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종말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2013-09-27
글 : 김혜리
- 2013 여름영화 비망록

“나의 지구를 지켜줘.” 2013년 여름영화들이 상상한 미래 풍경의 갤러리다. <엘리시움> <월드워Z> <애프터 어스> <감기> <오블리비언> <설국열차>(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8/13

<아이언맨3>로 예년보다 일주일 일찍 시작한 여름영화 시즌이 오늘 <엘리시움>의 언론 시사로 종착역 플랫폼에 진입한 느낌이다. 애니메이션 <몬스터 대학교>와 <슈퍼배드2>가 남아 있긴 해도 영화의 달력으로 처서(處暑) 즈음이라 해도 무방하다. “드디어 종말도 종말이구나.” 이것이 2013년 여름을 전송하는 나의 즉각적 감회다. 할리우드가 제출한 시나리오에 의하면 지구의 미래 연표는 쑥대밭이다. <월드워Z>에서 지구는 시체를 소생시키는 초자연적 역병의 만연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다. (4월 개봉작이긴 하지만) <오블리비언>의 진술에 따르면 지구는 2017년 외계인 침공에 핵무기로 반격한 여파로 사람이 살지 못하는 별이 돼버렸고 <애프터 어스>의 인류는 2072년을 기점으로 기상 이변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포기했다. <퍼시픽 림>의 인류는 태평양 해구에서 솟아오른 거대 괴물에게 지구 점유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엘리시움>이 그리는 2154년 지구는 더이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들만 마지못해 목숨을 이어가는 슬럼이다. 그러니까 규칙적으로 극장을 방문하는 관객이라면 전 주말 외계인 침공으로 망할 뻔했던 지구가 이번주에는 돌림병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걸 목격하는 동시에 다다음주엔 아무도 살지 않는 자원 식민지로 전락하리라는 예고를 듣는 식으로 4개월을 보낸 셈이다.

지구 패망 위기가 할리우드의 소재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2013년 여름 블록버스터가 종말을 다룬 빈도와 방식은 확실히 별스럽다. 지구 혹은 인류의 끝장은 더이상 SF 장르에 특화된 서사 모티브가 아니라 1억5천만달러 이상 급의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기본 사양이 된 인상이다. ‘아포칼립스’라는 시제(詩題)를 건 백일장이라도 열린 형국이다. 왜일까? 가장 간단한, 따라서 진실에 가까운 답은, 오늘날 영화들이 다른 무엇보다 규모를 겨루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은, 즉 최상급 자극의 다른 표현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예고편을 보며 “헉, 백악관을 폭파하다니!” 경악했던 관객은 같은 감독이 지구를 통째로 얼려버린 <투모로우>(2004) 이후로는 어느덧 “재난=행성의 종말”이라는 공식에 익숙해졌다. 둘째, 21세기 대중의 집단 무의식을 영화가 반영했는지 할리우드가 그것을 부추겼는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물음이지만 지금의 할리우드영화와 관객은 종말의 선언 앞에서 예전처럼 기겁하지 않는다. 아니,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표현해도 좋다. 거대 자본의 영향력을 국경이 가로막지 않고 교통과 정보 네트워크의 발달로 좁아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재앙이든 더이상 국지적일 수 없다고 수긍하게 됐다. 종말의 이미지는 당연하고 심상한 것이 됐다. 변종 조류독감으로 서울의 위성도시가 봉쇄되는 사태를 그린 한국영화 <감기>에는 묵시록적 이미지의 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과한’ 장면이 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감염자를 포함한 사망자의 시신을 기중기로 퍼올려 산처럼 쌓아올리는 <감기>의 이미지는, 서사의 필요와 현실적 개연성을 넘어서면서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그대로 데려온다.

8/14

올여름 스크린의 묵시록 홍수를, 재난액션영화에 으레 따르는 알리바이로 가벼이 넘기지 못하고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 중에는, 최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와 제프 니콜스의 <테이크 쉘터>(더 멀리는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까지)가 남긴 잔상도 있다. 이 예술영화들은 시적인 은유가 아니라 실제 사태로 세계의 멸망을 취급했다. <멜랑콜리아>와 <테이크 쉘터>에서 종말은 한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저스틴(커스틴 던스트)과 커티스(마이클 섀넌>의 중증 노이로제는 타인의 공감을 얻거나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중간 단계 없이 계속 그들의 내면에 밀봉돼 있다가, 단번에 세상의 종말이라는 극단적 결론으로 폭발해버린다. 가족이나 이웃에 닥치는 사고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사는 별이 가루가 돼버리는 것이다. 관습적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표현되는 우울한 정서를, 글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현실로 대뜸 옮겨버린 두 영화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21세기 대중의 생활 감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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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저지른 과오를 절로 반성케 했던 뇌우가 지나가니 이번엔 폭염이 극성스럽다.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가 아닌데도 해질녘 거리를 걸으면 희미하게 썩은 내가 풍겨온다. 몇해 전부터 여름의 복판이면 어김없이 느끼는 현상이다. 종말의 상상이 이야깃꾼들의 머리를 점령하기 쉬운 환경인 건 분명하다. 올여름 할리우드가 종말을 이야기하는 방식의 경향은 엄밀히 말해 묵시록이 아니라 묵시록 이후(post-apocalyps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들에서 세계의 파멸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며 지구에 남아 있는 인간들은 시한부 삶을 산다. 몇몇 영화에서 인류는 다른 별이나 우주정거장으로 이주했고 지구는 에너지원만 채취하는 광산으로 전락한다. 한국영화 <설국열차> 역시 온난화를 막으려는 방책이 빙하기를 부르는 바람에 말하자면 ‘B.T.’(기차 이전)와 ‘A.T.’(기차 이후)로 연대가 나뉜 시대의 이야기다. ‘묵시록 이후’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지구라는 행성이 살아남아도 ‘세계’는 무너질 수 있어서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살아남는다 해도 문명은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디스토피아라는 단어가 영화 기사에 한창 등장했던 세기말을 추억하며 비교해보자. 1970년대 <포세이돈 어드벤처> <타워링> 계보를 이어 1990년대 말 재난영화 르네상스를 이룬 <아마겟돈> <딥 임팩트> <단테스 피크>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종말은 어찌됐든 막판에 저지된다. 용암이 마을을 덮쳐도 주민들은 살아남고 비록 희생자를 내지만 거대 운석은 지구에 부딪히기 전에 폭파된다. 2013년은 사정이 다르다. 종말은 디폴트값으로 이미 주어져 있고 많은 영화에서 이야기의 관심은 이미 황폐하게 망가진 땅 위에서 뭘 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세기말 재난영화의 주인공들은 서민이건 미국 대통령이건 재앙과 공습에 공동 대응하는 지구인(때로는 미국인)들의 영웅 리더였다. 반면 2013년 할리우드발 묵시록의 주역들은 지도자라기보다 일단 자기 한몸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자들이다. 그들은 주저하며 경우에 따라 은퇴를 원하는 시점에 불가피하게 상황에 말려든다. 유능한 고위 군인으로 설정된 <애프터 어스>의 윌 스미스도 영화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부상을 입고 꼼짝 못하는 아버지일 뿐이고 기억을 잃은 <오블리비언>의 톰 크루즈는 제 머릿속의 지우개와 싸우느라 바쁘다. <엘리시움>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 맷 데이먼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순전히 본인의 목숨을 구하려는 이기적 동기로 움직인다. 타인과 공동체에 그의 싸움이 결과적으로 가져다준 혜택은, 영화를 처음부터 추동한 목표는 아니다. <월드워Z>의 브래드 피트가 그나마 인류를 구하는 정통파 영웅에 가까우나 그 역시 유엔 전직 조사관으로서 본래의 직장 업무를 수행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올여름 할리우드영화들이 제시하는 종말의 원인은 해일, 운석, 화산 폭발처럼 단일한 재앙이 아니다. 예컨대 <월드워Z>는 도입부에서 불길하고 어수선한 뉴스들을 무작위로 나열한다. 출렁이는 경기, 금융 자본의 과도한 탐욕, 종교적 편견, 테러, 환경오염, 비리, 신종 역병,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의료 서비스. 곧 이어지는 좀비 대란의 원인을 영화는 콕 집어 지목하지 않는데 이는 내게 모호하다기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세상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고 미디어는 수많은 고발을 쏟아내는데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는 도무지 선명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현기증이 바로 우리가 매일 아침 대면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거대 괴수 떼가 해저에서 솟구친다고 해도 온 세상이 그들의 발에 밟혀 멸망하지는 않을 터다. <퍼시픽 림>의 설정대로 바다의 폐쇄로부터 파생될 경제사회적 소요, 생태계 변화, 이전투구가 종말을 마저 완성할 것이다.

8/17

캐릭터로 돌아보자. 좀비, 로봇, 외계 생물체…. 여름영화 속 상상의 적(敵) 가운데 로봇과 외계 생물체는 인간과 다른 종, 즉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대표한다. 반면 좀비는 우리와 한끗 차이다. 바이러스로 변태를 일으킨 인간, 살아 있으나 죽지도 못한 자(un-dead)다. 그들은 내부로부터 우리를 파괴시키는 재앙의 상징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웜 바디스>부터 <월드워Z>, TV시리즈 <워킹 데드>까지 최근 좀비가 모으고 있는 새삼스런 인기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지만 가상의 ‘괴물’ 중 좀비의 위협이야말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재앙과 유사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일 솔깃하다. 약도 듣지 않는 신종 전염병이나 금융위기를 통해 무서운 속도로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대책 없는 위기를 경험한 대중이, 좀비에게서 비슷한 공포를 보고 반응한다는 주장이다. 한편 2013년 여름에 출격한 슈퍼히어로 중 승자는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하나다. <아이언맨3>는 볼거리나 메시지, 액션에 앞서 무엇보다 캐릭터 드라마로서 탄탄하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가장 결정적인 성공의 열쇠가 됐다. 일본 문화의 이국적 매력에 집중한 <더 울버린>에서 볼거리는 정작 울버린이 아니었고 <맨 오브 스틸>은 슈퍼맨을 재해석하고 심각한 드라마를 부여하려고 애를 썼지만 주석만 길게 붙였을 뿐 이 캐릭터에 현대적인 매력을 불어넣어 육화하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아이언맨>의 배우 교체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배트맨 vs 슈퍼맨>에서 슈퍼맨 역의 배우가 바뀐다 해도 큰 반발은 있을 성싶지 않다.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여름 통산 3위에 오른 <맨 오브 스틸>은 한국에서는 여름에 개봉된 해외영화 가운데 6위(전국관객 218만명)를 기록했다. 파괴의 규모로 최고치를 기록한 <맨 오브 스틸>은 일주일 뒤 개봉한 암담한 비주얼의 좀비 재난영화 <월드워Z>(523만명)에 큰 차이로 압도당해 놀라움을 안겼다. 3주 뒤 개봉한 한국 스릴러 <감시자들>(550만명)과 <맨 오브 스틸>에 비하면 고풍스런 <레드: 더 레전드>(298만명)도 <맨 오브 스틸>을 압도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스크린 위의 대규모 파괴에 대한 관객의 피로감이다. <맨 오브 스틸>의 마지막 30, 40분에 벌어지는 슈퍼맨과 조드 장군의 혈투는, 포만감을 넘어 토할 지경까지 계속된다. 물리적 폭력의 결과에 영화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책임해 보였고, 포스트 9.11 이후 만연된 도심 테러에 대한 공포를 착취했다는 혐의마저 받았다. 한달 뒤 개봉한 <퍼시픽 림>은 <맨 오브 스틸>보다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나 거대 괴수 vs 거대 로봇의 대결도 기대만큼 관객의 흥미를 끌진 못했다. 반면 <월드워Z> <감시자들> <레드: 더 레전드>는 이들 틈에서 여성관객의 호감을 산 남성적 장르물로서 선전했다. 한쪽에서는 2013년 들어 어떤 할리우드영화도 3D 매표 수입이 전체 극장 수입의 50% 이상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통계도 들려온다. 이 모든 지표를 ‘3D 액션 스펙터클’에 대해 누적된 관객의 피로가 일정한 선에 이르렀다는 신호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8/23

거대 블록버스터와 속편 의존도가 전례없이 높아진 할리우드의 창의력 고갈과 체질 악화는 꾸준한 우려를 불렀다. 3억달러급 영화가 서너편 연달아 실패할 경우 영화산업이 내파될 수도 있다는 지난 5월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내놓은 경고는 이 근심의 정점을 찍었다. 그럼에도 2013년 여름영화가 낸 결과가 할리우드의 노선을 바꿀 것 같지는 않다. 우려스러운 점은 그나마 코믹스나 TV시리즈 원안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애프터 어스> <오블리비언>(감독의 미출간 그래픽 노블이 원안) <퍼시픽 림>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결과를 냈다는 점이다. 반면,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혹평을 받건 말건 6편을 내놓으며 갈수록 돈을 많이 벌고 있다. 할리우드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역시 생경한 캐릭터와 이야기는 안된다”는 결론에 재차 밑줄을 긋는데도 놀랍지 않다. 이 대목에서 살짝 맥이 빠지는 이유는 <애프터 어스> <오블리비언> <퍼시픽 림>이 각색물도 아니지만 그리 독창적인 시나리오도 아니라는 점이다. 세 영화는 장르의 관습적 설정과 인용으로 가득하다. 어느새 우리는 오리지널리티는 둘째치고 “창작 시나리오인 게 어디야” 하며 감지덕지하게 됐다. 두 번째로 현저한 현상은 <애프터 어스> <퍼시픽 림>을 포함한 미국 내 흥행이 기대를 밑돈 영화들도 해외 박스오피스 수입으로 그럭저럭 손실을 메우고 있다는 점이다. 할리우드 전체 극장 수입의 70%에 육박하게 된 해외 박스오피스는 스튜디오들로 하여금 점점 더 언어적, 문화적 장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단순한 서사와 유명 원작, 스타 캐스팅, 액션에 치중한 기획으로 기울게 하고 있다. 특히 현재 세계 2위 규모의 영화시장인 중국은 2020년이면 1위인 북미를 추월하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올여름 접한 가장 시사적인 소식은 <아이언맨3> 중국 개봉판에 판빙빙 등 중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중국 촬영분이 포함돼 있다는 뉴스였다. 중국 관객과 평론가들은 이 장면이 다른 나라에서 개봉된 <아이언맨3>에서는 누락됐다는 점에 분개했다지만 나는 그저 “머지않아 블록버스터들의 중국판, 러시아판이 관행적으로 만들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겠구나” 놀랄 따름이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 역시 북미 흥행(1억달러 미만)의 손실을 해외에서 상쇄할 전망이다. 홍콩이 영화의 주요 배경인 만큼 역시 중국시장의 최종 수익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델 토로는 괴수(카이주)에 맞서 싸우는 거대 로봇 예거 군단과 조종사들도 러시아, 중국을 포함하는 다국적 팀으로 구성했다. 영화지 <엠파이어>의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이는 해외 관객에 구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나머지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게다가 <퍼시픽 림>은 아시아 여성 캐릭터를 전투의 주역으로 기용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모험적인 설정으로만 여겨졌겠지만 중국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변화된 시장에서는 스튜디오로서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법하다.

8/24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여름영화를 꼽으라면 <퍼시픽 림>부터 꼽겠다. 액션의 사이즈로 승부하는 <트랜스포머> <고질라>의 아류 기획처럼 보이지만, <퍼시픽 림>은 체질적으로 예스럽고 사적인 취향에 젖어 있는 영화다. 비단 스팀펑크 양식의 녹슬고 이끼 낀 프로덕션 디자인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예거 조종사(레인저)들의 태도나 분위기를 우리가 2차대전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의 그것처럼 묘사한다. 2차대전기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악마의 등뼈>에서 델 토로가 애착을 갖고 그린 시대이기도 하다. 여러 영화들이 시도해온 아주 큰 기계와 큰 괴물이 벌이는 물리적 충돌의 느낌을 영화적으로 살리는 데에서도 <퍼시픽 림>은 출중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충격량은 늘어나는데 관객의 반응은 둔감해져버리는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와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이 실패한 지점이다. 독심술사 같은 표현은 피하고 싶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그냥 깨닫게 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에게 로봇은 사랑의 대상이고 마이클 베이에게 로봇은 핫팬츠를 입고 물에 젖어 바이크 위로 몸을 숙인 글래머 여배우와 별다르지 않은 야한 피사체다.

8/26

<몬스터 대학교> 시사에 다녀왔다. <몬스터 대학교>는 즐길 만한 가족 영화고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진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재미의 뇌관을 픽사만의 발상과 감수성이 아니라 기존 학원물, 버디영화, 스포츠영화의 입증된 처방에 빚지고 있다. 본편에 앞서 상영된 디즈니의 <플레인>(<카>를 비행기 버전으로 옮긴) 예고편과 단편 <파란 우산>을 본 소감도 마찬가지다. <카2> 이후 픽사는 위대했던 1세대와 아직 오지 않은 차세대 주자 사이에서 침체된 과도기를 보내고 있다. <니모를 찾아서> 속편인 2015년 <도리를 찾아서>까지 이 이행기는 계속될까? 다음달 방한하는 <몬스터 대학교>의 감독과 제작자로부터 픽사 내부자들의 고민을 들을 기회가 있길 희망한다.

8/27

후쿠시마 원전 유출 방사능 오염수가 6년 안에 태평양 전체에 퍼질 거라는 뉴스가 떴다. 생뚱맞게도 자동차 백미러의 문구가 떠오른다. “미래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퍼시픽 림>에서 태평양이 봉쇄된 다음 어찌 되었더라? 급히 기억을 더듬어본다.

싫어요

왜 갑자기 벗고 그래?

2013년 여름영화를 통틀어 당혹스러웠던 순간을 돌아본다. 우선 <스타트렉 다크니스>에서 캐롤 마커스 박사(앨리스 이브)가 커크 함장 앞에서 난데없이 옷을 훌러덩 벗던 맥락 제로의 장면, 그리고 가뜩이나 긴 영화를 더 길게 했던 <론 레인저>의 액자 구조. 한참 몰입하다가 이야기의 청자인 소년이 “에이, 거짓말이죠?”라고 끼어들 때마다 김이 샜다. 별반 의미없어 보였던 <오블리비언>의 에필로그. 한국, 할리우드를 통틀어 올 여름영화에는 유난히 스트레스를 주는 소년, 소녀 캐릭터가 많았다. <미스터 고>에서 은근히 고릴라 링링을 착취하는 웨이웨이, <애프터 어스>에서 귀엽기엔 너무 크고 의젓하기에는 어설펐던 키타이, 귀여운 어린이의 이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였던 <감기>의 미르.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시즌2를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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