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 보기 전에는 설마 정말 집을 짓는 이야기일까 싶었고, 보고 난 직후에는 로맨스를 색다르게 풀어나가기 위해 건축이라는 소재를 갖다쓴 거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집짓기가 영화의 핵심 키워드였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 출신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던 여자가 서울로 유학을 와 강남에 사는 의사와 결혼했으나 곧 파경을 맞은 뒤 고향에 있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위해 집을 지어준다는 이야기인데 다만 그 집을 설계하는 남자가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사귀었던 가난한 서울 남자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개의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건축가 승민(이제훈/엄태웅)-서연(수지/한가인)-수지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관계가 첫째이고, 승민-서연-승민의 약혼자 은채(고준희)로 이루어진 관계가 있다. 둘 중에서 첫 번째, 즉 아버지를 위해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딸의 욕망과 그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주는 존재로서의 옛 남자의 관계로 이루어진 삼각형이 좀더 흥미롭다.
영화는 서연이 대뜸 승민의 건축사무소를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왜 왔느냐는 승민의 질문에 서연은 “내가 널 왜 만나러 왔겠어? 너 하는 일이 뭐야? 집 짓는 일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건축가가 어찌 승민뿐이랴. 그는 거절한다. “나 못해. 나 이런 거 한번도 안 해봤어.” 그러나 그는 결국 첫사랑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서연이 승민이 제시한 신축 설계안을 마뜩잖아하는 것이다. 이때 승민의 약혼자이자 같은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은채가 서연의 욕망을 읽고(동시에 옛 애인에게 온전한 새집을 지어주려는 약혼자의 은밀한 욕망 역시 간파하고) 새로운 제안을 한다. 신축이 아니라 증축을 하라는 것. 서연의 욕망은 삼각형에서 아버지라는 꼭짓점을 제거하고 승민과 ‘새집을 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꼭짓점을 남겨둔 채 승민과 새로운 게임을 벌이려는 것이다(‘증축’). 반면 승민의 욕망은 아버지라는 방해물을 깨끗이 제거한 채 서연을 독점하는 것일 것이다(‘신축’). 약혼자에게 욕망을 읽혔기 때문에 승민은 더이상 신축을 고집할 수 없게 되고 서연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게 되었다. 서연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은채가 포함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삼각관계까지 얻게 되었다. 이로써 게임은 더 흥미롭게 흘러가게 된다.
서연은 은채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승민의 넥타이가 별로라고 지적한다. 너무 알려진 은유여서 좀 뻔하기는 하지만, 넥타이는 바로 승민의 남근/팔루스이다. 나중에 서연은 백화점으로 가 승민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사서 승민과의 만남에 들고 가지만 은채의 출현으로 이 노골적이고 음란한 계획은 좌절된다. 대신 그녀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병실로 간다. 더이상 넥타이를 맬 일이 없을 노쇠한 아버지는 딸의 선물을 의아/난감하게 여긴다. 아버지는 자기가 오래전에 지은 집, 딸과 함께 살던 그 집을 허물지 않고 새롭게 증축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도면을 받아들고는 “이제야 집 같다”고 만족을 표한다. 그러면서 이혼녀인 딸에게 “너도 내려올 테니 그럼 피아노 한대는 놓을 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은 서연이 피아노를 전공했다는 것,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서 자기 실력으로는 연주자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대사를 통해 관객은 피아노가 서연 자신의 욕망이었다기보다 아버지의 욕망이었다는 것, 즉 서연은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서연은 왜 승민에게 “너와 살고 싶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살 집을 지어다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는/말할 수 없는 것일까. 라캉이라면 서연을 전형적인 ‘히스테리자’라고 불렀을 것이다. 라캉은 히스테리자를 “자신의 욕망을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주체”로 정의한 바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 서연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바꾸는 식의 게임을 벌인다. 병든 아버지를 빌려 승민에게 접근하고 승민을 빌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서연의 진짜 욕망은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돼 있다. 은폐돼 있는 욕망이 어찌 만족을 알겠는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캐나다영화 <스틸> 역시 집을 짓는 이야기다. 크레이그와 아이린은 평생을 함께해온 농사꾼 부부다. 치매에 걸린 아이린에게 낡은 2층집은 매우 위험하다. 평생 모든 일을 제힘으로 해온 크레이그는 부부만 살 수 있는 1층집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짓기 시작한다. 그러나 공무원이 찾아와 건축법 위반을 지적하며 공사를 막는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방식 그대로 집을 짓지만 현대의 법은 도면 없이 짓는 방식을 허용하지 않으니 크레이그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아내의 정신은 이미 온전치 않고 자신 역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안다. 시간이 없다. 크레이그는 끝까지 싸워 결국은 혼자 힘으로 아내를 위한 집을 짓는다. 감동적인 구석이 없지 않지만 <스틸>은 <건축학개론>과 달리 별 재미가 없다. 모든 욕망의 방향이 너무 직선적이다. 자식들이 잠깐 나타나 아버지를 말리지만 “이건 우리 부부의 일이다. 너희들은 상관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바로 물러나고 만다. 부모와 자식간의 분리가 일찍, 분명하게 이뤄지는 서구 백인들의 문화에서 부부간의 관계에는 설령 자식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한다. 반면 <건축학개론>에서 보듯 우리의 남녀 관계는 훨씬 신경증적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분리는 여간해서는 이뤄지지 않으며 거의 모든 애정 관계가 부모(특히 이성 부모)와의 관계를 삼각형의 한축으로 하여 이뤄진다. 남자의 연애와 결혼은 반드시 자기 어머니를 삼각형의 한축으로 상정하고, 여자는 아버지를 역시 한축으로 삼는다. “여자는 아버지 닮은 남자와 결혼하고 남자는 은연중에 자기 엄마와 궁합이 맞는 여자를 찾는다”는 우리 속설은 이런 집단 심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서연은 제 욕망을 타인의 욕망으로 바꾸려는 여자다. 그래서 늘 자기를 속인다. 옛 남자를 찾아간 이유는 오직 아버지에게 집을 지어주려는 효심의 발로이고 옛 남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은 오직 그 남자가 패션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기 욕망을 차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승민의 욕망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겪은 바 있는 승민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은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크레이그 같은 성숙한 남자가 최고겠지만 우리는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민 같은 남자나 자기 욕망을 모르면서도 뻔뻔한 서연 같은 여자에게 더 끌린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의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