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몸의 진풍경을 경험하며
2014-01-16
글 : 김중혁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혜 (일러스트레이션)
수영 애호가 K, <불멸>에 홀리고 <노브레싱>에 안타까워하다

수영장에 처음 발을 내딛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물기로 미끄러운 바닥,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 알싸한 소독약 냄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입장하던 순간의 부끄러움, 머뭇거림, 어디에 서서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난처함, 이 모든 것들이 공감각적으로 기억난다. 1분이라도 빨리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몸을 숨기고 싶었지만 수영 선생님께서는 그걸 허락지 않으셨다. 수영장 예비교육을 마친 뒤에 본격적인 수업을 실시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어쩌면 ‘일단 벗은 몸에 익숙해진 뒤에야 수업을 진행하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 십여명이 둥그렇게 서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가릴 곳은 다 가렸는데 어딘가 더 가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게 난감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수영장에서의 예절과 수업의 진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선생님께서는 준비운동을 시켰고, ‘벗은 몸도 부끄러운데 벗은 몸을 움직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항의하고 싶은 시간이 또 천천히 흘러간 뒤에야 물에 입장할 수 있었다. 수영장에 들어간 뒤 입수할 때까지의 시간은 내 평생 가장 느리게 흘러갔던 시간 3위 안에 들 것이다(역시 최저속도는 군대에서의 시간일까?).

벗은 몸에 익숙해지는 데 몇주가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먼저 상대방의 벗은 몸에 익숙해졌고, 몇주가 지나서야 나의 벗은 몸에 익숙해졌다. 상대방과 나의 살구색에 익숙해지자 사람들의 몸을 유심히 관찰하게 됐다(이건 훔쳐보기 같은 게 아니라고요! 그냥 대놓고 보기!). 어린 몸, 늙은 몸, 탄력 있는 몸, 축 처진 몸, 뚱뚱한 몸, 마른 몸, 근육질 몸, 풍만한 몸, 풍성한 몸, 방만한 몸, 빈약한 몸… 이루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몸이 낫고 어떤 몸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두 똑같은 몸일 뿐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몸들이 물 위에 둥둥 떠서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수영 배우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진풍경을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수영장에는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풀(pool)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망대(라고 해야 할까, 관찰실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곳이 있다.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부모들을 배려한 공간일 텐데 나는 가끔 그곳에서 수영장을 내려다보곤 했다. 접영을 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사람,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속 물을 마시는 사람, 물장구는 요란한데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물에서 버둥거리는 사람들의 괴이한 동작을 보며 웃다가, 저게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밀란 쿤데라가 진작에 썼다. 소설 <불멸>은 나이든 부인이 수영을 배우는 코믹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혼자 풀 안에서 허리까지 물에 담근 채, 자기 앞에 꼿꼿이 서서 수영을 가르치는, 선수용 윗옷까지 걸친 강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풀 가장자리 난간에 매달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이 심호흡을 반복했는데, 마치 물 저 밑바닥에서 어떤 낡은 증기기관차 소리(오늘날에는 잊혀져버린 이 목가적인 소리를,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다만 그것을 풀 가장자리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한 노부인의 숨결과 비교하는 것뿐이다)가 솟아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매혹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증기기관차! 바로 그거였다. 수영장의 사람들은 모두 낡은 증기기관차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게 발차기와 숨쉬기인데, 발차기가 증기기관차의 피스톤 역할을 한다면 숨을 쉬는 건 연실에서 내뿜는 수증기와 비슷할 것이다. 음, 푸, 파…, 증기를 내뿜듯 숨을 내뿜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음, 푸, 파, 힘겹게 전진한다. 요령이 필요하다. 숨을 모두 내뱉으면 안된다. 숨이 빠져나가 폐가 작아지면 부력이 떨어진다. 가라앉지 않으려면 숨을 잠시 멈추어서 폐에 가두어야 한다. 수영이란 공기 가득 담은 폐를 이용하여 헤엄치는 일이다. 몸속의 폐가 증기기관차의 보일러실인 셈이다.

수영을 배울 때 가장 힘든 점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일 같지만 막상 물속에 있다보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땅을 딛고 하는 운동, 달리거나 딛고 뛰어오르는 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숨을 쉬지 못하면 간단히 죽을 수 있는 게 인간이란 걸, 그토록 무기력한 존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물속에선 모든 곳이 헤어나올 수 없는 허방다리이고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이다. 짚으려고 하는 순간 헛짚게 되고,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가라앉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이 류(신하균)의 발목을 밧줄로 묶은 다음 아킬레스건을 잘라내는 장면을 볼 때마다 섬뜩한 이유는, 마치 보는 사람을 허공에 내던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스건이 잘린 류는 피를 내뿜으며 가라앉는다. 물에서는 잡을 게 없다. <복수는 나의 것>에는 유독 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류가 동진의 아이를 유괴하기 위해 작전을 짜는 곳은 수영장이며, 류의 누나는 욕조에서 자신의 팔을 긋고, 동진의 아이는 결국 물에 빠져서 죽는다. 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아빠의 꿈속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아빠, 나 수영 좀 일찍 배울 걸 그랬나봐.” 멀리서 바라보는 물은 아름답게 반짝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발을 담근 물에는 오싹한 공포가 있다.

수영을 소재로 한 청춘영화 <노브레싱>을 한명의 수영인으로서 기대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게 청춘이고 암울한 것도 역시 청춘이라면 이보다 물과 잘 어울리는 게 있을까 싶었다(‘노 브리딩’(No Breathing)이라는 단어를 ‘노브레싱’으로 바꾼 감각은 마음에 안 들지만). ‘숨을 쉬지 않더라도 참아내겠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젊음의 상징인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멋진 물속 장면을 볼 수 있길 기대했다. 실망이었다. <노브레싱>에서 수영 선수들은 무조건 앞으로만 헤엄친다. 순위를 다투고 더 빨리 헤엄치기 위해 숨을 멈춘다. 이럴 거면 육상 선수들의 영화를 찍을 것이지, 뭐하러 수영영화를 찍나 싶을 정도로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간다(무슨 소리야, 열심히 운동한 배우들의 벗은 몸을 보여줘야지. 그래, 맞아, 그렇지). 나만의 과대망상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을 참고 앞으로 계속 질주하는 게 젊음’이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섭섭했다. 숨을 참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물속 깊이 잠수할 수도 있다(<그랑블루>가 이런 의미의 영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수영장에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면 잠영을 해본다. 물속은 참으로 고요하다. 모든 소리들이 먹먹하고, 아득하고, 멀게 들린다. 모든 것이 부드럽게 하늘거린다. 부유하는 것들도 모두 아름다워 보인다. 숨을 참고 버텨보지만 오래가진 못한다. 폐가 터질 것 같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급하게 올라와서 수면 위에서 숨을 터뜨리는 순간, 모든 소리들이 다시 생생해진다. 현실이 되돌아온다. ‘노브레싱’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노브레싱>을 보면서 만화 <염소의 맛>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지면 관계상 다음 회에 한번 더 수영 이야기를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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