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여름이라 괜찮아
2013-08-30
글 : 김혜리

<숨바꼭질>이 담은 한국 도시의 주거 공간은, 영화가 겉으로 들려주는 서사보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이미지로 웅변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주희(문정희)의 집. 그녀는 쓰러져가는 복도식 아파트에 나름의 ‘펜트하우스’를 꾸미고 산다. 양문냉장고, 본차이나 찻잔, 액자에 든 복제화. 그녀의 집을 채운 가구와 소품은 중산층 인테리어의 처절한 모방이며 무엇보다 빈 곳 없는 과밀함이 그로테스크하다. 아파트 도면과 내부 컨셉 스케치 모두 전수아 미술감독이 그렸다.

7/8

영화 리뷰에 간혹 등장하는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라는 표현이 있다. 관객을 웃길 의도가 없었으나 맥락이 생뚱맞거나 어색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관객이 웃음을 터뜨리는 연출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미스터 고>를 보던 나는 한 장면에서 ‘의도하지 않은 사실주의’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스카우트한 고릴라 선수 링링을 닦달하기만 하던 성충수 에이전트는 어느 속상한 밤 자포자기한 나머지 술판을 벌인다. 고릴라를 붙들어 앉히고 마주 앉아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한 그는 빈 병 수가 늘어갈수록 링링을 전에 없이 친근하게 대하고, 급기야 자신이 권한 김치 안주를 링링이 받아먹자 대견해서 어쩔 줄 모른다. 내내 이익만 탐하는 인물로 나온 성충수 에이전트가 처음으로 귀엽고 허술한 면모를 드러내는 대목으로서 관객의 반응도 좋은 장면이다. 한편 이 막걸리 대작 신은 한국인- 특히 남성- 이 이방인과 ‘친구 먹는’ 방식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해 재미있다. 성충수 에이전트가 보여주듯 한국인이 한국인 아닌 타자에게 우정 혹은 정을 갖게 되는 과정에는, 종족과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가의 문제보다, 어울려서 취하고 같은 음식을 나눠 먹는 경험이 훨씬 중요하게 작용하는 광경을 보곤 한다. 곧이어 다른 줄 알았는데 통하더라, 알고 보니 괜찮은 녀석이라는 평이 뒤따르는데, 대개 이러한 입장변화는 대화보다 ‘스킨십’에서 비롯된다. 이 친교 패턴의 장단점을 따지기에 앞서 흥미롭다. 동물이라 해도 다름 아닌 본인의 주장으로 선수 자격을 받은 존재에게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총까지 겨눴던 인물이 저렇게 표변할 수 있을까 의아할 법도 한데 각본도 관객도 이 모순된 태도의 공존에 별반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점이 눈길을 끈다. 타자의 무엇을 공유할 수 있고 무엇이 차이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되기에 유사시 외부로부터 공공의 적이 나타나면 쉽게 우리 편으로 뭉뚱그려지지만 내부의 적을 지목해야 할 경우에도 쉽게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 고>는 지금 한국사회가 외국인, 동물을 인식하는 이미지와 그들을 응대하는 매너를 무심코 동시에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그리는 지형도에서 한국은 중국에서 물건을 골라와 부가가치를 붙여 일본과 미국에 파는 자리에 있다. 그런가 하면 <미스터 고>가 택한 일본인과 중국인의 스테레오타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인식보다 오히려 원시적으로 보인다. 중국인이 방 안에 들어오면 “우리 자장면 시켰냐?”라는 대사가 우스개로 나오고, 일본인은 여차하면 목표를 위해 무릎 꿇고 사죄하길 서슴지 않는 부자로 그리는 장면이 그러하다.

7/9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과 고어 버빈스키의 <론 레인저>를 연달아 보았다. 내 눈에는 두편 모두 ‘2013학번’ 여름영화 일동 중 상위권에 드는 수작(秀作)이라, 배가 잔뜩 불러 멀티플렉스를 나섰다. <론 레인저>가 미국 개봉 당시 평단으로부터 맞은 십자포화는 좀 의아하다. 아무리 깎아 말한 대도 <론 레인저>는 고어 버빈스키 감독과 조니 뎁의 프랜차이즈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중 2, 3, 4편보다는 훌륭한 영화라는 데에 내 소지품 중 두 번째로 비싼 물건을 걸겠다. <론 레인저>의 혹평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은 “너무 길다”인데, 149분에 이르는 이 영화의 이야기와 플롯이 과포화 상태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왜 길고 복잡해졌을까 복기해보니 만발하는 재치를 솎아내지 못하고 대화 신마다 꼬박꼬박 농담을 끼워넣으려고 한 탓이 큰 것 같다. 회중시계, 복면, 스카프 등등 스크린에 등장하는 소품마다 얽힌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하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돌아봐도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언제나 시간 관리에 그리 알뜰한 연출자는 아니었다. 이야기 자체도 푸짐한데, 이 덩어리를 다시 인디언 톤토(조니 뎁)가 추억을 회고하는 액자 구조로 둘러싸느라 영화의 부피는 더 불어났다. 그러나 <론 레인저>의 액자는 이야기의 본질적 성격을 흐려놓은 <위대한 개츠비>의 그것에 비하면 영화를 해칠 정도의 결점은 아니다. 뭐니뭐니 해도 <론 레인저>의 장황함에 내가 크게 개의치 않았던 이유는 여름이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는 속편을 만들려는 저축 심리로 그리 풍성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군데군데 가리고 감춰놓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하도 많이 보다보니 비록 장광설이긴 해도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에피소드가 촘촘히 이어지는 <론 레인저>가 기꺼웠던 것이다. 게다가 극장에 좀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 한여름 아닌가!

7/10

괴짜 히피의 이미지가 강해 간과하기 쉽지만 조니 뎁은 은근히 서부극에 특화된 스타다. 짐 자무시 감독의 <데드맨>,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가 있었고 애니메이션이지만 <랭고>도 웨스턴이었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도 ‘변장한 서부극’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죽은 까마귀를 머리에 얹고 얼굴에도 ‘크로우’ 화장을 한 <론 레인저>의 톤토는, 조니 뎁이 연기해온 진한 메이크업과 4차원 언행으로 규정되는 캐릭터들의 결정판이다. (그리고 ‘결정판’이라는 표현에는, “여기까지는 훌륭하지만 한번 더 반복되면 식상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두껍다 못해 쩍쩍 균열이 간 톤토의 분장은 전작과 달리 “이것은 가면”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내놓고 전달한다. 그래서 이 가면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어느 때보다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타임>의 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이미 아주 멋진 대답을 썼다. “조니 뎁은 무표정 뒤에서 ‘만약 내가 진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다면 나는 항상 비명을 지르고 있어야 할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조니 뎁의 인물들은 우리를 위해 배려하는 중이다. 솔직히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털어놓기 시작하면 우리가 3분도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아서.

7/15

보도자료 유감. 언젠가부터 국내외 영화를 막론하고 홍보사에서 배포하는 자료에서 완전한 스탭 크레딧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심한 경우에는, 기술 스탭 중 제일 먼저 거론되는 촬영감독의 이름도 귀퉁이에서 간신히 찾아낸다. 조명, 의상, 무술, 특수효과팀을 대표하는 영화인 이름이 실려 있지 않은 예는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일제히 배포되는 자료에 포함된 제작기나 인터뷰를 인용하지 않는 영화전문지의 경우, 스탭 크레딧이야말로 보도 자료를 통틀어 가장 긴요한 정보라는 점이 문제다. 영미권 영화의 경우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나 완전한 스탭 명단을 첨부한 (먼저 개봉한) 해외 기사를 검색해서 보완할 수 있다지만 한국영화는 전화를 걸어 일일이 묻는 방도밖에 없다. 한때는 개별 영화가 개설한 홈페이지의 기본 정보 메뉴에서 스탭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한국영화 홈페이지는 (내 컴퓨터의 속도에 새삼 울분만 터뜨리게 만드는) 눈길끌기용 플래시 영상의 미로이기 일쑤다. 최근에는 테크놀로지의 기념비적 성취를 최대 덕목으로 자타공인한 어느 한국영화의 보도 자료마저 사정은 다르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누누이 언급되는 스탭의 처우에는, 합당한 노동의 대가와 더불어 작품에 창작자로서 기여한 사실을 기록하는 일도 포함되지 않을까? 스탭 정보를 꾸준히 캐묻고 알리지 않은 <씨네21>을 포함한 언론의 책임도 분명히 있겠지만, 무엇보다 각 영화를 만들고 알리는 당사자들이 일정 범위의 스탭 기본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영상자료원이나 영화미디어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제대로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1단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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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파이어>의 문신 새기기

어린 여성이어서 당하는 모욕과 폭력에 지친, 외롭고 성난 소녀들이 뭉친다. 울음을 멈추고 연대하여 반격하기로 맹세한 다섯 소녀는 비밀결사의 표식으로 서로의 등에 불꽃 모양 문신을 새긴다. 로랑 캉테 감독은 이 장면을 비장하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파자마 파티처럼 찍었다. “너 피 좀 그만 흘려줄래?”(Would you stop bleeding?) 친구 등에 침을 찌르며 키득거리는 한 소녀의 대사는 농담이지만, 피가 흐르고 멎는 것은 의지 밖의 일이라는 점에서 청춘이라는 시절의 애절함을 함축한 말로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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