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김선아] 로코 여왕의 변신
2013-11-12
글 : 주성철
사진 : 최성열
김선아

<더 파이브>에서 은아(김선아)는 연쇄살인마 재욱(온주완)과 싸운다. 그 악마 같은 살인마에게 처참히 짓밟힌 채 눈앞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이 살해되는 과정을 목격한 은아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복수를 완성하고 싶어 한다. 눈빛과 표정, 그 모두는 우리가 익히 알아온 김선아의 그것이 아니다. <걸스카우트>(2008)와 <투혼>(2011) 이후 모처럼의 영화 출연이기도 하거니와, TV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 등 한때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여왕이었던 김선아로서는 그야말로 일대 변신이다. 영화 속에서 그저 평범한 아줌마였던 은아가 끔찍한 사건을 겪으며 변해가는 모습 또한 그렇다. 원작이기도 한 인기 웹툰 <더 파이브>의 은아와 싱크로율 100%를 이룬다는 목표에 도전했던 김선아와 만났다. 웹툰의 질감과는 전혀 다른 실제 영화현장의 촉감이 여전히 생생하다는 그녀는, 아직도 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지금껏 연기했던 수많은 캐릭터들과 비교해 가장 감정적 소모가 컸다는 얘기와 함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 <더 파이브>에서 김선아가 연기하는 ‘은아’는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고, 자신마저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복수를 완성해줄 4명을 모은다. 내 몸뚱이가 어떻게 되건 머릿속에는 온통 복수뿐이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지워진 그 2년의 시간 동안 은아의 내면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담배 피우는 남편에게 잔소리하고, 철없는 딸을 배웅하던 사람 좋은 ‘아줌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말 그대로 ‘썩은’ 표정으로 세상의 뒤편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범인을 잡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는다. 범인이 가져간 지포라이터를 매개로 인터넷 장터를 헤매는 것. 비록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신세지만 컴퓨터는 자유자재다. 그때 그 ‘놈’이 가져간 라이터의 행방만 알 수 있다면 복수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그리고 ‘아빠금연’이라 쓰여 있던 그 라이터의 소유자가 뜬다.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비록 대화방을 말없이 나가버렸지만, 치밀하게 IP 추적 장비까지 준비하고 그 날만을 기다려왔다. 원래 도미노 쓰러트리기 기술의 달인이었던 만큼 끈기 있게 차곡차곡 계획을 설계해나가는 ‘본능’만큼은 여전하다. 그렇게 은아는 놈을 향해 한 발걸음씩 천천히 다가간다.

<더 파이브>는 흥미롭게도 원작자가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닌, 직접 메가폰까지 잡은 영화다. 사실 정연식 감독은 영화감독을 꿈꾸던 만화작가였다. 그러니까 <더 파이브>는 맨 처음 시나리오로 완성됐고, 그다음 웹툰으로 연재됐다. 그만큼 정연식 감독은 원작과 영화를 오가는 그 모든 디테일을 어루만진 주인공이다. 아무래도 김선아는 그런 감독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아의 감정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은아는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여자라 할 수도 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 자신과 타인의 희생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할 마음이 있는 여자다. 그런 은아를 두고 김선아는 “아파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상처를 입고 큰일을 겪게 되면 대부분 방어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은아의 상처는 그 이상이다. 방어를 넘어서 이기적으로 변한다.”

김선아가 <더 파이브>에 매료된 것은 바로 이 인간 본성의 이기적인 이면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도와주면 자신의 장기를 주겠다는 무모한 약속을 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살인마의 추악한 실체와 맞물린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이 결코 이기적인 게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더 파이브>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은 철민(정인기)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한 의사지만 그 역시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은아의 계획에 동참한다. 나중에 다른 구성원들은 은아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하는데, 오직 그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아의 장기를 탐낸다. 나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도 정인기 선배를 향해 ‘역시 제일 사람이야!’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다. (웃음)”

하지만 은아를 향한 이해와 별개로 <더 파이브>는 김선아의 가장 힘든 작업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분명 연기이긴 하지만, 살인마가 집에 들이닥쳐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은아는 살려고 발버둥치던 딸이 살인마에게 난도질당하는 광경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야구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아 바닥에 고꾸라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인마가 야구 방망이로 내 허리를 내려치던 그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당연히 가짜로 연기한 것뿐인데도, 한동안 그 소리와 촉감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내 옆을 지나갈 때 신발로 액자를 빠지직 밟고 지나던 그 소리도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더 파이브>는 계속 내 감각과의 싸움이었다.” 실제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생각 이상으로 괴로운 경험이었다. “하반신 마비인 상태로 연기한다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그저 가상의 제약일 뿐인데 계속 나를 옥죄는 느낌이었다. 같은 일을 실제로 겪었다고 해도 나는 도저히 은아처럼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은아를 처음부터 반쯤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 몰입했다.”

말하자면 <더 파이브>는 ‘한국의 브리짓 존스’라 불리며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김선아에겐 그야말로 생소한 경험이었다. 영화 데뷔작 <예스터데이>(2002)에서 액션연기를 펼쳤던 기억 정도를 빼면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없다. “TV드라마 <여인의 향기>(2011)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자로 나온 적 있는데, 그때도 잠시 탈진했던 것 정도를 빼면 딱히 힘들다고 할 만한 촬영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파이브>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다 힘들었다. 물론 그럴수록 캐릭터가 더 살아나는 것이지만.” 돌이켜보니 우리는 늘 그녀의 밝은 면만 봤던 것 같다. 그렇게 <더 파이브>는 ‘변신’이나 ‘도전’ 이상으로 배우 김선아에게 보다 특별히 각인된 영화다. “모든 ‘기억’이 다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 중에서 특별히 고른 것들이 추억이라면, <더 파이브>는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별개로(웃음) 최근 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추억이 많은 영화다.” 애초에 ‘악당이나 사이코를 연기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녀를 <더 파이브>로 이끌었다면, 물론 이 영화에서 제대로 된 악당도 사이코도 아니지만 충분히 그녀의 다른 면을 보여준 것 같다. 김선아의 그다음이 기대되는 이유다.

magic hour

“목 좀 더 비틀어주세요”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이처럼 괴로울지는 몰랐다. 살인마가 집에 쳐들어오고 딸(김현수)이 죽는 광경을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딸의 눈과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연기 도중에 갑자기 “가영이(죽은 딸) 목 좀 더 비틀어주세요” 하는 감독님의 무전기 소리가 들리는 거다. 그때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목을 좀 더 비틀라고 하는 무미건조하고 낮은 목소리가 순간 너무 소름끼쳤다. 스스로 감당이 안돼서 눈물에 분장도 다 지워졌고, 그런 나를 보던 코디네이터나 일부 스탭들도 울기 시작해서 잠시 촬영이 중단됐다. 그 뒤로도 감정 조절이 안된 나 때문에 계속 NG가 나서 ‘죄송합니다’ 하는 인사를 수십번 정도 한 것 같다. 나는 배우로서 ‘언제나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무조건 영화 속 그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날만큼은 내내 딴생각을 하며 그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지금껏 촬영하는 동안 카메라 앞에서 딴생각 해본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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