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만날 일이 많지 않았던 어느 영화감독과 함께 언론계에 관한 심도있는 잡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궁금한 게 많았다. “A 감독은 여기자들한테 인기가 많다면서요? 잘생겨서.” “… A 감독이 그러던가요?” “기자들은 정말 술값을 한번도 안 내나요??” “… 여긴 제가 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진짜 알고 싶었던 걸 물었다. “왜 <세기말> 보면 차승원이 기자하고 자잖아요. 그런 일, 가끔 있어요? 여기자들이 남들보다 좀 분방한 건 맞죠?” 와우! 지금 영화 만드는 사람이 나한테 영화에 나오는 게 전부 진짜냐고 묻고 있어! 그것도 여기자들은 아무하고나 자느냐고, 여기자에게 묻고 있다고!
영화감독마저 그런 걸 보면 세상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하긴 나도 그렇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보면서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 (존스 박사는 고고학자이긴 하지만) 유물을 한번 보기만 해도 제작연대와 양식을 줄줄 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역사 전공인 우리 과 학생들은 4.3항쟁 50주년 기념 제주도 답사를 떠났지, 1996년에(4.3항쟁은 1948년이라는 걸 답사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더 웹툰: 예고살인>을 보면서 쓸데없는 것들이 눈에 밟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되겠다고 대학에 갔지만 2박3일 땅만 팠다는 고고학과 학생처럼, 웹툰 꿈나무들이 나도 강지윤처럼 살게 될 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첫 작품으로 ‘공포 교주’가 됐다는 웹툰 작가 강지윤은 곧바로 짐을 싸서 새집으로 이사한다. 넓고 화사하고 실내에 자그마한 풀까지 있는 단독주택. 검색해봤더니 모 포털에선 소수의 인기 작가에게 회당 150만원 정도를 지불한다고 하는데, 과연 웹툰 작가가 한방에 저런 집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공포 웹툰은 캐릭터 사업도 못할 텐데. 그냥 조그만 원룸이나 작업실에서 찍어도 될 걸 왜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했을까. 넓은 집에서는 딱히 하는 일이 없고 귀신은 밖에서 만나는 강지윤을 보며 나는 궁금했다.
<7급 공무원>을 보면서도 궁금했다. <조선일보> 시험에 떨어지고 국정원에 붙었던 학교 선배는 과연 저렇게 예쁜 동료와 저렇게 드라마틱하고 비밀스러운 일상을 살고 있을까. 그 선배가 좀 스파이처럼 생기긴 했었는데. 하지만 오늘은 생각한다, 선배, 설마 댓글 달며 청춘을 다 보낸 건 아니겠지.
오래전 <와니와 준하>의 애니메이터들이 예쁘게 일하는 사무실을 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진짜 애니메이션 회사를 취재하러 갔다. 열악한 환경에 대해 듣기는 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떡진 머리를 틀어올리고 좀비떼처럼 엎어져 일하고 있는 애니메이터들과 <와니와 준하>의 그 드넓은 간극이라니.
물론 영화는 영화이고, 그걸 아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치라는 것이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게 높아진다. 기자들은 사명감을 안고 진실을 파헤치는 것 같고, 변호사들은 사명감을 안고 진실을 파헤치는 것 같고, 형사들은 사명감을 안고 진실을 파헤치는 것 같다. 멋있지만 현실은 다를 때가 많으니, 그걸 꿈의 씨앗 삼아 직업을 고르지는 말자.
대학 시절, 한국사를 택한 신입생들과 처음 만난 교수들은 말했다. “<환단고기> 보고 여기 온 사람은 그걸 전부 잊도록.” 그 이야기를 들은 고고학 전공 학생은 말했다. “우리는 <인디아나 존스>였어.” 아, 그리고 여기자와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사람은 <세기말>을 전부 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