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어색한 모양이다. 배우가 되고 나서 제일로 좋은 게 뭐냐고 했더니, 물어본 사람 무안하게, 서진호는 화들짝 놀란다. 작은 얼굴이 발개지고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응대하길, “저, 아직 배우 아니에요”. 단골 커피숍 점원이 어느날 자신을 ‘공인’으로 대하는 데 놀라서, 커피도 안 마시고 뛰쳐나왔다니, 아직은 ‘배우’라거나 ‘공인’이라는 타이틀이 많이 낯선 모양이다. 의 여전사 오혜린으로 전국 150만 관객을 마주했지만, 스크린 밖의 서진호는 넉살 좋고 재치 만발한 요즘 세대치고는 ‘별종’이다 싶을 만큼 여리고 수줍고 조용하다.
2년 전 겨울 오디션장에서 서진호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았다.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그녀에게, 이시명 감독은 “누구나 다 노력하고 다 간절하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부담이 동기가 되고 매혹이 된 것. 서진호는 라는 영화를, 오혜린이라는 캐릭터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결국 3개월에 걸친 오디션에서 최후의 승자가 됐다. 바다가 꽁꽁 얼 만큼 추웠던 강원도의 겨울, 무술과 총격 훈련에 홍일점으로 참여했던 것보다 힘들었던 기억은 “대의를 위해 마음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여전사의 한(恨)”을 살리는 것이었다. 액션영화에서 여배우의 자리가 흔히 그렇듯 “꽃이 되거나 짐이 될까봐 두려웠다”는 것이 서진호의 솔직한 심경. 아쉬움도 많지만, “배우로서 알아야 할 100 중에서 0.001 정도는 터득했다”는 데 만족하고 있다.
서진호의 첫 영화는 <불후의 명작>이다. 송윤아가 짝사랑하는 선배와 맺어지는 여배우를 연기했는데, 여성적이고 화려한 이미지가 비련의 여전사 오혜린과는 사뭇 달랐다. “아무것도 몰랐고, 연기를 했다기보다는 이미지를 보여줬다”는 게 자평. <불후의 명작>에 출연하기 전에는 MBC 공채 탤런트 타이틀로 <연예 스테이션> MC와 <출발 비디오여행>의 한 코너 ‘뜰까’ 진행을 맡았다. 짧은 경력에 비해 의도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은 스스로에게 부족한 듯싶은 ‘자신감’을 충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 과정중에 있다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서진호는 생각한다.
피겨스테이팅, 체조, 킥복싱, 요리, 꽃꽂이, 플라멩코…. 서진호는 못하고 안 한 게 별로 없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성향도 있지만, 어떤 역할, 어떤 기회에도 덤빌 수 있는 다재다능한 배우가 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인 셈이다. 다음 프로젝트로는 굴곡이 많은 연애를 하는 역할, 음울한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스스로에 만족하는, 그래서 행복한 배우”가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관객 제일주의 운운하는 것보다 솔직해서 예쁜 대답.
배우의 꿈은 이제 현실이 됐다. <그리스2>의 미셸 파이퍼에게 반해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지만, 집에 알린 건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대학 입시 때다. “미리 혼날 필요없으니까 발설 안 했죠. 배우는 보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부모님도 설득 못하면 누굴 설득할 수 있겠어요.” 그러고보니 서진호는 조용히 ‘사고’치는 스타일. 조만간 대형사고 한건 더 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