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가 되기란 어렵지만 좋은 시나리오인데도 나쁜 영화가 되기란 쉬운 일이라는, 영화계에서는 얼마간 통용되는 이러한 격언은 시나리오가 결코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 무용론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나리오가 영화 완성의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공정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그 잠정적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루이스 브뉘엘 만년의 중요한 영화들을 함께했으며 그 자신이 대단한 학식과 재담을 갖춘 사람이기도 한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그가 막 입문했을 당시 위대한 감독 자크 타티와 그의 편집기사에게서 배운 촌철살인의 교훈 한 가지를 끝내 잊지 못한다고 전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영화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질문하는 타티에게 카리에르가 영화에 대한 추상적인 열정과 사랑만을 열거하자 타티는 편집기사를 시켜 카리에르를 편집실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집실에서 편집기사가 한손은 시나리오가 적힌 종이를, 또 한손은 필름 릴을 가리키며 마침내 카리에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국 문제는 여기에서 여기로 가는 거예요.” 결국 문제는 종이에서 필름으로 가는 것이다. 이 말이 평생 시나리오를 쓰며 자신이 새긴 교훈이라고 <영화, 그 비밀의 언어>에서 카리에르는 회고하고 있다.
몇몇의 특별한 영화감독들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영화계의 철칙이며 일반적이기까지 한 이 과정이 갑작스럽게 우리의 관심사가 된 건 위대한 소설가 코맥 매카시가 돌연 <카운슬러>라는 한편의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매카시는 1976년에 <정원사의 아들>이라는 텔레비전용 영화의 시나리오를 요청받아 쓴 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극장용 영화 시나리오 <카운슬러>가 그의 첫 번째 시나리오로 꼽힌다). 심지어 매카시는 영화계의 그 어떤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이것을 쓴 모양이다. 그의 차기작으로 당연히 소설을 기다리고 있던 에이전트조차 시나리오의 형태를 받아들고 당황했다고 한다. 그가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크게 궁금하진 않다. 하지만 매카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을 리들리 스콧이라는 장인이 연출했을 때 어떤 영화가 될 것인지 기대하는 건 제법 흥분되는 일이었다. 매카시의 여기에서 스콧의 여기로 가는 문제는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소 뒤늦게 <카운슬러>를 보고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움을 접하게 됐다. 이 영화는 한편의 완성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글로 치면 초안, 영화로 치면 러프 컷에 해당한다는 인상을 내내 주었다. 그 정도로 거칠고 산만한 실패작이다. 물론 긍정적으로 추리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가령, <카운슬러>는 주의를 기울여 사건의 구체적 사실관계를 은폐한다. 사건에 연루된 카운슬러(마이클 파스빈더가 연기하는 주인공 변호사는 영화에서 이름 없이 그저 카운슬러라고 불린다), 클럽 주인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라이너의 마성의 애인 말키나(카메론 디아즈), 마약 중개상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까지 그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일에 어떻게 가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행동하거나 언급하기를 꺼리며 아주 일부만 보여주거나 말한다. 또는 카운슬러의 애인 로라(페넬로페 크루즈)의 죽음이 결정되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 전까지,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내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건에 가담한 자들은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없고 가담자들의 심리도 없이 오로지 사건의 표면적인 진전과 그에 대한 두려운 예감과 피해가지 못하는 결과만이 제시되는 하드보일드한 세계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납득하기엔 외면할 수 없는 결함들이 너무 많다. 다만 그 결함들을 일일이 지적하기보다는 여기(시나리오)에서 여기(영화)로 가는 동안 발생되어버린 몇개의 패착을 언급하되, 당연한 비판보다는 우리의 상념을 더해 보는 쪽이 더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매카시의 위대한 성취, 소설적 풍경
그렇다면 첫 번째 여기(시나리오)에 관하여 말해보자. “시나리오를 쓸 때는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의 눈으로 써야 한다”는 카리에르의 말처럼, 매카시도 물론 같은 입장을 취하려 한 것 같다. 시나리오 첫장에는 다소 놀랍게도 “두 사람이 누워 있는 침대의 뒤쪽에서 카메라가 비춘다”라고 카메라의 자리까지 지정하고 있으며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까지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매카시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이것이 뛰어난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조금 평범한 수준의 희곡에 가깝다는 인상을 더 짙게 받았다. 매카시는 필시 어떻게 해야 영화의 시나리오로서 최선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껴안고 썼을 텐데 왜 나는 그것이 도리어 희곡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일까.
우선 손쉽게 제시할 수 있는 대답은 이 시나리오의 대화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운슬러>의 시나리오에는 기나긴 대화 장면이 많다. 그것이 옮겨지고 축약되면서 영화에서는 최소한의 전압조차 상실한 중언부언의 대화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한다. 양식으로만 본다면 어쨌든 이 대화들은 무대 위의 2인극을 떠올리게 하는데, 심지어 인물이 한 공간에 있지 않을 때는 전화 통화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2인극 양식을 유지한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대개 그 신 안에 존재하는 건 두 사람뿐이고 상대가 바뀌어가며 2인 대화, 지문, 2인 대화, 지문이라는 식으로 시종일관 이어진다.
매카시가 쓴 희곡을 바탕으로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하고 토미 리 존스와 새뮤얼 L. 잭슨이 연기한 2인극 영화 <선셋 리미티드>도 있었으니 매카시와 이런 대화의 방식이 아주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매카시는 시나리오를 쓰고자 했으나 은연중에 희곡의 방식을 반영하게 된 것 같다. 다만 이것 자체를 중대한 결함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보다는 2인극 양식들 사이에 있어야 할, 혹은 2인극 양식을 끌어안고 있어야 할 매카시 세계의 상위의 무언가가 실종되어버렸다는 느낌이 더 핵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실종된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게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매카시의 시나리오에서는 2인극 대화가 연쇄적이며 거대해지는 반면에 풍경은 축소되거나 약화되어서 단순한 무대 정도로만 기술되거나 심지어는 아예 실종되어 있기도 하다.
매카시와 풍경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세개의 지적을 떠올릴 수 있다. 첫 번째는 코언 형제의 지적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연출한 코언 형제는 매카시의 소설에 관하여 “코맥은 일종의 박물지처럼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흔히 찾을 수 있는 사전적인 뜻 그대로 박물지란 “동물, 식물, 광물, 지질 따위의 자연계의 사물이나 현상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글”에 해당할 것이다. 예컨대 <핏빛 자오선>의 빛나는 한 구절을 어쩔 수 없이 옮겨보기로 하자. “북쪽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뇌운에서 검은 덩굴처럼 벋어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비커에 묻어난 램프의 시커먼 그을음 같았다. 그날 밤 수킬로미터 너머에서 초원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실려 왔다.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자니 저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을 번개가 훤히 드러냈다. 벼락이 내려칠 때마다 바위가 울렸고 씻어낼 수 없는 형광 물질 같은 푸른 불 다발이 말에 들러붙었다. 부드러운 용광로 빛이 금속 마구에 번지고, 푸른빛이 총신을 물처럼 흘러 다녔다. 토끼가 푸른 섬광에 미쳐 날뛰다 우뚝 서고,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바위산에는 독수리가 익살스레 몸을 웅크리거나 천둥에 짓밟혀 한쪽 눈이 노랗게 갈라졌다.”
동물과 식물과 광물과 지질의 성질이 한데 엉켜 박물지적 이미지로 가득한 이 절창에 대해 감탄 이외의 다른 말을 보태기 어렵다. <핏빛자오선>에는 그와 같은 절창의 문구들이 다수 있으며 소수의 위대한 영화감독들만이 저런 구절을 영화의 이미지로 옮길 수 있거나 그와 견줄 만한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매카시의 또 다른 서부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을 영화로 옮긴 빌리 밥 손튼은 영화 자체로는 특별히 모날 것 없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저 유사한 구절들의 이미지 구현에는 대부분 실패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지적을 떠올릴 수 있다. 매카시를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로 손꼽는 미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매카시의 소설 중에서도 <핏빛 자오선>을 가장 탁월한 예로 꼽으며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 가지 장관은 판사, 풍경,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되어 대단히 유감이지만) 학살자들이다”(<독서의 기술>)라고 썼다. 판사와 학살자들은 인물화의 탁월함에 대한 문제이므로 다른 자리에서 말해져야 할 것이고 지금 관련된 것은 풍경이다. 그 풍경이 어떻게 장관인지에 대하여 블룸이 보다 자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진 않지만, 이상에 옮겨놓은 <핏빛 자오선>의 한 구절이 그가 말하는 장관의 풍경을 대변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기며 나는 일부러 길게 적었다. 그리고 세 번째 지적이 있다. 얼마 전 허문영은 <그래비티>에 관한 글에서 미국영화 또는 서부영화와 풍경의 관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전한다. “미국영화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서사로 정돈되지 않는 리비도를 풍경이 끌어안으며, 서사적 기획과 긴장하는 시각적 기획의 전통에 있다. 위대한 미국영화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불모의 황야, 성난 바다, 끝없는 사막, 위압적인 산악과 밀림, 아득한 설원은 인간 중심적 서사의 재강화를 위한 경유지이거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를 품고 있는 큰 형식이다. 이를 미국영화의 지리학적 전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부극의 전통이 그것을 완성했고, 소수의 걸작 SF들도 그것을 이어받았다.”(<씨네21> 929호)
미국영화 특히 서부극영화가 서사적 기획과 긴장하며 이뤄낸 시청각적 기획으로서의 신기원인 그 풍경을, 놀랍게도 매카시는 서부소설 연작 안에서, 즉 활자와 서사의 맥락에서 종종 단독적으로 완수해내곤 한다. 그걸 읽은 블룸과 코언 형제는 장관의 풍경이라고, 박물지라고 각자의 표현으로 찬탄한 것이다. 매카시의 소설은 그전에도 탁월했겠지만, ‘국경 삼부작’을 통해 명망이 끊긴 서부소설을 복원해내었을 때 공히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핏빛 자오선>과 같은 매카시의 서부소설을 읽으며 소름이 끼쳤다. 분명 쓰여 있는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데 시청각으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도저하여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개인적인 착시로 돌리거나 소설 장르가 지닌 일반적인 가치로 환원하는 대신에 매카시 소설이 지닌 독창적인 위대함으로 여기고 싶다. 이것은 활자와 시청각의 경계가 사라지거나 혹은 오롯이 겹치며 일어나는 신비이며, 그 신비의 예가 그 놀라운 지리적이며 박물지적인 풍경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말하자면 이런 신비에 관한 추구를 매카시의 시나리오 <카운슬러>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매카시 소설의 그 위대한 본연의 성질은 작가 스스로에 의해 여기 소멸된 것이다.
어쩌면 물리치기 쉬운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카운슬러>는 매카시의 일련의 서부소설과는 다르게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서부소설에서만큼 풍경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라는. 그렇다면 우리는 <카운슬러>와 유사한 종류로 여겨지는 하드보일드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묵시록에 가까운 <더 로드>를 읽으면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을 짚으면 될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매력이 미국 남서부의 지리적이고 박물지적인 성질, 가령 끓어오르는 초원의 열기, 야생의 동물,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한밤의 도심지, 불길한 국경선의 분위기, 말려들어가는 사람들의 어감 같은 것들과 관계없는 것이었던가. <더 로드>의 매력이 지구 종말을 맞은 잿빛 가득한 하늘과 헐벗은 폐허의 건물들과 좀비 같은 타인들과 그리고 외로운 아버지와 소년이 걷던 그 쓸쓸한 대지와 상관없는 것이었던가, 하고 말이다.
또 다른 반론이야말로 좀더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매카시의 소설에 존재했던 위대한 풍경이란 원래부터 시나리오에서 묘사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반론이다. 가령 소설과 시나리오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실제로 많은 부분이 그렇다. 소설 속 인물의 내면에 대한 기술은 그 자체로 완성이지만 시나리오 속 인물의 내면에 대한 기술은 배우의 연기나 그 밖의 영화적 조건에 따라 무용해지기도 한다. 종종 소설에서는 귀중한 것이 시나리오에서는 쓸모없어진다. 어쩌면 매카시 자신이 그러한 문제를 신중히 여겨서, 시나리오에서 영화로 옮겨지는 것들 중 온전히 옮겨지기 어려운 것의 목록에 풍경을 포함시켰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카시의 소설적 풍경이 시나리오에서는 왜 사라졌는가 하고 물었지만 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주 이상적인 상상을 할 수는 있다. 매카시가 소설 그대로의 수준으로 시나리오의 지문을 쓰고 어느 영화감독이 그것을 온전히 옮기는 것이다. 혹은 매카시가 조금 모자란 지문을 쓰더라도 감독이 더 훌륭히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감독의 몫이므로 우린 결국, 여기에서 여기로 가는 문제에 다시 닿게 된 것이다.
개입하지 않는 스콧
그리하여 두 번째 여기(영화)에 관하여 말해보자. 스콧은 일단 매카시의 시나리오를 최대한 바꾸지 않고 영화로 옮기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조금 더 말이 되도록 사소한 것들을 다듬는 정도이며 신의 배열에 관련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인물의 성격화를 위해 신의 순서를 약간 바꾼 대목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말키나의 섹스에 관련된 일련의 장면들은 시나리오에서 여기저기 퍼져 있는 것에 비하면 영화에서는 한곳으로 모여 있다. 그렇지만 크게 도드라지진 않는다. 하여간에 시나리오를 그대로 담아내겠다는 소신은 시나리오가 지녔던 문제까지 고스란히 함께 가져오는 부작용을 낳았다. 시나리오에서 부족했던 풍경의 중요도가 복구되지 못한 건 물론이고, 그마저도 구현된 장면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기능적인 배경으로만 쓰이고 있다.
시나리오가 내장하고 있던 취약한 동선의 문제들도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카운슬러>도 여러 명의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기의 구역을 갖고 움직이며 가끔씩 서로의 접선을 이뤄내면서 평행하게 가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코언 형제는 소설적 서사에서 영화적 서사를 어떻게 추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동선의 뼈대가 되는 추격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그 추격이라는 개념이 인물들의 산발적인 동선들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긴장으로 묶어준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와 무관하게 누가 누구를 끊임없이 쫓고 있으며 이 추격의 개념이 비유컨대 인물들간의 장력을 살벌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인물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그 끈으로 묶여 있는 형국이다. <카운슬러>에는 보이지 않는 그 끈이 모조리 끊어져 있어서 마약을 실은 분뇨차는 저대로 가고 있고 카운슬러 또한 저대로 나빠져만 가는 와중이다. 영화는 그걸 하드보일드한 세상으로 받아들여달라는 눈치만 계속 보내고 있다.
평론가 정성일이 탁월하게 해석한(<씨네21>644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다음과 같은 신기한 대목과 견줄 만한 것도 <카운슬러>에는 없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영화의 후반부,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보안관 에드(토미 리 존스)가 모텔의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안톤 쉬거가 홀연히 유령처럼 사라져버리는 불가사의한 장면. 정성일이 “의심스러운 편집의 조형”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한 장면. 원작 소설에서 이 장면은 안톤 쉬거가 주차장의 차 안에서 모텔로 향하는 에드를 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영화의 장면은 전적으로 코언 형제의 선택지를 따른 것이다. 스콧은 <카운슬러>에서 숏과 신의 운용에 있어 이와 같은 개입을 전혀 하지 않는다.
웃음 또는 울음, 영화로 가는 물질적 구현의 문제
그런데 의아하게도 스콧이 시나리오와 아주 판이하게, 아니 시나리오를 거의 무시했다고 할 정도로 바꾼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주인공 카운슬러의 어떤 표정이다. 이 표정은 일관되게 등장하므로 감독의 지시 사항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그의 웃음이다. 약혼녀인 로라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는 물론이고, 로스가 당신 참 똑똑하다고 비웃을 때, 웨스트레이가 이상한 건배의 말을 할 때, 라이너가 말키나의 행동에 대해 전할 때마다 카운슬러는 빠짐없이 씩 웃는다. 하지만 매카시는 웨스트레이의 허튼 건배의 말을 듣는 장면 이외에는 카운슬러를 거의 무감정의 사내로 표현하거니와 그에게 “웃음”이라는 지문을 주지 않고 있다. 배우의 연기란 기계적인 것이 아니어서 상황에 맞는 표정을 짓는 건 배우의 역량이며 시나리오가 어쩌지 못하는 영화적 세부에 속하므로 지문에 없는 표정을 지었다는 이유로 잘못되었다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웃음이라는 표정이 아니라 울음이라는 표정에 마침내 이를 때, 이 영화적 세부가 잘잘못의 측면이 아니라 조금 다른, 그러나 근원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음을 우린 느끼게 된다. 연기 양식의 문제를 넘어 시나리오에서 영화로 가는 사이의 물질적 구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더 확실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잦은 웃음보다 큰 울음이다. 정점이라고 해도 될만한 장면. 약혼녀를 납치해간 일당 중 하나인 멕시코의 갱단 두목과 주인공 카운슬러가 길게 대화를 나눈다. 카운슬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사태를 마감짓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냉혈하기 짝이 없는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지금 처한 숙명을 받아들일 것만을 내내 가르치고 강조한다. 어차피 약혼녀는 죽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대화는 겉돌며 속절없이 이어지고 상대방의 무심하고 질기며 잔인한 훈계도 이어진다. 그때에 매카시는 카운슬러의 답답한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기나긴 대화 사이마다 ‘침묵’이라고 네번 적어놓고 있다. 상대방이 한참을 말하고 침묵. 혹은 카운슬러 자신이 말하고 또 침묵. 그렇게 네번이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 스콧은 이 장면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갱단 두목과 카운슬러 사이에 시나리오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화의 끝 무렵에 이르자 카운슬러는 솟아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고 만다.
의아한 일이다. 매카시는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을 스콧은 오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각자의 판단을 따라야 할 문제이지만 스콧이 지나칠 정도로 필사자의 자세로 시나리오를 존중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 대목의 변동은 거의 과격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변절이거나 포기다. 게다가 이 대목은 영화의 거의 정점이다. 약혼녀가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침묵을 유지하는 것보다 상식적으로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처 완성되지 않은 영화적인 상태를 예상하며 혹은 옮겨지지 않은 그 영화적 이유에 호기심을 달며 또 이렇게 질문한다. 어쩌면 그 침묵의 무게가 영화로 표현 가능하기만 하다면, 네번의 침묵이 한번의 큰 울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숙명의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는 않았겠는가. 그렇게 묻는 동시에 이런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스콧은 침묵이라고 쓰여 있는 활자를 침묵이라는 시청각적 활동으로 옮길 방법을 결국 찾지 못했거나 포기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감정의 묘사에 기대기로 한 것 같다. 카운슬러가 오열하자 오히려 이 장면은 평범하고 온순해졌다.
작은 부스러기들이 영화를 삼켜버렸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갱단 두목과 카운슬러 사이에 놓인 침묵이라고 쓰여 있는 활자를 침묵이라는 활동으로 적확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활자에서 물질로 옮겨져야 하는 문제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인가. 침묵이라는 활자는 거기 박혀 있는 것이지만 침묵이라는 물질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 때 그걸 어떻게 옮길 것인가. 침묵이라고 써놓은 건 거기 아무것도 없다고 써놓은 것인데 그걸 어떻게 눈에 보이도록 존재케 할 것인가. 활자가 지시한 물질의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속수무책의 동어반복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사의 수많은 감독들이 그 문제를 두고 고민해왔을 것이다. 다만 이 침묵의 문제가 새삼 우리를 자극하는 요점은 분명하고 심원하다. 대다수의 영화에서 결국 문제는 여기에서 여기, 종이에서 필름으로, 시나리오에서 영화로, 언어에서 비언어로, 문자에서 시청각으로, 묘사의 기술에서 물질적 구현으로, 쓰여 있는 것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어떻게 가느냐는 그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시도하면서 실패하거나 조금씩 성공하고 있고 카리에르에게 영화를 가르쳐준 자크타티 정도의 위대한 감독들 몇몇만이 간간이 놀랄 만한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말을 덧붙일 수도 있다. <카운슬러>에 선택과 숙명이라는 테마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영화에 등장한 작은 조역 두 인물의 행동을 눈여겨보게 된다. 약혼녀를 납치해간 갱단의 두목과 협상의 다리를 놔줄 것을 부탁하며 카운슬러가 접근하는 멕시코의 변호사, 말키나의 명령을 받아 웨스트레이를 꼬여내 물 먹인 젊은 여인이다. 멕시코의 변호사는 사례하겠다는 카운슬러에게 돈 대신 악수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어차피 성사되지 않을 일인데 돈을 받으면 탈이 난다는 걸 알고 있다. 젊은 여인도 말키나의 돈을 받지 않는다. 대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두명의 조역은 그 돈을 받고, 받지 않는 작은 선택이 어떤 거대한 숙명을 만들지 직감하는 것 같다. <카운슬러>는 정확히 그들과 반대되는 선택을 따르고 반대되는 운명을 맞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영화의 이상을 온전히 믿지 않는 것 같고 그걸 읽은 영화감독은 영화를 온전히 믿지 않는 시나리오를 그대로 시청각적으로 필사하되 하필이면 신비를 품고 있는 지점만큼은 포기하고 만다. 그게 <카운슬러>라는 시나리오에서 <카운슬러>라는 영화로 가는 과정 중에 벌어진 이상한 일이고, <카운슬러>는 실패작이다, 라고 말하는 대신 다른 말이 길게 필요했던 계기가 됐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선택과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선택과 숙명의 테마는 은유적이나마 이 영화의 최종적 상태에도 아이러니하게 드리워 있는 것 같다. 빗댈 만한 두개의 명제가 영화에 등장한다. 웨스트레이는 범죄에 가담하겠다는 카운슬러에게 말한다. “아주 작은 부스러기 하나가 우리를 삼켜버릴 수도 있다.” 라이너는 카운슬러에게 말키나에 관하여 말한다. “섹시하기에는 너무나 적나라했다.” 이 두개의 대사를 <카운슬러>의 여기에서 여기로의 과정에 마음대로 비유하고 싶어진다. 예컨대 작은 부스러기들이,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선택으로서의 작은 부스러기들이 이 영화를 삼켜버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적당히 섹시한 것을 넘어서서 너무나 적나라하여 견디기 어려운 진짜 하드보일드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결국엔 적당히 섹시하고 슬픈 운명 안에 스스로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