있는가.
=이번 작품에서는 비를 중심적으로 표현했다. 비 오는 장면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기도 했다. 남녀 주인공에 이어 비가 세 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를 위해 기술적으로 어려운 시도를 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어딘가에 손으로 그린 요소를 넣기 위해서 노력했다. 빗방울의 파문이나 물보라 한 방울 한 방울을 손으로 그린 뒤 이를 랜덤으로 늘려 비 오는 장면을 만드는 거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서 CG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바탕에 어딘가 반드시 아날로그적 느낌이 있었으면 한다. 호수 위에 나뭇가지가 늘어진 장면도 손으로 하나하나 먼저 그린 뒤 이를 겹쳐서 입체화한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컴퓨터로 조작하더라도 손으로 그린 소재를 기본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초기 작품부터 배경이 되는 장소의 실제 사진을 많이 찍어서 작화에 반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도 그러했는가.
=그렇다.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실제 있는 장소에 혼자 카메라를 들고 가서 사진을 찍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주쿠교엔을 표현했다. 하지만 작품에는 실제로 없는 가공의 장소도 등장한다. 가령 주인공의 방이라든지 등장인물들이 사는 아파트 등이 그러한데, 이러한 곳들은 상상을 통해 스케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리고 실제 제작 단계에서는 실제 장소와 가공의 장소 사이의 차이가 눈에 띄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 데 주력했다.

-주인공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중요한 소재로 시가 등장한다.
=작품에 나오는 두 작품 모두 일본의 옛 가집인 <만요슈>(萬葉集)에 실린 단가이다.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는데 옛 사람들의 정서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데 흥미를 느꼈고, 언젠가 <만요슈>를 작품에서 다루어보고 싶었다. 우선 이를 통해 여주인공 유키노가 고전문학 선생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려 했다. 작품에서처럼 단가의 가창은 여자가 남자에게 노래를 주면 남자가 여자에게 답가를 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과거 일본에는 ‘가요이콘’ (通い婚)이라는, 남자가 여자와 교제하는 중에 여자의 집에 들러 밤을 보내고 아침에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서는 여자가 남자를 기다리는 관계가 형성되는데, 만약 비가 오거나 폭풍이 불면 남자가 돌아가지 않고 여자와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되지 않겠나. 이러한 경우의 바람이 첫 번째 단가의 내용에 담겨 있다.

-상당히 낭만적인 전통이다.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시의 의미는 어떠한가.
=유키노는 교복을 보고 다카오가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의 학생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단가를 읊으며 자신이 다카오 학교의 고전문학 선생이라는 것을 암시하려 했다. 그런데 다카오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기에 학교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유키노가 누구인지 몰랐으며 시의 암시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이후 둘의 사이가 진전되면서 다카오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도 떠나지 않고 그대 곁에 머물 것이라는 답가를 보낸다. 낭만적인 마음이 시를 통해 오간다.

대사도 음악의 일부처럼

-매 작품에 서정적인 순간이 있다. 시작할 때의 내레이션과 끝날 때 삽입되는 노래 등이 그러한데, 작품의 형식을 의도하고 작업하는 편인가.
=제대로 보았다. 분명 그런 부분을 의식해서 만든다. 이번 작품은 러닝타임이 그리 길지 않다. 대신 나는 대사도 음악의 일부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목소리의 흐름만 들어도 상당히 음악적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남자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나오면 피아노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등장인물의 목소리, BGM, 그리고 효과음인 빗소리, 이 세 가지 각각을 주의 깊게 구성해서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했다.

-이번엔 음악감독이 바뀌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이래 덴몬과 오래 작업해온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일본 팬들에게도 질문을 많이 받았다. 왜 이번엔 덴몬이 아닌가, 둘이 싸웠나 하고 말이다. (웃음) <언어의 정원>의 음악감독은 가시와 다이스케로 본래 <초속 5센티미터>의 팬이었다. 그가 몇년 전 자신이 출시한 음반을 보내주었고,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이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했는데 상당히 인상 깊었다. 그의 곡을 써도 될지 고민하다가 연락하니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이번 음악적 콜라보레이션이 가능했던 거다.

-실제 사건이나 공간과 관계없다는 마지막 자막이 기억에 남는데 이를 굳이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유키노가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몇번 등장한다. 성격화를 위해 필요한 장면이지만 배경이 된 실제 장소에서는 음주가 금지되어 있다. 신주쿠교엔은 과거 왕가의 일본식 정원으로 정비가 잘된 유료 입장 공원이다. 지나친 걱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의 팬들이 성지순례라고 해서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를 돌며 같은 일을 모방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공원쪽에 민폐가 될까 싶어서 자막을 넣었다. (웃음)

-기존 작품을 볼 때, <초속 5센티미터>과 <언어의 정원>이 서정적이고 일본적인 개인의 일상을 다루는 한축이라면,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나 <별을 쫓는 아이>는 판타지 SF로서 다른 한축을 이룬다. 경향이 다른 작품이 번갈아 나오는데 의도한 것인가.
=번갈아 작품 경향을 달리해왔으며, 한 작품 이후 다른 경향의 작품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크다. 순서대로라면 다음에 판타지 작품을 선보여야 할 테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있는 것은 없다. 현재 <언어의 정원>을 일본 문예지인 <다빈치>에 소설로 연재하고 있으니 당분간 이 작품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다카오와 유키노의 이후 이야기가 소설에서 이어지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시작과 결말은 애니메이션과 똑같을 것이다. 다만 애니메이션에는 등장하지만 그 내력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부분을 자세히 하거나, 각 캐릭터를 심도있게 파고드는 스타일이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다카오는 중학교 때 어떤 아이였는지, 유키노는 어떤 선생이었는지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유키노의 엄마나 유키노의 전 남자친구의 사정 등이 나올 것이다.

<언어의 정원>

무라카미 하루키 영향 많이 받아

-당신의 작품을 보면 치밀하게 묘사된 소설을 읽는 듯하다. 일본문학에서 창작의 자양을 얻은 것이 있는가.
=본래 책 읽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특별히 한 작가를 꼽으라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들 수 있다. 한국에도 그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어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고교 때부터 대학 시절 내내 많이 읽었고 그에게서 영향도 많이 받았다.

-각본, 감독, 작화 등을 담당하는 자주 제작방식으로 유명하다.
=아직도 1인 독립제작 시스템으로 일하는 줄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 데뷔작 <별의 목소리>에서는 그러했지만 이후에는 많은 사람과 협업해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물론 각본, 감독, 콘티, 편집, 작화감독 등 중요한 부분은 스스로 담당한다. 이외의 작업들, 예를 들어 캐릭터 색 입히기나 원화와 원화를 잇는 작업 등은 여러 스탭과 함께한다.

-작품들에서 날씨가 정서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장마라는 계절적 분위기와 비가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실사영화를 찍을 땐 비나 눈이나 햇볕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반면 비나 눈을 내리게 하고, 그 양까지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 작업의 큰 장점이다. 알다시피 이번 작품에선 특히 비가 중요했다. 비 오는 장면이 리얼해서 실사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지만, 실사는 아니고 섬세하게 표현해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가령 클라이맥스에서 소나기가 퍼붓다가 잠시 저녁노을이 인물의 얼굴에 반사되고 나아가 빛이 두 인물을 감싼다. 날씨의 마법이다. 초 단위까지 날씨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큰 매력이다.

-거리상 멀리 있는 남녀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마음이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당신 작품의 공통된 특성인 듯하다.
=나는 작품 말미에 늘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려 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맺어져서 행복하다는 식의 결말을 해피엔딩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가능성도 닫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로 고즈넉한 일상성을 선보일 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주제작 시스템으로 만든 <별의 목소리> 땐 전설이 되어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기상과 물질과 빛의 마술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고정 팬을 확보했다. 폭넓은 연령대와 문화권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물에서는 자신의 특장을 버리고 평범해지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언어의 정원>이 입증하듯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정서와 이미지를 선보이는 한 여전히 신카이 마코토는 200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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