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2013-08-30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캐서린 헵번 Katharine Hepburn

좀 이상한 일인데, 주위에 캐서린 헵번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뭐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드물다. 한참 뜸을 들인 뒤, 중년에 출연했던 <아프리카의 여왕>(1951) 정도를 떠올린다. 그런데 캐서린 헵번은 미국영화협회(AFI)가 1999년 발표한 ‘전설적인 여배우 베스트 50’ 리스트에 따르면 1위에 오른 배우다. 그 뒤를 베티 데이비스, 오드리 헵번, 잉그리드 버그먼, 그레타 가르보 등이 뒤따른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카데미 주연상을 네번 받아, 남녀 통틀어 최다수상자라는 영예도 누리고 있다. 그런데 관객의 기억에는 상대적으로 먼 배우로 남아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신을 만나고 독배를 마시다

영화계의 신인일 때, 캐서린 헵번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 불과 26살에 출연한 데뷔 세 번째 작품인 <모닝 글로리>(1933)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자신의 페르소나를 각인시켜주는 작품인 <작은 아씨들>에도 출연했다. 헵번은 네딸 가운데 둘째, 곧 왈가닥이고, 호기심 넘치고,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작가를 꿈꾸는 몽상가인 조(세핀) 역을 맡았다. 바로 이 역할로 헵번은 사랑받았지만, 동시에 그런 이미지 때문에 오랜 기간 관객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관객은 헵번이 여성평등의 아이콘처럼 행동하는 데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작은 아씨들>의 감독은 조지 쿠커다. 멜로 드라마와 로맨틱코미디의 장인인 조지 쿠커는 당시 할리우드 내 동성애 영화인들의 보스 같은 존재였다. 그의 주변에는 남자들이 들끓었다. 그의 집에서 파티가 열릴 때면 친한 친구들, 이를테면 서머싯 몸 같은 유명 인사들이 넘쳐 났다. 그래서인지 쿠커는 여배우들과는 동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여배우의 감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성들과 호흡을 잘 맞췄다. 특히 여성의 불리한 사회적 위상에 주목하는 예민한 감각이 돋보였다. 이때 쿠커가 발굴한 배우가 바로 캐서린 헵번이다. 조세핀 역의 헵번은 영화 속에서 웬만한 계단은 거의 뛰어다닐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고, 남자들과 달리기를 해도 더 빨랐고, 어린이들을 위해 연극을 연출하는데, 자신은 수염을 기른 기사 역할을 맡았다. 말하자면 조세핀은 남자 같은 여성이었다. 한편에선 이런 활기찬 모습을 독립적인 여성의 미래로 수용하며 지지도 보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이미지라며 거부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조지 쿠커는 연이어 <실비아 스칼렛>(1935)에서 헵번을 캐스팅하고, 상대역으로 캐리 그랜트를 내세워 다시 한번 히트를 노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금은 페미니즘의 어떤 전범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흥행에서 참패했다. 여기서 헵번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는 여성으로 나온다. 짧은 머리에 양복차림의 헵번은 선이 얇은 미소년처럼 보였다. 다른 여성과 키스(해야)하는 장면까지 나와서인지, ‘헵번은 레즈비언’이라는 소문도 돌았고, 그러면서 관객은 점점 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배우이고, <작은 아씨들>로 스타로의 등극이 눈앞에 있을 때인데, 헵번은 추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직상승과 급전직하의 사례를 꼽자면 헵번의 경우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1930년대가 끝날 때까지 그의 불운은 계속됐다. 역시 지금은 고전으로 평가받는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1938)에서 헵번은 상대인 캐리 그랜트를 쥐락펴락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런 이미지는 여전히 거부감을 몰고 왔다. ‘건방지고, 목소리 크고, 남자를 깔본다’는 불만들이 쏟아졌다. 어느덧 헵번은 제작자들로부터 ‘흥행의 독약’이라는 오명을 들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역에 지원할 때, 제작자 셀즈닉은 “레트 버틀러(남자주인공)가 당신을 12년간 따라다닐 것 같지 않다”며 거절했다. 건방지고 여성미라곤 없는 배우라는 고정관념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는 뭘 해도 엎어질 때였다.

독립여성의 아이콘으로 비상하기까지

헵번의 독립적이고, 여성 주체적이고, 지적인 이미지가 지지를 받는 데는 2차대전이 발발한 뒤,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면서부터다. 그 전환점은 역시 조지 쿠커가 감독한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이다. 헵번은 여전히 독립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그런데 전략이 좀 바뀌었다. 영화는 헵번이 남편인 캐리 그랜트에게 한방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지며 시작한다. 예전엔 헵번이 남자들을 윽박질렀는데, 이번에는 남자들이 그녀를 골탕먹인다. 감독 쿠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헵번이 당하는 걸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쿠커는 헵번이 사람들의 동정을 받을 정도로 충분히 당하게 한 뒤, 개성을 발휘하도록 내러티브를 짰다고 밝혔다.

사회에서 남성들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독립적인 이미지가 강한 헵번의 인기와 지지는 점점 높아갔다. 그런 페르소나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게, 파트너인 스펜서 트레이시와 공연한 코미디들이다. 출발은 <올해의 여성>(1942)이었고, 이런 협업관계는 트레이시의 유작인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조지 쿠커의 <아담의 갈비뼈>(1949)가 대표적인데, 헵번은 바람 피운 남자를 죽이려던 살인 혐의 여성의 변호사로, 또 트레이시는 그 여성을 고소하는 변호사로 나온다. 법정물에서 변호사 연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여배우가 흔치않을 때였다. 특히 상대가 노련한 변호사로는 적역인 트레이시라면 더욱 탐나는 역이다. 헵번은 처음엔 형편없이 밀리다가, 점점 전세를 역전시키는 여성 역할로 각광받았다.

두 배우는 결혼하지 않은 채 27년간 동거하며, 모두 9편의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트레이시는 기혼남이고, 헵번은 처녀 신분이었다. 헵번의 독립적인 여성 이미지는 현실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헵번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만들 때는 사실상 죽어가는 트레이시와 마지막으로 공연했다. 트레이시는 자기 분량을 모두 찍은 며칠 뒤 죽었다. 이 작품으로 헵번은 무려 34년 만에 아카데미 주연상을 다시 받았다(나머지 두번은 1968년의 <겨울의 사자>, 1981년의 <황금연못>). 트레이시의 장례식에서 헵번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트레이시의 가족들은 그녀의 참석을 거부했다.

캐서린 헵번은 의사 부친과 페미니즘 운동가 모친 사이의 진보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피켓시위를 할 때 딸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이런 성장배경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헵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스크린에서도 그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잊혀질 위기의 시련도 있었지만, 자신의 개성을 끝까지 유지한 덕분에, 결국 지금은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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