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2013-09-18
글 : 김남훈 (tbs 교통방송 진행자)
프로레슬러 김남훈, <정무문> 재개봉을 앞두고 전설의 이소룡을 추억하다
<정무문>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열어보자. 그곳에 ‘이소룡’을 입력해보자. 무려 83개 국어로 기술된 자료가 모니터 화면에 출력된다. ‘톰 크루즈’는 84개 국어로 기술되어 있다. 이소룡은 1973년 7월20일 세상을 떠났다. 활동을 멈춘 지 40년이 지난 배우가 당대의 인기배우인 톰 크루즈와 겨우 한개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 특별함에 영혼마저 매몰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을 무도가로서, 액션스타로서 또는 주먹쟁이로서의 인생을 결심했다. <정무문> 재개봉을 계기로 그를 돌아보는 글을 써보겠다고 <씨네21>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마감날 하루를 더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전날 TV촬영용 경기를 찍다가 왼쪽 무릎이 살짝 돌아간 상태에서 도서관에서 빌린 자료를 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려봤다. 징징대는 왼쪽 무릎을 감싸쥐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경험은 무척 이채로웠다.

<당산대형>

우리는 그가 떠난 줄 몰랐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 속을 뒤집어 들어가는 것이 구차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아니, 왜, 현재의 관점에서 그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윤색되었을 대뇌피질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그런데 이소룡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 아니 그것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1973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살인 나는 1974년에 태어났다. 그의 사후에 태어난 나에게 생전의 이소룡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제법 생생하다. 내 고향은 경기도 송탄이다. 1995년에 평택시로 편입되어 이제 행정구역명이 사라진 곳으로 ‘미군부대’와 ‘부대찌개’ 그리고 ‘길버거’로 유명한 곳이다. 송탄에는 제일극장과 삼보극장이 있었는데 제일극장은 300원, 삼보극장은 500원의 입장료를 받았다. 당시 시장통에서 옷장사를 하던 부모님의 수입은 좋은 편이었고, 나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집에서 먼 제일극장보다 200원 비싸긴 했지만 문 열고 나와서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리면 극장 매표소가 보이는 삼보극장을 자주 애용했다. 문화시설이 전무한 기지촌에서 영화관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이 두 극장은 종종 이소룡 영화를 상영하곤 했는데 서로 신사협정을 맺었는지 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소룡 영화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골목 어귀에서는 그의 괴조음과 몸동작을 흉내내는 꼬맹이들이 생겨났고, 심지어 <사망유희> 속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동네를 돌아다니는 ‘약간 맛이 간 형’도 있었다.

이소룡이 이 땅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중/고등학교 인근의 체육사에는 엄연히 흉기인 쌍절곤이 무술용품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롭게 판매되었고, 그걸 산 꼬맹이들은 몇번 휘두르다가 머리가 터지거나 이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가기 일쑤였다. 또는 학교 소지품 검사에서 선생님에게 발각돼 압수되는 것이 바로 쌍절곤의 운명. 이처럼 학교 앞의 작은 순환경제생태계를 형성하게끔 한 것은 모두 이소룡의 공로다.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뭔가 눈에 띌 만한 개인기가 없는 초짜 연예인들은 소속사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도장에서 쌍절곤 연습을 스파르타식으로 해야 했다. “아니 쌍절곤을 돌린다고요?” 서글서글한 표정의 진행자가 말문을 트면 긴장된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붕붕 쌍절곤을 돌리는 연예인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끔씩 볼 수 있다. 이소룡은 알았을까. 쌍절곤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 아, 그나저나 난 이소룡이 죽은 줄 몰랐었다. 아니, 동네 꼬마들 모두가 이소룡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 몰랐었다. 이건 원래 1973년 7월20일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일주일 뒤 <정무문>이 국내 개봉되는 등 그의 대표작이 모두 그의 사후에 국내에 소개되면서 처음에는 약간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년에 한두번은 <죠스>와 함께 극장에서 봤던 영화 속 주인공이, 그것도 액션영화 속 주인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무문>

스티브 잡스와 이소룡

혁신이란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가 있다. 바로 스티브 잡스. 애플과 픽사의 창업자인 잡스는 혁신이라는 단어와 너무 잘 어울렸다. 원래 전자제품은 일본산 트랜지스터의 독무대였다. 특히 소니의 워크맨은 20세기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산 전자제품이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일본인 특유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기술개발은 무의미한 스펙 경쟁으로 치달았다. 마치 오로지 취업을 위해 새벽녘부터 도서관에 줄서는 대학생 같은 모습이랄까. 하지만 잡스는 달랐다. 그는 기존의 하이테크 전자기술을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다시 재조립했다. 그 결과 아이팟, 아이폰이라는 걸출한 제품이 나왔다. 과감한 생략 또는 의도적인 과장 속에서 자신만의 본질을 갖춘 제품.

그런데 이소룡의 절권도가 바로 그러하다. 절권도의 핵심은 에둘러가지 않고 핵심을 공략하는 것이다. 기존의 전통무술이 정해진 틀 안에 안주하며 그 속에서의 경쟁만을 시도했다면 이소룡의 절권도는 과감한 개방성을 통해서 다양한 무술을 받아들이고 그 안 의 핵심을 찾으려고 했다. 아이폰 이전에도 ‘인터넷이 되는 휴대폰’과 ‘음악 재생이 되는 휴대폰’은 있었다. 하지만 단말기 제조사와 이동통신사간의 알력관계에서 사람이 쓰기 쉬운 제품은 나오질 못했다.

이소룡은 영춘권의 대가 엽문에게 무술을 지도받은 이후 쿵후의 근간 위에 다양한 무술과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건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안정을 스스로 버린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소룡은 그 불안을 어떠한 형태로든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태권도의 발차기, 복싱의 스텝 그리고 주짓수의 암바까지 섭렵했다. 1973년에 만들어진 영화 <용쟁호투>의 첫 장면을 보면 UFC나 프라이드 파이터들이 사용하는 오픈핑거 글러브를 끼고 암바를 거는 이소룡을 볼 수 있다. 40년 전에 이미 그는 요즘 김동현, 추성훈, 효도르가 실전에서 선보이는 액션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소룡의 상대역을 맡았던 날씬한 몸매의 홍금보는 프로레슬러처럼 숏팬츠, 부츠, 레그가드까지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소룡의 절권도가 계속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영화배우의 아들이고 영화배우로서 계속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이해천은 광둥 오페라단 소속의 희극배우였고 자연스럽게 이소룡은 어렸을 때부터 무술영화 촬영현장에서 쿵후를 접했다. 당시에는 실제 무술고수들이 영화에 빈번하게 출연했었고 현장에서 즉석지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소룡이 영화촬영 현장에 나타날 때면 사전에 예정된 각본과 달리 이소룡의 급소로 종종 엑스트라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를 어떻게든 이겨서 이름을 날려보고 싶은 풋내기들이 득시글했던 것이다. 물론 이소룡은 대부분 잘 피했지만 때론 강한 펀치를 맞고 힘들어하기도 했고 물론 그에 상응하는 보복도 확실히 해줬다.

삶이 무술이었고 무술이 삶이었던 그는 언제나 실전을 강조했다. 이소룡은 제자들에게 도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수련하도록 했다. 원래 도장에서 큰 수입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도복 판매. 항상 돈에 쪼들리던 이소룡이 과감히 이 수입원을 포기한 것은 실제 싸움은 청바지에 폴로셔츠를 입은 상태에서 걸거리에서 갑자기 일어날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이것은 UFC 같은 종합격투기 단체들이 철조망으로 만들어진 옥타곤 케이지에서 시합을 벌이는 것과 유사하다. 현실세계에선 로프로 사방이 막힌 링이란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몇번 주먹과 발길질을 섞다보면 벽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이소룡은 절권도로 명명된 자신의 무술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무술에 관한 자료는 물론 심리학, 생리학, 철학에 관한 책들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아마 이소룡이 살아 있었다면 종종 예능프로그램에서 절권도라며 배우 장혁이 선보이는 무술동작이 절권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일까, 그는 절권도라는 이름을 지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주먹을 자르고 들어간다는 절권이 자신의 무술세계를 한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망유희>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표정

자신의 도장에서 훈련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이소룡이 실전무술가였다면 영화 속 이소룡은 배우였다. 이는 산학협동과 유사하다. 연구실에서 배양된 원천기술을 활용해서 산업현장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이익을 창출하는 것. 이소룡은 이처럼 쿵후와 영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자신이 연구한 기술을 자신에게 스스로 적용했다. 이것은 프로레슬러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프로레슬러도 도장에서 각종 기술을 연마하고 링이라는 공간을 이용해서 관객에게 그것을 선보인다. 영화처럼 선과 악의 대결이 있고(난 외모적 특성상 주로 악역을 담당했다) 음모와 배신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점에선 주인공의 미친 듯한 복수가 관객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소룡에겐 견디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모순과 괴리가 있었다. 이소룡이 항상 이야기했던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빠른 반응속도와 직선공격으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촬영 현장에서 그렇게 했다간 카메라로 담을 것이 없다. 제작자들은 더 크고 더 화려한 기술을 원했다. 그의 TV시리즈 데뷔작인 <그린호넷> 오디션장에서 ‘날아차기’ 기술을 보여주며 ‘이런 기술은 실제로는 잘 쓰지 않습니다’라는 부연설명을 달았지만 결국 그는 드라마에서 이따금 천장에 매달린 전구를 점프해 차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프로레슬러처럼 완급조절을 잘했다. 관객은 프로레슬링이나 영화나 허구라는 것을 전제로 객석에 앉아 있다. 프로레슬러는 사방에 앉아 있는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거나 허를 찌르는 액션을 구사하면서 레슬러의 세계관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소룡은 이 부분에서 아주 탁월했다. 이소룡 이전에도 무협영화는 있었지만 피아노줄을 매단 채 하늘을 날아다니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단순했다. 상영시간도 길어서 지루함의 끝을 달리다가 막판에 봇물이 터지듯이 주인공의 복수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무문>을 보자. 이소룡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고뇌하고 괴로워하며 액션 신에서도 맞고 때리고 맞는 과감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몸싸움에 들어가기에 앞서 관객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에도 능수능란했다. 콧잔등을 살짝 손가락으로 튕기고 옷소매를 턴다. 또는 거만한 표정으로 검지를 편 채 메트로놈처럼 살짝 박자를 타면서 그 이후의 사태를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의 이런 몸동작은 아역 시절 익힌 것들인데, 중화풍 영화에 있을 법한 과장된 몸동작을 할리우드 무술영화에서도 잘 구현해내는 멋진 솜씨를 갖고 있었다. 그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헐크 호간도 ‘헐크업’이라는 일종의 무적 모드에 들어서면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메시지를 관객 앞에 내보이곤 했다. 그의 능수능란한 프로레슬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용쟁호투>에서 거울 방 결투 신. 촬영현장에서 즉석으로 제안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는 영화 사상 가장 밀도 높은 액션 신을 만들어냈다. 그의 표정과 손짓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 아니 그것 자체를 초월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사람이 아니었어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의 143쪽을 보면 권투 글러브를 낀 복서와 오픈핑거 글러브를 낀 이소룡의 대전 모습이 실려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이종격투기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진. 그런데 사진 설명에는 “권투 글러브를 끼고 훈련 중인 이소룡. 소룡은 무술형식이나 체계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항상 ‘전통’을 넘어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했다”라고 적혀 있다.

일반 권투 글러브와 오픈핑거 글러브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다. 그래서 다른 무술기술을 쓸 수밖에 없다. 농구와 배구의 차이처럼 다르다. 책의 원저자인 브루스 토머스가 몰랐던 것인지 번역자가 임의로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40여년 전 한 무술 배우의 훈련장면을 우린 이처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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