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베스트셀러는 빨리 낡는다. 예컨대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2000년, 그러니까 아직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돈이 돈을 낳는다고 모두가 순진하게 믿던 시절에 출간되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요사키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하와이주의 교육감을 지냈지만 평생 빚에 쪼들렸다. 반면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자기 사업을 일으켜 엄청난 부를 일군 친구의 아버지를 기요사키는 ‘부자 아버지’라 부른다. 이 부자 아버지에게서 돈과 금융에 대해 배웠고 그게 지금의 자기를 만들었다고 기요사키는 주장한다. 올바르고 정의롭게 살았지만 돈 문제에 무능했던 ‘가난한 아버지’ 대신에 기요사키는 ‘부자 아버지’를 정신적 아버지로 선택한다. 유용성에 따라 부모를 바꿀 수 있다는 발상! 자기계발서라는 안전한 틀에 담겨진 이 윤리적 도발은 제대로 먹혔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책을 팔아 ‘부자 아빠’가 되었다. 반면 기요사키의 가르침을 따랐던 독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무렵에 정점을 찍은 세계 경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기울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기요사키는 금융과 부동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웬만하면 자기 사업을 하라고 독자들을 독려했는데 2000년대 초반에 그 조언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의 책꽂이에는 아마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벌써 치워지고 없을 것이다. 금융, 부동산, 창업, 그 어떤 것도 2007년 이후에는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시 ‘가난한 아빠’의 시대가 돌아온 것일까? 정의롭고 윤리적이지만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를 보자. 주인공 이자성(이정재)은 골드문 그룹이라는 폭력 조직에 침투한 경찰 프락치다. 그런데 이자성에게는 정신적 아버지가 둘 있다. 하나는 신참 경찰관이었던 그를 발탁해 중책을 맡긴 강 과장(최민식)이고 또 하나는 골드문의 중간 보스 정청(황정민)이다. 강 과장은 전형적인 ‘가난한 아빠’로 보인다. 다 허물어져가는 실내낚시터에서 접선하거나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일단 가난하다. 출세도 못했다. 만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한데 이제 겨우 과장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식들 위에 군림하고 당당히 희생을 요구한다. 경찰학교 시절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여경은 이자성과의 연락책으로 투입되었다가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 위험을 직감하고 강 과장에게 전화를 건 여경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담배 좀 끊으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죽자 그는 정말로 담배를 끊는다. 가족간에나 오갈 이런 대화가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자연스럽다. 조직이 확보한 졸업사진 속에서 강 과장과 여경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 사이처럼 보인다.
이자성은 영화 내내 가난한 아버지의 명령에 저항한다. 너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하게 해달라고 말한다. 강 과장은 거절한다. “달라진 건 없어.” 그는 이 말만 되뇐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이자성은 정의롭고 무능한 ‘가난한 아빠’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자기를 위험으로 밀어넣는 냉정한 면모에 치를 떤다.
반면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은 전형적인 ‘부자 아빠’다. 그는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업가로 위장하고 있지만 뼛속까지 악인이다. 짝퉁 선글라스를 걸친 그는 이자성과 격의없이 지내면서 그를 자기 조직의 2인자로 키워 측근으로 삼았다. 영화 속에서 정청은 이자성에게 그 어떤 위험한 일도 시키지 않는 것으로 ‘가난한 아빠’ 강 과장과 대비된다. 경찰은 별 대의명분도 없이 목숨을 걸라고 하는 반면 폭력조직에서는 근사한 양복 빼입고 농담 따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최고급 아파트에 살며 하급 경찰로서는 꿈도 못 꿀 부와 지위를 다 누린다.
영화 속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는 모두 죽는다. 그런데 죽는 방식이 다르다. ‘부자 아빠’ 정청은 강 과장의 사주에 의해서 죽지만 ‘가난한 아빠’ 강 과장은 이자성이 직접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정청은 산소호흡기를 다시 씌워주려는 이자성에게 날 살리려 하지 마라, 내가 살아나면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 말하며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리고 충고까지 해준다. 독해지라고. 그래야 네가 산다고.
영화 내내 유약하고 불안정해 보이기만 하던 이자성은 한 아버지가 죽고, 다른 아버지 하나를 죽인 뒤에야 비로소 여유롭게 웃으며 ‘부자 아빠’가 앉기로 되어 있었던 자리, 즉 아버지의 자리에 앉는다. 그가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은 ‘가난한 아빠’를 살해했기 때문이고 ‘동시에 부자 아빠’가 그를 살려줬기 때문이다(정청은 이자성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도와주기까지 한다. 이것은 분명 비현실적이다. 영화의 서사 안에서 이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았기에 극중 변호사의 입을 빌려 감독은 그 자신에게 묻고 있다. “왜 이자성을 처리하지 않으십니까?”
혹시 정청은 이자성을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게 아닐까. 왜냐하면 ‘부자 아빠’ 정청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오래전에 ‘가난한 아빠’를 버렸다. 그런데 믿었던 ‘부자 아빠’는 대중을 부자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골드만삭스나 J. P. 모건으로 대표되는 이 ‘부자 아빠’들이 고급 사기꾼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중은 돈과 집, 직업을 잃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부자 아빠’들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부자 아빠’를 선택한 대중의 무의식은 아직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따라서 정청의 죽음은 다소 연극적이고 신화적으로 채색될 수밖에 없다. 그는 마치 왕위를 물려주는 늙은 왕처럼 이자성에게, 어서 나가 적들을 물리치고 왕관을 차지하라는 식의 유언을 남긴다.
‘가난한 아빠’를 버리고 ‘부자 아빠’에게로 귀순했던 대중은 과연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신세계>는 대중의 무의식이 그 뼈아픈 후회를 어떻게 외면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보여준다. 그것은 ‘가난한 아빠’가 (무능할 뿐 아니라) 더 악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아빠’와 ‘부자 아빠’가 모두 사라진 2013년 세계에 남은 것은 오직 생존의 윤리뿐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컨대 강 과장은 이렇다 할 분명한 윤리적 목표(예컨대 악의 세력을 일망타진한다라든가)도 없이 오직 희생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악인처럼 보인다. 반면 정청은 이자성에게 생존의 방식과 신념을 가르쳐주고 몰락한다는 점에서 일견 선량해 보인다.
영화의 중심 서사가 사실상 모두 종결된 뒤에 영화는 마치 사족처럼 6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이자성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 살육을 저지르고 난 뒤 밝은 태양 아래에서 너무나 환하게 활짝 웃는 장면은 난데없이 섬뜩하다(이 장면에서 살육을 주도하는 것은 정청이 아니라 오히려 이자성이다). 그 웃음이 이 영화를 이자성의 시점에서 다시 보게 만든다. 영화 내내 희생자처럼 보였던 그가 이 모든 일의 주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모든 일을 이미 저지르고도 시침 뚝 떼고 있는 대중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웃음은 조용히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