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진경] 늦게 타올랐으나 오래 타오를
2013-08-22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진경

“현장에서 보니까 반갑더라고. 또 잘 버텨줘서 고맙고. 버티는 게 쉽지 않거든. 보통은 다 떠나지. 늦게 빛 본 만큼 오래 할 거야.”(설경구)

나이 마흔에 맞은 전성기. 연극 경력 10년이 무색하게 한때는 드라마/영화 현장에서 “보조출연자 취급”을 받기도 했던 진경은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민지영으로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켜버린다. “이젠 나를 너무 대접해줘. (웃음) 드라마로 인지도가 생기니까 다들 ‘선배님~ 선배님~’ 하더라고.” <감시자들>의 이 실장 역에 캐스팅될 수 있었던 것도 <넝쿨째 굴러온 당신> 덕이 컸다. 드라마를 본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는 “내공이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던 진경을 이 실장 역에 추천했다. “대표님이 굉장히 쿨하다. 이 실장 캐스팅을 놓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때 이유진 대표님이 ‘뭐가 문제야? 예뻐야 해? 유명해야 해? 진경으로 해!’ 그러셨다고. 그럼 난 안 예쁘단 얘긴가. (웃음) 어쨌든 과감한 캐스팅을 즐겨 하는 이유진 대표님의 수혜자 중 한명이 바로 나다.”

<감시자들>의 이 실장은 황 반장(설경구)을 비롯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감시반원들을 통제실에서 진두지휘하는 인물이다. 조의석 감독은 “이 실장을 통해 황 반장과는 다른 리더십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황 반장이 현장에서 단련된 사람 특유의 거친 카리스마와 적당한 촌스러움을 갖췄다면, 이 실장은 매사에 철두철미한 세련된 리더다. 이 실장의 등장 신을 떠올려보자. 핑크색 립스틱을 입술에 꼼꼼하게 펴바르는 이 실장. 그 공간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황 반장. 이 실장은 “노크!” 단 두 음절로 황 반장을 돌려세운다. 여성적이면서도 카리스마있는 리더의 모습을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진경은 애초 이 실장 캐릭터에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통제실에서 몇날 며칠 밤새워 일하는 여성이 어떻게 풀 메이크업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그 역시 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감시반들이 거리에서 후줄근하게 나오니까, 이 실장은 스타일리시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나는 뭔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럼 운동화만이라도?’ 그랬고. 결과적으로 감독님 생각이 맞았다. 그만큼 철두철미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이 실장의 패션을 이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도 진경은 비주얼을 통해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업에 충실했다. 어떤 상황이건 꼬박꼬박 제 할 말 다 하는 중학교 국어교사 민지영에게 안경을 씌운 건 진경이었다. “선생이 안경을 쓰는 건 굉장히 상투적이지만 그럼에도 한번 써볼까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안경을 쓰니 상투적인 설정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더라. 드라마 끝나고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 아래에 ‘안경 써라, 다시 써라’ 하는 댓글도 달리고. (웃음)”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능력, 상투적인 설정을 신선하게 표현하는 능력. 단언컨대 이것이 바로 연극 무대에서 10년간 칼을 갈았던 진경의 내공이다.

“진경 선배의 실제 모습은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4차원 개그를 펼치는 캐릭터 같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이라는 관계가 있어서, 후배 영화 잘돼야 한다는 생각에 다정한 모습도 보여주시고, 캐릭터 분석할 땐 한없이 진지하시다가, 의외의 순간에 4차원 유머감각을 발휘하시기도 하고, 어떨 땐 매우 쿨한 모습을 보이다가, ‘선배 아름다우세요’라는 말에 수줍어하시고, 욕도 잘하시고…. 내겐 좋은 연기자, 선배, 누나였다.”(<감시자들> 조의석 감독)

진경은 감각에 크게 기대기보다 철저히 분석하고 파고드는 유형의 배우다. <감시자들> 촬영을 하면서 진경은 스스로 이 실장의 감정 그래프를 그렸다(캐릭터의 감정 그래프가 어디서 유래한 건지는 몰라도,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 감독도 블루스크린 앞에서 외로이 연기해야 하는 하정우에게 캐릭터의 감정 그래프를 그려주었다. 앞으로, 캐릭터의 감정 그래프가 현장에서 유행처럼 번지진 않을지). “통제실 장면을 3일 만에 몰아서 찍었다. 감독님이 감정의 단계를 잘 계산하면 좋겠다고 해서 나름 그래프를 그려봤다. 그걸 대본 사이에 끼워 넣고 보면서 찍었다. 매 장면 똑같이 눈에 힘만 주게 될까봐.” 상대배우도 없이 블루스크린을 보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무전 내용을 ‘예상’하며 연기하는 것의 까다로움을 진경은 신을 분해하고 감정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타파해갔다. 조의석 감독이 얘기한 진경의 “불꽃연기”란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테다.

“열정이 뜨거운 친구다. 그만큼 배우로서의 자부심, 자존감도 크고. 그러다보니 연극하던 시절, 그 열정만큼 피드백을 받지 못했을 때 적잖이 힘들어했다. 더군다나 개런티는 생활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 그래서 연기 레슨 자리가 있으면 이리저리 소개를 해줬다. 그런데 괜한 엄살인 것 같다. 부와 명예를 위해 연극을 시작한 게 아니니까. 어쨌든 분명한 건 그 친구가 굉장한 애정과 열정을 연기에 쏟아부었다는 사실이다.”(강신일)

“암울했다.” 고등학교 2, 3학년 시절부터 시작된 방황은 대학을 세번 옮겨다니는 동안에도, 연극판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도 계속됐다. 전교 2등으로 외고에 입학했지만 주입식 교육에 반발하고 부모의 기대에 저항하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교실 맨 뒷자리에 헤드폰 끼고 앉아 공부 안 하는 구제불능”, “좀비” 같은 표현들로 진경은 그 시절 자신을 표현했다. 그렇게 속이 곪아갈 즈음 연극을 “생존”의 방편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다. 한국외대에 입학한 지 나흘 만에 학교를 그만뒀고, 재수해서 들어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도 2년의 시간만 보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으로 적을 옮긴다. 그곳에서도 진경은 “아웃사이더”였다. “오만석, 이선균, 문정희가 동기인데, 나이 차이가 나니까 계속 겉돌았다. 정희는 늘 주인공하고, 난 늘 코러스하고. (웃음) 학교에서 사물놀이, 춤, 노래 등을 다양하게 가르쳤는데, 그때 이광수 민족음악원에서 꽹과리와 장구를 접하는 순간 혼이 떨리면서 ‘내 길은 이거구나’ 싶었던 적도 있다.” 스물아홉살이 되어 사회에 나왔고, <브레히트의 하얀 동그라미> <이> <날 보러 와요> <돌아서서 떠나라> <클로져> 등으로 무대에 서면서 오랫동안 ‘연극’배우 진경으로 살았다. 그 사이사이 배우 매니지먼트사에서 신인배우들의 연기를 가르치면서 밥벌이를 하기도 했다.

최근 진경은 제대로 “한풀이”하듯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다. 6월에 종영한 드라마 <구가의 서>에선 여울(수지)에게 칼 대신 바늘을 쥐어주는 여주댁으로 중간 투입돼 코믹 연기를 선보였고, 현재 방영 중인 <굿닥터>에는 소아외과 수간호사 남주연으로 출연 중이다. 9월 tvN에서 방송예정인 <빠스껫 볼>에선 배우 공형진과 무려 “격정 코믹멜로”를 선보인다. 인터뷰 전날 <빠스껫 볼> 촬영이 있었다는 진경은 인터뷰 중 숏팬츠 자락을 걷어올려 촬영하다 생긴 허벅지의 멍자국을 무심히 보여주었다. 빠듯하게 진행되는 드라마 촬영이 고되다고 하면서도 스탭들의 노고를 먼저 위로하고, 고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는 그 마음이 예쁘다. “연기 외에 다른 거 안 하고, 연기만 하면서 먹고사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바람보다 더 잘된 것 같다.” 1999년 <브레히트의 하얀 동그라미>에서 함께 공연하며 진경과 인연을 맺은 강신일은 연기 ‘폭식’ 중인 진경에게 이런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최근에 드라마나 영화로 활발하게 작업하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쁘다. 단지 좀 걱정스러운 것은 지나치게 바쁘다는 거다. 쉽게 자신을 소진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고. 좀 쉬엄쉬엄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목이 말라 급하게 물 들이켜다 체하면 약도 없다는 말이 있잖나. 천천히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다.”(강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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