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이 탄생한 곳은 한적한 서촌의 작은 건물. 동네 분위기에 딱 맞게 주피터필름 사무실 입구에도 소담한 화분들이 즐비하다. 바깥 풍경이 이처럼 여유가 흐른다고 해서 주필호 대표의 지난 몇년이 한가로운 나날이었을 것이라고 넘겨짚어선 안된다. 2008년 창립작 <아내가 결혼했다>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주필호 대표는 신인 감독들과 신진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 개발을 거듭하느라 숨 돌릴 틈 없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천만 관객을 눈앞에 둔 <관상>은 그런 점에서 주피터필름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주피터필름의 새로운 시작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앙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영화 마케팅 회사 ‘영화방’을 거쳐 제작자로 나서기까지, 정말 영화밖에 모르고 산 남자 주필호의 요즘, 아니 ‘다음’이 궁금했다.
-1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개인적으로 700만명 정도 들면 진짜 좋겠다 생각했다. 제작사 등록한 지 10년째인데, 그동안 개발 단계에서 실패한 작품들이 많았다. 700만명만 들면 원작 구매나 시나리오 개발을 하면서 쌓인 빚들 정리하고 편해지겠다, 다음 작품은 돈 걱정 없이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 더 큰 욕심은 과욕이다. 정말 감사드린다.
-이 영화가 시장에서 ‘터진’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리서치 기관 반응을 보니 좋더라. 소재가 독특하고 이야기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멀티캐스팅도 주효했다. 편집본 보고 안되어도 500만명은 들겠다 싶었다. 러닝타임이 길긴 한데, 다행히 그 부분도 받아들여졌다.
-‘사극판 <도둑들>’이란 말까지 나왔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성사된 캐스팅이다. 특히 이정재씨에게 고맙다. 정재씨가 캐스팅된 무렵 제작비가 동결 상태였는데 음악 비용 5천만원이 모자랐다. 그때 정재씨가 양보해줬다. 개런티는 어떻게 보자면 배우의 자존심이라 늘 미안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정말 행복하다.
-이정재 캐스팅은 신의 한수였다.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는 점도 주효했다. 추석 개봉 대진운도 좋았다. 결과적으로 ‘추석영화’의 퀄리티를 높였다는 반응까지 끌어냈다.
=최근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영화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더 테러 라이브>였다. 영화를 무척 잘 만들었더라. 하정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연출자가 협소한 공간에서 스펙터클과 속도감을 놓치지 않고 블록버스터의 장점을 모두 활용하더라. (제작자인)이춘연 사장님께, “부럽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젊은 영화를 만드셨습니까!” 했다. 마찬가지로 <숨바꼭질>도 그런 재기가 돋보였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세대가 탄생한 것 같다.
-<관상>은 어떻게 기획한 작품인가.
=그게 <씨네21>과 관계있다. 원래 씨네월드와 충무로 영한빌딩에서 12년을 지냈는데 정승혜 대표님(씨네월드) 돌아가시고 씨네월드는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는데 하루는 문석 편집장(전 <씨네21> 편집장)이 찾아와 이 빌딩에서 1천만 영화(<왕의 남자>)가 나왔으니 잘되려면 빨리 이사 가라고 하더라. 1천만 영화 한편 나왔으니 기운이 다했다는 거다.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당시 <명당>이라는 작품을 개발하면서 풍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말도 일리가 있더라. (웃음) 그런 게 정말 있겠냐마는 투자계약까지 하고도 엎어지는 작품들이 생기고 일이 안 풀리니 이 생각 저 생각 다 든 거지.
-그래서 이사 간 건가.
=갔다. (웃음) 강남은 비싸서 못 가고 기운 좋은 곳 골라서 북촌 한옥집으로 이사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당선작인 <관상>도 거기서 만났다. 이 시나리오가 정말 놀라운 게, 시나리오 하나만 가지고 배급사인 쇼박스와 개발 투자가 아니라, 본 투자 계약을 했다. 이런 경우는 없을 거다. 투자사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으면 그랬겠나. 쇼박스 투자팀의 정현주 차장이 <관상>의 숨은 공로자다. 한재림 감독과는 5∼6년 전에 작업을 함께했고(그 작품은 엎어졌다), 그 인연으로 같이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무실이 서촌이다. 북촌은 왜 떠났나.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낙엽을 쓸어내는 게 일이었는데, 바람이 복과 돈을 대문 밖으로 내몬다고 어느 스님이 그러더라. 알아보니 근처에 명필름이 있었다. 명필름은 이곳으로 와서 흥행작만 4∼5편을 냈다. 당연히 재능과 실력으로 좋은 영화를 풀어냈겠지만, 못난 놈 마음에 좋은 기운이 좀 받쳐주지 않을까 해서 명필름 근처로 왔다. (웃음)
-명필름의 이은, 심재명 대표도 이 사실을 아나.
=지금 밝히는 건데, 아무도 모른다. 며칠 전 부산에서 이은 대표를 만났는데 “너 우리 기운 받으려고 온 거지” 하시더라. (웃음) 지내보니 서촌의 평온한 기운이 무척 잘 맞는 것 같다. 낮에 어르신들이 동네에 앉아 계시니 마음이 편하다. 빌딩 숲에서 일하는 것과는 기분이 전혀 다르다. 주말마다 등산을 가는데 인왕산이 뒤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주피터필름의 차기작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건 <관상>에 이은 ‘역학 3부작’이다.
=<명당>은 이미 4∼5년 동안 개발했고 <관상>의 김동혁 작가가 쓰고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팩션으로, 더 좋은 묏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과 신하가 맞붙는 이야기다. 들어가는 건 <궁합>이 먼저일 것 같다. 조선판 로맨틱코미디를 생각하고 있다. 남녀의 속궁합이 소재라서 아무래도 19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신인 김지현 작가가 참여한다.
-모두 사극인데 제작자로서 효과적인 운용방식에 대한 고민이 크겠다.
=<관상> 순제작비가 64억원이었고, 두 작품 모두 60억원 내외에서 진행하려고 한다. 손익제작분기점(BP)을 낮추는 방법을 제일 많이 고민한다. 그래야 투자사나 창투사들이 리스크 없이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거고.
-<관상>은 지난해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확인한 사극에 대한 수요를 이어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시장에서 사극이 통용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참신한 소재 덕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즐겨 보는데, 새로운 소재의 보고다. 현대 상황과 역사 속 사건을 잘 섞으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이 사극을 좋아한다. TV드라마도 사극은 일정 시청률을 확보하고 간다. 물론 영화로 만들 때는 새로운 지점이 있어야 한다. 제작자로서 그걸 찾아나서는 게 숙제다. 매일 그 작업을 하고 있다.
-창립작인 <아내가 결혼했다>가 2008년이니 화제작은 5년 만이다. 지난해 제작한 <두개의 달>은 성과가 미미했던 편이고.
=힘들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난 고생도 많이 안 했다. 워낙 원작을 많이 사서 빚도 많았는데, 그동안 어머니가 최고의 후견인이 되어주셨다. 올해 4월에 돌아가셨는데, <관상> 개봉을 못 보신 게 마음에 걸린다. 마지막까지 내 영화 잘되어야 한다고 걱정해주셨다. 영화일이 원래 허공에 집짓는 일이다. 투자사가 선택 안 해주면 끝난다. 내 인생의 경구가 ‘영화는 기다림의 예술이다’라는 트뤼포의 말인데, 어쨌든 난 영화가 업이기 때문에 이걸로 자아실현도 하고 돈도 벌고 싶다. 워낙 긍정적인 편이라 어렵더라도 견디면 꼭 기회가 온다고 믿는다. 이젠 좀 많이, 1년에 한편씩은 제작하고 싶다.
-지금 추세라면 1년에 한편은 문제없어 보인다.
=<장례식의 멤버>를 연출한 백승빈 감독과 <이빨괴물전>이라는 작품을, <10분간 휴식>(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5년 만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을 연출한 이성태 감독과 <야간탈옥>이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다. <밍크코트>의 신아가, 이상철 감독과 <록키 용덕>도 준비 중이고. 재능 있는 신인 감독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싶다. 제작자로서 내가 할 일 아닌가 싶더라.
-<겨울나그네> 리메이크 소식도 들리는데 얼마나 진행했나.
=원작을 산 지는 꽤 됐는데,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몇번 실패했다. 고(故) 곽지균 감독의 작품이 1986년작이니 27년 뒤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여유를 가지고 작업하려고 한다. 좋은 시나리오가 투자를 받고, 좋은 감독을 만나고, 좋은 캐스팅을 부른다. 단연코 시나리오가 영화의 힘이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각이 안 잡혔으니 아직은 들어갈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최인호 작가님 영전에서 ‘꼭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왔다.
-작품이 너무 많다. 모두 진행 중인데 <관상>의 차기작은 무엇인가.
=정유정 작가의 작품 <내 심장을 쏴라>다. 백승빈 감독이 콘티 준비 중이고 한달 내에 캐스팅이 완결될 것 같다. 정유정 작가 작품을 워낙 좋아해서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도 원작을 사두었는데 기획/개발 단계에서 실패해서 판권을 반납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들고 싶다.
-원작을 많이 사두는 편인데, 원작이 있는 <아내가 결혼했다>의 흥행이 준 영향인가.
=맞다. 그런데 소설과 시나리오는 문법이 달라서, 각색 과정에서 실패가 많았다. 소위 제작 명가로 꼽히는 명필름이나 비단길 같은 경우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승부를 본다.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생각을 바꿨다.
-주피터필름은 2000년에 설립했다. 그전에는 영화 홍보사 ‘영화방’을 운영했었는데, 영화방을 할 때부터 제작에 대한 뜻이 컸다고 들었다. 주피터필름의 정체성을 정의한다면.
=‘꼴랑’ 세 작품 했으니 아직 색깔이 있다고 할 순 없다. 오히려 색깔이 없었으면 싶다. 지금 관객이 요구하는 트렌드를 빨리 읽을 줄 아는 제작사가 되고 싶다. <아내가 결혼했다>도 새로운 소재의 멜로라는 관점으로 접근했고, <두개의 달>도 공포영화 제작이 주춤하니 저예산으로 타개해보자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관상>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측면이 컸고. 물론 세 작품 모두 제작자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보완책을 모색하고 있다. <관상>은 영화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아 TV드라마로 기획 중인데 준비한 지 2년 정도 됐고, 출판도 병행했다. 드라마는 영화에 빠진 내경과 한명회의 인연을 풀어내는데, 한명회의 분량을 늘릴 예정이니 분위기가 또 다를 거다. <아내가 결혼했다>도 작가와 재계약을 해서 TV드라마와 뮤지컬로 만들 생각이다.
-<두개의 달>은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고스트픽처스와 공동제작했다. 주피터필름과는 어떤 관계인가.
=고스트픽처스의 대표인 이종호 감독과는 원작을 구입하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뜻이 맞아 지분을 나눠 같이 회사를 설립했다. 공포영화 작가 20명이 함께해서 공포영화, 드라마 등을 저예산으로 제작하는 구조로 가려했다. 아직 성공모델은 못 만든 셈인데, 내년 여름을 목표로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소녀무덤>이라는 작품을 <여고괴담>의 박기형 감독과 준비 중이다. <두개의 달>이 5억원 예산이었고, 지금은 9억원 정도 규모로 만들 생각이다.
-주피터필름의 작명은 어떻게 한 건가.
=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는데, 한때는 신부가 되려고 1년 정도 수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내가 주씨고 세례명이 피터(베드로)라 영화사 이름을 주피터필름으로 지었다. 주피터 조명기도 있고, 주피터 신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고, 목성이란 뜻도 있고, 다양한 의미가 있어서 마음에 들더라.
-<관상>의 수익금 50%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해 화제다. 스코어가 올라갈수록 기부금도 높아지는데, 소식 듣고 우스갯소리로 ‘영화 이렇게 잘될 줄 모르고 기부한다고 한 거 아닌가’라는 말도 했다.
=인생을 살면서 영화밖에 한 게 없다. 영화가 직업이고 취미고 생활이다. 하루라도 영화를 안 보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 기분 안 좋을 때도 보고 기분 좋을 때도 본다. 직업병 같은 거다. 기부는 사회적 자아 실현의 일환이다. 제작사를 차리면서 생각했던 건데, 그땐 아내(아내 방미정씨는 주피터필름의 기획이사로 함께 일한다)도 만류하더라. 영화도 제대로 못하면서 기부한다고 하면 오히려 이슈 만들기처럼 보일 거라고. <두개의 달> 때는 하려고 해도 수익이 없어서 못했고, 이번에는 벼르고 별렀다. 50%부터 시작이다. 좀 벌었으면 반은 비우자, 평상심을 유지하자는 거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가 ‘상식과 균형’이다. 그걸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결국 나를 위한 힐링 차원에서 하는 거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남들도 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사는 게 평정심을 유지하는 길이고 그래서 좋은 영화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