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해를 품은 달> <보고 싶다>로 여진구는 아역 배우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었다.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지도 않았고, 억지로 귀여움을 짜내지도 않았다. 여진구는 그저 연기에 빠진 소년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에선 더 큰 도전을 감행한다. 범죄자 집단에 의해 길러지는 소년 화이가 그가 맡은 몫. 여진구는 액션부터 감정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던 이번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소년을 믿음직스럽게 연기한다. 9월의 어느 일요일, 무시무시한 소년을 만났다.
1년 반 만에 다시 만난 여진구는 미세하게 변해 있었다. 키는 5cm쯤 더 자랐고, 목소리는 바리톤에서 베이스로 조금 더 깊어졌다. 니트 사이로 근육의 윤곽도 드러났다. 열심히 몸을 가꾼 결과인가 싶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라 따로 운동을 하진 않는다고 했다. 아역 배우라 부르기는 망설여지고 성인 배우라 칭하기엔 아직 어린 여진구는 올해 열일곱살이다.
<화이>의 화이도 딱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5명의 청부살인업자 아빠를 둔 화이는 학교에서 국•영•수를 배우는 대신 사격, 운전, 격투 같은 살인의 기술을 익히며 자란다. “신선했던 건, 그러한 환경에 처한 화이가 굉장히 순수하고 밝은 아이라는 점이었어요. 아빠들을 보고 자랐으면 나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장준환 감독님은 화이가 주변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 영향이 화이의 뿌리까지 침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악의 틈바구니에서 자란 화이라는 나무는 험한 비바람에도 쉽게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화이를 연기할 배우에겐 그래서 단단한 심지가 필수적이었다. 여진구는 드라마 <보고 싶다> 촬영에 임할 즈음 <화이>의 오디션을 봤다. 드라마 촬영과 겹쳐 “대본을 완벽하게 연구하지 못한 상태”였고 “살을 빼기 전이라 통통하던 때”였다. 두번째 오디션에서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건 그래서다. “첫 번째 오디션 때 감독님께 말씀드렸어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시나리오 연구를 깊이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어, 그런 것 같았어’ 하시더라고요. (웃음)” 결국 장준환 감독은 기교 부리지 않고 캐릭터의 본질에 가닿으려 노력한 여진구를 화이로 낙점한다.
“화이를 어떤 아이라고 단정짓고 촬영에 들어가진 않았어요.” 화이는 쉽게 손에 잡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게다가 화이는 늘 복잡한 감정을 짊어지고 사는 아이였다. 단적으로, 5명의 아빠들에 의해 길러진 사연, 즉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 화이는 놀라움과 배신감과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어느 감정 하나라도 놓치면 아쉬운 상황이 돼버리니까, 그 감정을 전부 가지고 가야 했어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건 “화이가 그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화이는 ‘괴물’이 된다. 그리고 그 괴물은 종국에 5명의 아빠들에게 총을 겨눈다. <화이>의 클라이맥스는, 화이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동시에 화이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주는 존재인 석태(김윤석)와 화이의 대결로 장식된다. “진실을 알게 된 화이는 변해요. 그런데 전혀 딴사람처럼 변해서는 안됐어요. 감독님은 자칫 화이가 석태처럼 보일까봐 불안하셨던 것 같아요. 석태를 통해 악(惡)을 드러내려 하셨지, 화이를 통해 악을 드러내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화이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선도 악도 아닌, 그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년인 것 같아요.” 선악의 경계에 발딛고 선 화이를 연기하는 건 여진구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하지만 화이가 주춤주춤 망설이면서도 기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듯, 여진구 역시 <화이>를 통해 쉽지 않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한편 <화이>는 여진구에게 5명의 귀한 아빠를 선물했다. 첫인상은 무섭지만 알고보면 자상한 다섯 아빠들 사이에서 여진구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선배님 대신 ‘아빠’라는 호칭으로 선배 배우들의 마음을 녹인 게 주효했다. 물론 그것은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요령이 아니었다. 화이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여진구는 영리한 배우지만 요령 같은 건 부릴 줄 모른다. 삶에서도, 연기에서도 중요한 건 “진심”이라고 말한다. “유명해지는 거요? 별로 관심없어요.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진심으로 연기하는 배우구나, 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전 그런 배우들이 멋있더라고요.”
차기작은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 <감자별 2013QR3>이다. 김병욱 감독의 팬이었고, 시트콤 장르에 대한 애정이 컸기에 망설임 없이 선택한 작품이다. “한국의 마크 저커버그를 꿈꾸는 홍혜성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진지하면서도 재미난 아이예요. <화이>를 보고 시트콤을 보면 혼란스러울지도 몰라요. 그만큼 달라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지금처럼만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여진구. 그의 시간을 빨리감기하고 싶은 건 괜한 욕심이었다. 그는 충분히 조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