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나 모노레일 앞에 줄섰던 분들이 얼떨결에 롤러코스터를 탔다가 놀라실 수도 있다.” 말문을 연 원신연 감독의 목소리에 자신감과 염려가 반반씩 묻어났다. <세븐 데이즈> 이후 6년 만에 만난 그는 “진격의 카 액션”을 메인 요리로 올린 “액션의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관객을 기다리는 중이다. 짐작건대, 왕년에 무술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 남자가 힘닿는 데까지 쭉 뻗어 찬 하이킥에는 두들겨 맞으며 신나할 관객도, 그냥 꽥 쓰러지고 말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유익하다. 영화의 무림을 헤매며 즐거워하는 이 사내, 원신연 감독에게는 그 매번의 대련이 곧 매번의 전진이기 때문이다.
-무술감독을 오래 했던 사람으로서 <용의자>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올 게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겠다.
=당연하다. <로보트 태권 브이>에 4년 가까이 매달려 있다 보니 너무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받아든 시나리오였는데, 읽어보니 액션의 향연(!)이더라. 근데 액션만 있는 영화였다면 안 했을 거다. 지동철(공유)의 여정이 나를 건드는 데가 있어서 하게 됐다. 잘 만들면 액션도 만족스럽고 드라마도 잘 사는 프로젝트가 되겠더라.
-6개월간 각색에 공을 들였다. 제작사와 투자사는 드라마 완성도에 아주 만족했다던데.
=액션을 먼저 배치해놓고 거기에 드라마를 삽입한 느낌의 시나리오를 뜯어내, 드라마를 먼저 배치하고 거기에 액션을 다시 하나하나 끼워넣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인지 보통 액션영화의 리듬을 예상한 관객에겐 좀 낯선 부분도 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한국 관객의 관습화된 영화 보기 방식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하지만 <구타유발자들>로 안티 팬을 수없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만드는 만큼 다른 시선을 담고 싶었다. 세 가지로 귀결이 됐다. 하나는 인물 중심의 전개다. 장르영화는 사건 중심으로 끌어가야 눈에 쏙쏙 들어오는지라 부작용도 예상했지만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었던 부분이다. 두 번째는 모든 인물을 주인공처럼 다루는 거였다. 편집된 부분이 있긴 하나, 지동철을 포함한 모든 인물이 목표와 기승전결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지동철의 대사를 줄였다. 지금은 A4 2장 정도 되는데 더 줄이고 싶었다. 눈과 몸으로 표현하는 게 더 많은 캐릭터였으면 했다. 청도에 가서 소싸움을 보면, 경기 직전 전광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의 클로즈업이 딱 한번 비친다. 그때의 숙연한 느낌은 말이 아니라 눈에서 오는 거다. 대사 없는 주인공을 관객이 어떻게 따라갈까도 궁금했다.
-한 신만 등장하는 인물에게서도 절박하고 처절하게 싸우는 게 보이긴 한다. 그들의 사연이 다 설명되진 않지만.
=편집에서 걷어낸 장면이 많다.
-편집 과정에서 드라마를 많이 포기해야 했나.
=감독이 지키려는 것과 투자배급사가 지키려는 것의 차이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보니 생기는 자연스런 일이다. 블라인드 시사에서 제일 좋은 반응을 얻은 건 3시간짜리 현장 편집본이었다. 근데 50분 정도 잘라내면서 인물별 드라마가 줄고 액션이 도드라지게 됐다. 지동철 부분은 룡강부대에서의 처절한 훈련과정이랑 교수대에서 탈출한 뒤 무시무시한 무표정으로 처와 딸을 찾아다니는 장면이 잘렸다. 캐릭터의 핵심 동력이 되는 장면들이었는데.
-퍼즐의 피스가 수십개쯤 더 있었던 거네. 프리 프로덕션에도 10개월 정도가 걸렸다.
=그것도 짧았다. 캐스팅이 지연되는 시간마저 소중했다. 프리 단계에서 사운드 설계까지 다 나와야 움직이는 성격인데, 예를 들어, 차가 정면충돌하는 소리는 할리우드의 웬만한 라이브러리를 다 뒤져봐도 없더라. 그런 걸 미리 가공해놔야 한다. 근데 현재 후반작업 스탭의 대부분이 적은 보수로 인해 한 영화에만 몰입할 수 없다. 배우만 다른 비슷한 영화들이 양산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기 싫어서 후반작업 스탭을 프로 프로덕션 단계까지 끌어들인 거다. 돈은 똑같이 드리면서….
-촬영장비 개발에도 많은 시간을 들였다고. <본> 시리즈의 스턴트 코디네이터로 활약했던 댄 브래들리에게 직접 자문도 했다던데.
=그분의 아이디어를 빌려서라도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분의 카 액션은 ‘도망간다-쫓아간다-부순다’가 아니라 차 자체를 신체의 일부분처럼 활용해 무기화하는 식이다. 그래서 액션을 ‘본다’가 아니라 ‘느낀다’가 된다. 그런 분도 우리가 찍고 싶은 장면을 듣더니 그건 자기들도 고민해봐야 한다더라. 그럼 장비라도 빌려볼까 해서 견적을 뽑았는데 우리 예산의 1/3…. 알겠다, 너네 열심히 영화 만들어라, 우리도 열심히 만들어볼게. (웃음) 그렇게 됐는데, 우리 손으로 만든 게 잘한 일 같다.
-어떤 장비들을 만들었나. 그런 장비들이 10개월 만에 만들어지나.
=마이클 베이가 늘 쓰는 스턴트용 특수차량 ‘베이버스터’부터 시작해서 많이 만들었다. 이런 식이다. 나로호 쏜다고 하면 로켓만 주지 기술은 안 주잖나. 근데 우리가 로켓 한번 스윽 보고 ‘되겠는데?’ 하면서 주먹구구로 만들었는데 발사도 성공한 셈이다.
-‘다큐 액션’을 표방했다. 매끄럽게 찍은 액션과 날것 그대로의 액션간 균형도 고민했겠다.
=<세븐 데이즈> 때 ‘어지럽다’는 원성을 많이 들었다. 딸 잃은 어머니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건데, 인터넷 게시판엔 ‘술 먹고 보면 안 되는 영화’란 얘기가 돌고 그랬으니까. (웃음) 그래서 이번엔 더 정교하게 접근했다. 한국 액션영화들은 중간 사이즈를 많이 쓰잖나. 우리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극단적인 롱숏을 많이 썼다. 카 액션 하나를 찍을 때도 카메라를 더 다양한 위치에, 더 다양한 앵글로 달아봤고. 주어진 상황을 처절하게 헤쳐나가는 지동철의 호흡을 관객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카메라가 사람의 감정과 욕구를 가진 눈이었으면 한 거다. 근데 너무 힘들다고 그러더라. 관객도 두들겨 맞는 것 같다고. (웃음)
-<구타유발자들>의 원신연이 어디 가진 않은 것 같다.
=놀이공원 가도 바이킹을 제일 좋아한다. 바이킹 하면 또 월미도 바이킹이다. 사람 없을 땐 최정상까지 10번 이상 올려주는데 그럼 배가 탄력을 받아서 안전선보다 더 올라간다. 손잡이도 들리고 엉덩이도 쑥쑥 빠지고. <용의자>로도 그런 스릴을 주고 싶다. 다만 기자들이 회전목마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서…. (웃음)
-액션 신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DVD에는 액션 ‘강화’판을 넣을 생각이다.
-블록버스터에 대한 부담감은 어떻게 견뎠나. 작업 내내 공황장애도 앓았다던데.
=그건 또 누가…. 하아, 정말 힘들었다. 정신적으로는 행복했다. 7년 만에 영화를 만드는데, 좋은 스탭들이 있고 구현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하나 완성되어가고 배우들도 한식구처럼 준비를 잘해줬으니까. 그래도 육체적으로는 죽겠더라. 보통 한 작품을 만들 때 감독이 최종결정해야 하는 항목들이 1만∼2만개쯤 된다고 하잖나. 이 영화는 10만개쯤 됐다. 또 그중 많은 부분이 스탭들도 처음 해보는 것들이니까 나도 하나를 결정하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했다. 예산보다 새로움에 대한 부담이 특히 컸던 것 같다. 결국 ‘멘붕’이 왔지.
-오세영 무술감독, 계단 신에서 지동철과 싸움을 벌이는 SA1 역의 원진 무술감독과는 10대 때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라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혜화동에 살고 세영이 형은 인천에 살았는데 매일 인천으로 찾아가서 운동을 배웠다. 원진이 형과는 오뚝이 무술단을 같이 하며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마다 공연 다니고. 그러니 나한텐 형들이 내 신체의 일부 같다.
-작업할 때 호흡이 좋았겠다.
=거의 최고였다. NG가 나면 서로 눈이 딱 마주친다. (눈으로 신호 를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이러면 딱 안다. 그러면 다음엔 NG가 안 난다.
-합을 짤 때도 레퍼런스 따로 보여줄 필요 없이 대충 ‘성룡의 <사제출마>에 나오는 의자로 싸우는 장면 알지’ 하면 다 이해한다고.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갈등도 있었다. 형이 며칠 고민해서 데모필름을 만들어오면 난 만날 ‘조금만 더’라고 했으니까. “진짜 같지가 않은데?”“그럼 니가 한번 해봐.”“아이, 형, 난 안 한 지 오래됐잖아. 형이 무술감독이잖아.”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형이 과거에 머리 쓰다듬으면서 같이 다녔던 동생이니깐 내가 미운 짓을 해도 많이 봐준 것 같다.
-배우들이 액션 신 해야 할 때 감독님은 당근을, 오세영 무술감독님은 채찍을 나눠 들었다고.
=그런 건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건데, 세영이 형이 다 얘기했구먼. 배우들이 나한테 “이건 안 해도 되죠?”라고 물으면 난 “아이고, 당연하지. 다치면 큰일 나~”라고 하지. 근데 세영이 형이랑 밖에 나갔다 오면 “감독님, 제가 할게요. 다 하던데?”로 바뀌어 있다. 이런 게 다 고도의 전략이다. 하니 못하니 마찰이 생기면 다음에 편안한 장면을 찍을 때 앙금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감독까지 ‘할 수 있어!’라고 하면 배우가 자신감이 과해져서 오히려 사고를 낼 수도 있으니까.
-소수의 주/조연급 외 주요 캐릭터에 무술감독이나 스턴트하는 분들을 직접 기용했다. 원진 무술감독 외에도 박 회장을 독살하는 인물은 최태환 무술감독이, 김석호(조성하)의 오른팔은 지금은 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 중인 친동생 원풍연 씨가 맡았다.
=그 자리는 원래 그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디렉션과 인물의 캐릭터만 잘 맞아떨어지면 기존의 어떤 배우를 쓰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효과가 난다. 예전엔 스턴트맨들이 <투캅스> 같은 영화에 ‘으악새’로 나가도 서로 대사를 피했다. 요즘은 액션스쿨도 생기고 연기에 욕심 있는 친구들이 늘어나서, 액션배우에 대한 인식도 점점 바뀌어갈 거라 기대한다. 액션배우에서 액션을 뗐으면 좋겠다. 그분들은 그냥 액션을 잘하는 배우인 거다.
-<구타유발자들>의 김태훈 PD, <세븐 데이즈> 임충근 PD, <용의자>의 제작자 이명현 그린피쉬대표 등이 꼽는 감독님의 최대 장점이 정확한 의사소통 능력이라더라. 그게 <용의자>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영화를 감독님에게 맡긴 이유기도 하다고. 비결이라면.
=첫 번째는 수평적 관계다. 이를테면 미술팀 전체를 미술감독화해버린다. 막내가 미술감독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고, 그래도 미술감독이 막내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다 막내랑 나 사이에 큰소리가 날 때도 있는데, 헤드급들도 은근히 좋아하면서 막내한테 잘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투명한 경영이다. 예산을 다 깐다. 보통은 제작자랑 PD만 알고 있잖나. 그러다보면 스탭들은 내가 왜 이 돈 받고 일해야 하는지, 왜 밥값이 다 7천~8천원 하는 세상에 우리만 6천원짜리 밥을 먹어야 하는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근데 그런 걸 다 오픈하니까 서로 의심을 안 하게 된다. 예산을 초과하는 상황이 생겨도 서로 욕심 안 내고 돕게 되고. 제작사 대표는 개인적으로 커피 한잔 쓱 마시고 영수증 처리할 수 있는데 그거까지 까라니까 싫어할 수도 있다. (웃음)
-개인적인 성격인가, 충무로에서 쌓은 경험인가.
=둘 다인 것 같다. 단편영화 만들 땐 아예 현금을 통째로 찾아다가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다야, 이제 한번 해보자. 그런 태도가 상업영화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온 것 같다. 그리고 첫 상업영화 만들면서 PD와 스탭들 사이에 오가는 모종의 거래로 인해 영화가 돌아간다면 결코 자유로운 영화가 나올 수 없다는 것도 배웠고.
-평소에 늘 시나리오를 서너편은 쓰고 있다고 하던데.
=버릇이다. 한편 쓰다 지치면 다른 거 쓰다가 다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돌아오고 하면서 동시에 서너편을 쓴다.
-그럼 쉬는 시간이 없겠다.
=영화인들이야 일할 때가 제일 편하지 않나. 일 안 할 때가 힘들지.
-꿈이 죽을 때까지 100편의 영화를 만드는 거라고.
=그 안엔 단편도 있고 독립영화도 있고 다큐멘터리도 있고 실험영화도 있을 거다. 다 해보고 싶고 다 할 거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로보트 태권 브이>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움직임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나나 시나리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꼬인 문제가 있는 거다 보니 어떻게 해결될진 모르겠다.
-필모그래피를 봐도 외길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다종성을 지향하나.
=하나의 테마를 갖고 100편을 만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주제, 소재, 형식, 장르가 다 다른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나만의 도전의식 같은 것이 공통되게 들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