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지역에 가게 되었다고 메신저에서 울고 있던 신문기자 선배가 모임에 나타났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선배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여권 유효기간이 다 되어서 공항에서 돌아왔노라고. 덕분에 회사에서 모진 구박을 받으며 온갖 막노동을 떠맡게 되었지만 선배는 행복해했다. 우리도 모두 축하했다. 그래,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야, 그러다 가늘고 짧게 사는 수도 있겠지만.
선배가 일부러 그랬을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학 시절, 카투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헤어지겠다고 협박하는 여자친구 때문에 맹렬하게 시험 공부를 하고선 주민등록증을 놓고 시험 보러 갔던 사람이니까. 군대는 결국 현역으로 갔고, 여자친구에게 차였다.
그 뒤 몇년이 지난 주말, <더 테러 라이브>를 보면서 반성했다. 우리는 안전지대 안에서만 머무는 분쟁 지역 취재도 무섭다며 징징거리는데, SNC 이지수 기자는 용감하기도 하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다리를 떠나지 않다니. 그러고 보니 나도 한심했다. 내가 유일하게 파견(이라기보다는 안 가겠다고 떼쓰다가 쫓겨) 나간 위험 지역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퍼진 홍콩이었다. 그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여행자 보험에 들어서 돈이라도 남겨야지, 그리고 홍콩에는 관광객이 씨가 말랐을 테니 빅세일이라도 하지 않을까.
내 주변인들과 다르게 영화 속의 기자들은 참 멋있다.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불의를 파헤치고 가끔은 탐정처럼 추리도 한다(그래서 나도 어려운 사람을 인터뷰할 때면 트렌치코트를 입었는데 그런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었다). <맨 오브 스틸>의 로이스를 보라. 협박과 회유의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면서 군사기밀 지역까지 파고들어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눈밭을 혼자 맨몸으로 돌아다닌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블롬크비스트는 보도자료로 정리해줘도 이해하기 어려울 복잡한 사건과 부패를 똘똘하게 파헤친다. 그러다가 파산하거나 살해당할지도 모르는데. 현실은? 어느 언론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흡연 구역에 모인 정치부 기자들은 손에 쥔 특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거 터지면 000은 큰일나는 거야.” “언제 터뜨려?” “딴 데서 쓰면?” 권력이 눈치를 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눈치를 보지. 하지만 내게 누구보다 멋있었던 기자는 <굿나잇 앤 굿럭>의 머로와 프렌들리 콤비였다. <CBS>의 시사 프로그램 <시 잇 나우>의 진행자와 프로듀서였던 그들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대항하는 내용을 보도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윗사람에게 불려가 경고를 받는다.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는 있겠지만 광고가 빠질 거라고. 그 순간, 대륙의 유명 언론인 머로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 나하고 프레드(프렌들리)하고 광고비 반씩 낼게요. 오오오오오, 대단해! TV 광고비를 낼 만한 연봉을 받는 언론인이라니! 게다가 저 사람들, 실존 인물이라고!
물론 내가 만나지 못한 훌륭한 기자들도 많을 것이다. 언론중재위원회와 법정을 구내식당 드나들듯 하는 기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그냥 나는 애초에 직업을 잘못 골랐던 거다. (그래서 그만뒀다.) 이십 몇년 전 엄마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어린 딸을 비웃었다. “네가? 기자는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리고 말했다. “너는 둔하고 멍청하니까 고시 공부나 해. 공무원이나 판검사가 되라고.”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우리 엄마가 말하는 ‘똑똑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헤매고 있는 딸을 보며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봐, 얼마나 똑똑해? 너 같은 게 기자는 무슨, 정신 차려.” TV 화면을 가리키는 엄마의 손끝에는 한 여자가 모래바람 몰아치는 페르시아만의 전쟁터에 홀로 서서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그해는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한 해. 철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종군기자의 꿈을 심어주었던 그녀, 엄마가 공무원이나 판검사보다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주장했던 그녀는, 이진숙이었다. 맞다, 당신이 아는 그 이진숙이 그 이진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