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닥터>가 4회쯤 나가고 나서 한때 연대했던 친구들로부터 욕이 담긴 문자를 받았다. ‘킬링 드라마 해야 되는 애가 왜 힐링 드라마를 하고 있냐’고. (웃음)” OCN의 첫 장르 시리즈물이었던 <신의 퀴즈>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뒤, 첫 공중파 작품 <굿닥터>로 명실상부 장르 드라마 인기작가로 거듭난 박재범 작가의 말이다. 의학 범죄 수사물, 의학 휴먼 드라마, 연이어 ‘의드’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그는 “실은 <이블 데드>를 ‘삐자’ 비디오로 보고 자란 호러 마니아”다. <굿닥터>의 종영 2주 뒤,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그를 만나 어떻게 그의 무서운 상상력에서 이토록 착한 드라마가 나왔는지 물었다.
-원제는 <그린 메스>였다고.
=특정 캐릭터의 소품보다 모든 의사들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을 찾았다. 결국 <굿닥터>가 됐는데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다. (웃음) 회의하다가 <하얀 닥터> <나는 의사다> 별 게 다 나왔었다니까.
-전작도 의학 드라마다. 이 장르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계기라면.
=<신의 퀴즈> 때부터 계속 하다 보니 메타포를 담기 좋은 재료가 많더라. 사람 치료에서 좀더 들어가면 사연들이 나오고 좀더 들어가면 삶과 죽음이 있고. 양파처럼 까도 까도 계속 뭔가 나오는 소재다.
-여러 분과 중 소아외과를 선택한 게 참신했다.
=소통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에도 좋았다. ‘외과’면 수술이 1번, 소통은 2번인 줄 아는데, 실은 외과도 소통이 우선이다. 또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시온이가 어른이자 아이고 의사이자 환자잖나. 그렇게 배치하니 인물들의 상호관계도 재밌어지더라.
-정신과 소재도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봤다.
=재밌는 케이스들은 많은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이입도가 떨어지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 매번 시도만 하다 관두게 된다.
-케이스 취재력이 독보적인 것 같다. 혹시 관련 분야 전공인가.
=전혀. 영어를 정말 못하는, 학사경고 2번 받은 영문학과 학생이었다. (웃음) 취재는, 부위별로 무조건 다 쓸어담았다. 오늘은 브레인 희귀병, 내일은 근육 희귀병, 이런 식으로. 근데 100개 취재하면 드라마에 쓸 만한 건 15개 정도다. 신체변형이 너무 심한 것이나 서사적으로 풀기 어려운 것은 못 쓰니까.
-병과 서사를 어떻게 조율했나.
=병만 보고 스토리를 만들면 나중에 스토리를 풀어나가다 어그러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스토리의 구조를 다 짜놓은 다음에 거기에 맞는 병을 가져온다. 그렇게 해도 도저히 안 맞을 때가 있다. 그때는 자문해준 교수님들을 조른다. 맞게 해달라고.
-제일 아귀를 맞추기 힘들었던 에피소드라면.
=성악 하는 아이가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이상와 누공’이란 병을 다뤘다. 젠가처럼 이걸 빼면 저게 무너지고 저걸 빼면 이게 무너지더라.
-완성된 드라마를 보며 가장 만족한 장면은.
=아무래도 마지막화에서 이 드라마의 주제인 소통이 완료된 순간들이다. 이게 장르는 휴먼드라마인데 작법은 범죄수사물에 가깝게 썼거든. 앞에 성장의 단서를 다 깔아놓고 마지막에 퍼즐이 완성되는 걸 지켜보는 만족감이 컸다.
-<신의 퀴즈>에서 이번에도 에피소드마다 자기 완결적 케이스를 배분하고, 전체적으로는 캐릭터의 성장담을 이어가는 구성이 <하우스> 같은 미드를 연상시킨다.
=영향을 많이 받았지. 근데 1회당 1개의 케이스가 딱 떨어지는 미드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올 순 없다. <신의 퀴즈>는 그렇게 했는데, 공중파에서는 힘들다. 한국 시청자는 연속극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굿닥터>는 2~4부 단위로 나눴고, 시온이란 캐릭터의 성장담으로 연속성을 줬다.
-캐릭터 플레이가 드라마의 돌파구라 보나.
=장르적 캐릭터들이 돌파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영화에서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닌데, TV에서는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가 패턴화되면서 봉인돼왔던 것뿐이다. 최근 드라마에서도 장르물이 늘어나 봉인이 풀어지면서 캐릭터들이 다양해지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 같은 수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장르적 작법과 시청자에게 친숙한 작법을 잘 융화시킨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다.
-데뷔는 <드라마시티> 단막극 ‘S대 법학과 미달 사건’으로 한 뒤 <신의 퀴즈>까지 긴 공백기가 있었는데.
=내 연출 데뷔작이 있다. <씨어터>라고, 스플래터 호러 영화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도 갔고 <씨네21>에도 실렸다. 2000년 무렵 잡지에 <공동경비구역 JSA> 기사 뒤에 있을 거다.
-왜 영화를 계속하지 않았나.
=많이 ‘엎어’졌다. 그사이에 아내와 아이들도 생겼고.
-원고 쓸 때 특별한 습관이 있나.
=찜질방에 가서 교정을 본다. 모래시계 두번 돌 동안 이 시퀀스는 무조건 끝낸다는 심정으로 보는 거다. 능률 높고 쾌적하고 돈도 많이 안 든다.
-마감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보통 자거나 휴식을 취한다는데 나는 다음 아이템을 생각한다.
-비슷한 드라마를 생각하나, 전혀 반대의 드라마를 떠올리나.
=전혀 반대. 실제 성격은 좋은 편인데, 작품 면에서는 조울증이 있다. <굿닥터>는 인간의 밝은 면만 보고 쓴 거다. 이러면 다음에는 지독한 악인을 쓰게 되더라.
-차기작이 뭔가.
=우선 <신의 퀴즈> 시즌4를 런칭시켜야 한다. 이번에는 여러 명이 쓴다. 좋은 작가들을 양성할 기회가 될 거다. 그 다음 작품도 정해져 있는데 밝히긴 어렵다. 의학물은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