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단단한 서사 속 불완전한 가면
2013-12-19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사이비>가 불러일으킨 또 다른 소망에 관하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확실히 <사이비>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나쁜 인간이 더 나쁜 인간을 응징한다. 물론 이 설정 자체는 새롭지 않다. 좋은 악인(good badman)은 거의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낯익은 캐릭터다. 적지 않은 영화들에서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이 관습적 영웅이 아니라 악인에 의해 추방되어왔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 <추격자>의 엄중호도 이런 좋은 악인의 계보에 속한 인물이다. <사이비>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민철은 거의 최악이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가족을 내팽개치고 몇달 동안 나타나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 수몰지구 보상금과 딸의 저축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는 파렴치한, 항의하는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무뢰배. 이 구제불능의 사내가 마을 주민의 수몰지구 보상금 전체를 횡령하려는 사이비 종교인/사기꾼과 대결한다. <사이비>의 특별한 점은 민철이라는 악인에게 최소한의 선한 동기도 어떤 자각의 계기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소한 시비(그것도 그에게 책임이 있는)로 인한 복수심이 그가 지닌 동기의 거의 전부다. 이 단순한 동기만으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한다.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이비>는 최악의 인간이 더 나쁜 인간을 응징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다. <사이비>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응징될 수 없는 악을 숙고한다. 사기꾼은 응징되었지만, 민철의 딸은 창고에서 자살한다. 우리는 자살 직전의 소녀에게서 사기꾼에게 속는 것만이 그녀가 삶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철이 밝힌 사기꾼의 ‘진실’이 그녀를 자살로 이끌었다. 처참한 진실과 견딜 만한 거짓 사이. 가혹한 내기다. 갑자기 노쇠한 민철이 동굴에 들어가 자기만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흐느끼듯 읊조리는 마지막 장면은 말문을 막는다.

<사이비>는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니체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진실을 견딜 수 있을까. 환상을 부수고 난 다음 ‘진리의 낙원’ 대신 찾아오는 ‘무지, 진공, 황야’를 살아낼 수 있을까. 그 두려움의 자리에 환상과 기만이 다시 초대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악은 응징되지 않는다. 잊기 힘든 무시무시한 결말이다.

그러므로 <사이비>는 최악의 인간과 더 나쁜 인간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평온한 얼굴로 영면한 아내의 시신 앞에서 “그게 가짜면 이 평화로운 얼굴은 뭐예요?”라고 담담하게 반문하는 칠성, 자신을 지키는 것과 신앙을 지키는 것을 구별하지 못해 결국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어버린 젊은 목사, 그리고 진실을 알기 전에 삶을 포기한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너무도 적절한 시간에 도착하는 클라이맥스에 장르적 과장이 있다 해도, <사이비>는 단단하고 명석한 서사의 영화다.

연상호의 전작 <돼지의 왕>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헐거웠다. 폭력과 계급 문제가 집약된 교실, 중산층의 몰락, 자본에 봉사하는 문학 등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나열된다. 예컨대 경민의 학창 시절의 악몽 같은 과거와 사업 도산이라는 현재의 문제 사이엔 내적 연관이 없다. 이 영화가 미스터리 구성을 취하고 있고, 과거의 비밀과 현재의 선택을 교차시키며 클라이맥스에 이르려 하고 있으므로 이 내적 연관성의 부재는 사소한 약점이 아니다.

인물들의 선택이 과도한 점도 동의하기 힘들다. 그중에서도 경민의 아내 살해는 가장 과도하다. 학창 시절 교실을 지배하던 친구는 중학교 1학년 우등생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학적이고 잔인하고 비열하다. 주인공들에겐 불행과 불운이 임의적으로 집약되어 있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과도하게 잔혹하며, 주요 인물들은 극단적인 선택에만 몰두한다. 가학과 자학의 과잉은 이 영화가 제기하는 사회적 의제의 절실함을 오히려 훼손한다.

연상호의 두 번째 장편 <사이비>는 모든 면에서 전작을 넘어섰다. 인물들은 다양해졌고, 대사들에는 생기와 위트가 있으며, 낭비되는 숏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예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결말은 이 영화의 감독이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2. 하지만 <사이비>는 훌륭한 영화인가.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망설여진다. 그 망설임에 관해 말하고 싶다. <사이비>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실사영화를 본 것처럼(더 정확하게는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읽거나 들은 것처럼) 말한다. 실은 나도 위에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타당한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전자는 찍은 것(포토그래픽)이고, 후자는 그린 것(그래픽)이다. 20세기 영화는 포토그래픽 시네마였다. 2012년 12월호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전세계 1천여명의 영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세계 영화사의 걸작 리스트 100에는 애니메이션이 한편도 없다. 애니메이션은, 적어도 영화 전문가들에게는 여전히 변방의 장르로 인지된다. 하지만 포토그래픽과 그래픽의 위계는 짐작보다 공고하지 않으며, 둘 사이의 경계도 생각보다 불분명하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둘 사이의 위계와 경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바타>는 포토그래픽인가, 그래픽인가.

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는 일찍이 21세기의 영화세상에서 포토그래픽과 그래픽의 위계가 뒤바뀔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건 위계의 전복보다는 경계의 교란이다. 오늘의 관객을 사로잡는 할리우드 대작 대부분은 실사영화로 분류되지만 실은 포토그래픽 피사체인 인간이 그래픽 공간에서 벌이는 모험담/판타지이다. 그렇지만 21세기의 디지털 그래픽은 20세기적 애니메이션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 21세기의 디지털 그래픽 이미지에는 대개 작가의 서명이 없으며, 오히려 포토그래픽 이미지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미셸 오슬로나 프레데릭 백처럼 개별 이미지들에 강렬한 개성을 수공업적으로 새기는 경우를 제외한다 해도, 애니메니션 애호가들은 한컷만으로도 오시이 마모루와 실뱅 쇼메의 터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작화가와 감독의 분업이 오래전에 확립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포토그래픽과의 자의식적 거리는 유지된다. 하지만 21세기의 할리우드 포토그래픽/그래픽 판타지는 그 거리를 완전히 지우려 한다.

그러고 보면 <사이비>는, <돼지의 왕>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상한 시점에 도착한 영화다. 포토그래픽 시네마가 디지털의 권능에 기대 그래픽과 이종교배한 뒤 양자의 시각적 경계를 지운 환상담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래픽 시네마 그것도 1인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제작된 고색창연한 셀애니메이션이 고전적인 리얼리즘 드라마로 등장한 것이다. 더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본 우리는 마치 이제 더이상 포토그래픽과 그래픽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혹은 좋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한다.

3. <사이비>에서 우리가 읽은 것이 아니라 본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이 영화의 그래픽에서 작가의 서명을 감식하는 개인적 능력의 부족임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각본은 물론이고 작화에서부터 편집에 이르기까지 연상호라는 한 창작자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건 부차적인 의제라고 말할 수 없다(이 문제에 관해선 다른 평자들의 견해를 듣고 싶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포토그래픽 외양을 지닌 화려한 디지털 그래픽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사이비>의 간결한 셀애니메이션 터치는 오히려 기묘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역설적 상황이 그래픽적 과장(<돼지의 왕>에서의 본드 환각 장면과 같은)이나 시각적 개그를 최소화하고, 사실주의적 드라마 전개에 몰두하는 이 영화의 서사적 전략과 만나 우리가 지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잊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해 그래픽에 새겨진 작가의 서명을 판독하는 대신,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보다 일반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포토그래픽과 그래픽의 경계가 희미해져가고 있다 해도, 변함없는 차이가 있다. 포토그래픽 시네마에는 얼굴이 있고 그래픽 시네마에는 얼굴이 없다는 것이다. 풍경과 공간과 사물은 물론이고, 모션 캡처의 개발 이후로 인간의 섬세한 움직임마저 디지털 그래픽으로 표현 가능해졌지만 아직 얼굴은 정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견으로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얼굴이 지닌 이중성 혹은 다성성(polyphony)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클로즈업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던 영화이론가 벨라 발라즈는 “얼굴은 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적 작업을 위한 최적의 장소며, 따라서 마법적이고 나아가 끊임없이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라고 말했다. 이 말은 “위대한 사진은 얼굴을 포착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얼굴을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진”이라는 사진작가 프랑수아 술라즈의 말과 함께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영화 속의 얼굴>이라는 책을 쓴 영화학자 자크 오몽은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얼굴을 재현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재현을 수행했다”고 단언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비밀을 묻는 질문에 존 포드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그런 건 없다. 그저 영화는 사람의 눈을 찍는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바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실사영화의 얼굴을 대신하는 것은 특정한 표정을 나타내는 패턴화된 그래픽, 즉 가면이다. 유능한 애니메이션일수록 여러 감정을 표현하는 가면의 수가 많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를 아무리 늘린다고 해도 얼굴을 대체할 수는 없다. 얼굴은 하나의 표정에도 많은 표현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숨김과 드러냄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점멸하는 불가사의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북촌방향>(감독 홍상수, 2011)의 마지막 장면에서 고현정의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벽에 기대선 유준상의 두려움, 불편함, 놀라움이 무표정과 교차하는 그 기묘한 얼굴을 어떤 그래픽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사이비>를 리얼하다고 받아들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무성영화 시대에 벨라 발라즈를 경탄케 한 얼굴을 해체하거나 하나의 오브제로 축소시켜온 현대영화의 무능력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얼핏 생각하기와는 달리 몇몇 훌륭한 애니메이션은 오직 하나의 가면을 유지함으로써, 즉 감춤만을 고집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다. 자크 타티가 모델인 <일루셔니스트>(감독 실뱅 쇼메, 2011)의 인물은 한 가지 표정으로 일관한다. 거듭된 몰락의 와중에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 태평스런 얼굴이 오히려 깊은 비애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진짜 얼굴을 감춘 어릿광대의 웃음 분장 혹은 버스터 키튼의 ‘위대한 무표정’이 전하는 특별한 감흥도 드러냄이 아니라 감춤이 지닌 마법의 사례들이다. 아마도 이것이 <토이 스토리>(감독 존 래세터, 1995)에서 하나의 표정으로 고정된 장난감과 인형들이 인간적으로 보이고, 오히려 복수의 표정을 지닌 인간들이 인형처럼 보이는 역설을 설명해줄 것이다. 우리가 <월·Ⓔ>(감독 앤드루 스탠튼, 2008)에서 그토록 감동을 받았던 것도 튀어나온 눈밖에는 얼굴이 없는 깡통 로봇이 어떤 표정도 지닐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4. 미뤄온 대답을 해야겠다.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이비>는 훌륭한 서사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0세기적 포토그래픽 시네마 편에 서 있으며, 그래픽 시네마가 인간의 얼굴을 담을 수 없다면 그에 값할 만한 무언가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사이비>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언가를 들었다. 그것은 훌륭한 이야기였지만 애니메이션이 더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이건 절대적 기준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사이비>는 올해 성공작 중의 하나인 <관상>에 비해 캐릭터의 다양성과 개성에서 결코 뒤지지 않으며, 이야기의 짜임새와 사색의 깊이에서는 오히려 능가한다. 그럼에도 <관상>이 <사이비>보다 더 훌륭한 영화로 인지된다면 그것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그리고 대작과 소품의 관습적 위계, 스타의 스펙터클 유무가 얽혀 있는 제도적 효과다(굳이 <관상>을 예로 든 것은 이 영화가 얼굴과 가면의 관계를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관상>은 ‘얼굴=가면’이라는 소박한 등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그럼에도 <관상>의 얼굴들에는 가면에 없는 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역적의 가면을 쓴 이정재의 얼굴은 왜 그토록 매혹적인가. 영화와 스타의 관계가 연관된 이 질문은 다른 기회에 다시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상호는 왜 <사이비>를 실사로 찍지 않고 애니메이션으로 찍었느냐는 질문에 “그건 피터 잭슨에게 왜 <반지의 제왕>을 애니메이션으로 찍지 않고 실사로 찍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재치 있게 답했다.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실사영화를 보고 싶다. 그의 서사가 인간의 얼굴과 만난 결과를 보고 싶다. 실사가 아니라면 나는 그의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의 얼굴을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가면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싶다. 평자 이전에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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