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동화의 진화 마음의 얼음을 녹이다
2014-01-23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안데르센 동화를 재해석하고 한발 더 나아가다

밤이다. 그런데 밖에 눈이 온다. 이때 당신 머릿속을 처음 스친 생각이 “아! 아름답다” 혹은 “우와! 신난다”라면 아직 당신에게 동심이란 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 미끄럽겠다” 혹은 “이런, 내일 일은 어떻게 나간다지”라는 걱정에만 휩싸인 당신이라면 이미 동심이란 옛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이제야 비로소 당신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완벽하게 이해할 때가 된 것이고 올겨울에는 디즈니의 <겨울왕국>을 통해 ‘힐링’까지 경험해볼 테니 말이다. 아직 이 세상의 쓴맛을 제대로 보지 못해 ‘동심’이 남아 있는 이들이 ‘힐링’의 진정한 의미를 알 턱이 없다. ‘힐링’이야말로 비정한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상처받은 영혼의 진정한 특권이라는 씁쓸한 진실. 하지만 평생 세상의 음험한 비밀을 모르고 룰루랄라 사는 것보다 세상의 어둡고 음험한 속내까지 다 알아가며 사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그래서 네오는 빨간 약을 먹었고(<매트릭스>), 니모는 가출을 했으며(<니모를 찾아서>), 빨간 모자는 할머니집에 갔던 것이다(<빨간 모자>). (아… 빨간 모자는 그 이유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그녀도 늑대 녀석 덕분에 세상의 진실을 일부 깨닫긴 했다.)

가슴에 박힌 ‘유리 조각’이라는 상징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흥미로운 세팅과 환상적인 전개 때문에 아이들이 주로 읽는 동화로 여겨져왔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거나 심각한 정서적 충격을 안겨줄 내용들을 꽤 많이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완두콩 위의 공주> 같은 작품을 보자. 까다롭게 왕비를 찾던 왕자가 있었다. 만족할 만한 신붓감을 찾지 못해 솔로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성에 찾아온 허름한 행색의 여자를 보고 별반 기대를 하지 않고 재워준다. 그는 그녀를 시험해볼 겸 일곱겹의 매트리스 밑에 완두콩 한알을 넣어둔다. 다음날 잘 잤느냐는 왕자의 물음에 그녀는 온몸이 배겨 도통 잠을 못 잤다고 투덜댄다. 왕자는 그제야 그녀가 공주임을 알아차리고 만족스럽게 아내로 맞아들인다. 어린 시절 읽었던 아주 짧은 이 동화는 이후 20여년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왕자는 ‘까다로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궁금증은 ‘남자는 민감한 여성을 좋아하는군’이라는 다분히 섹슈얼한 답변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남녀 관계에서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떠올라 다시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한다. <인어공주>의 아름답지만 허무하고 비극적인 결말,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적이지만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겨울날의 거리 풍경. 이처럼 안데르센의 작품은 단순하고 명백한 교훈을 주기보다는 달콤한 사탕 궁전의 문틈으로 어른 세계의 비의(秘儀)를 살짝 엿보는 듯한 짜릿한 비애감을 선사하는 동화들이다.

<겨울왕국>에 영감을 준 <눈의 여왕>의 내용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의미가 새록새록해지는 작품 중 하나다. 무엇이든 실제보다 흉측하게 보이도록 하는 거울이 있었다. 트롤들이 천사들을 놀려주겠다며 그것을 들고 올라가다 깨뜨리는 바람에 그 파편들이 사람들의 심장과 눈에 박히게 된다. 게르다의 단짝 친구 카이의 눈과 심장에도 그 파편이 박히게 되고 그는 갑자기 싸늘해진다. 게르다는 다정했던 친구에게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둘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어느 날 카이는 눈의 여왕을 만나 그녀를 따라 얼음궁전에서 살게 된다. 게르다는 카이를 찾아 멀고 험한 길을 떠나 둘은 재회한다. 카이의 모습을 보며 흘린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을 녹인다. 카이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궁전을 탈출해 행복하게 잘 산다. 안데르센의 다른 동화들이 행복한 판타지 끝에 자주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지만 이 동화는 슬픔이 배가되어 가다가 행복한 결말에 이르게 되는 구성을 취한다. 또 대부분의 환상 동화들이 주인공이나 대상의 가시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이 동화는 인물의 심리적 변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리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른이 될수록 동화 속 ‘유리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심장에 유리 조각이 박힌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나의 가슴속에 또 다른 유리 조각을 만들어내는 것을 겪어보지 않고서 우리는 어른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유리 조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주고받는다.

<겨울왕국>은 <눈의 여왕>의 매력적인 설정을 자매 공주 이야기로 전환하면서 건강하고 활기찬 이야기로 변형시켰고 아기자기한 재미와 함께 시청각적으로 훨씬 더 풍성한 경험을 선사한다. 아렌델 왕국의 두 공주인 안나와 엘사는 특별한 신분 때문에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엘사가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에 안나가 크게 다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왕과 왕비는 엘사에게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평범하게 ‘격리되어’ 살 것을 당부한다. 그 이후 엘사의 방문은 굳게 닫히고 안나는 언니를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낸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뒤 엘사의 여왕 즉위식이 거행되고 안나는 무엇보다도 열린 성문에 환호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았고, 엘사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엘사는 산속으로 도망쳐 더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하지만 엘사 때문에 얼어붙고 만 아렌델 왕국은 큰 혼란에 빠진다.

자기 성찰적이 된 동화

안데르센의 ‘깨진 거울’이 엘사에게는 ‘비범한 능력’으로 바뀌었다. 사실 엘사는 정확하게 카이라기보다 카이와 눈의 여왕을 결합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왜 ‘눈의 여왕’은 눈의 여왕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왜 카이를 데려갔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다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9.11 테러’ 이후 모든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들이 회귀한 지점과 동일하다. 비범한 능력의 결과에 대해서는 고민하되 그 능력이 왜 자신에게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반성적이지 않았던 미국의 슈퍼히어로들은 자신들이 쏘아댄 미사일에 대한 답례로 비행기가 맨해튼의 초고층 빌딩을 관통하자 불현듯 회의하게 되었다. “나의 위대함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나의 특별함의 기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악인가? 선인가?” 그리고 그 먼 길을 돌아 능력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 강국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였던 미국의 무기상이 팔았던 그것들이 자신의 심장에 유리 파편을 박아넣게된 이후에야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은 선악의 경계가 얼마나 자의적인지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엘사는 차갑고 폐쇄적이다. 안나는 그것이 언니들 특유의 냉랭함인지- 안나에게 접근한 왕자 한스는 그것을 열두명이나 되는 자기 형들의 따돌림과 같은 것으로 치부했었다- 자신의 언니에게만 있는 문제인지 그 여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엘사는 자신이 가진 어떤 특별함을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칠 영향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주의를 받았다. 엘사가 가진 능력은 판타지이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은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성격이나 성적 지향 혹은 아직 완벽하게 개발되지 않은 재능까지도 거기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에 대해 대체로 안정적인 상태를 지향한다. 통계적으로 성공하기 쉬운 성향이나 지향을 갖길 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아이가 덜 상처받고 자라길 바란다. 엘사의 부모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남들과 너무나도 다르고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 안에 들어 있는 미지의 힘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바람이 오히려 아이에게는 감옥이 되었다. 엘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죄책감을 품고 성장하게 되었다.

기술과 마찬가지로 재능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나치게 억제하도록 강제하는 태도는 잘못된 세계와 조우하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잘못된 세계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자아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이에게 긍정적인 세계가 열릴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디즈니 만화를 비롯해서 요즘 애니메이션이 가장 빈번하게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인어공주> <뮬란> <니모를 찾아서> <라푼젤> <몬스터 호텔> 그리고 심지어 석기시대를 다룬 <크루즈 패밀리>까지 부모는 아이들을 과보호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망을 필사적으로 뛰어넘는다. 특히 <겨울왕국>의 제작진이 만들었던 <라푼젤>에서 엄마의 과잉보호는 일종의 학대로 묘사된다. 마녀는 라푼젤을 이용하기 위해 엄마로 가장해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성 안에 가둬놓는다. 표면적으로 감금의 명분은 ‘세상은 너한테 너무 위험하다’지만 라푼젤의 마법을 통해 젊음을 유지하려는 목적을 차치하더라도 마녀의 진심은 ‘너 따위가 세상에서 사랑받거나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이다. 마녀의 태도와 논리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자신의 양육 태도를 떠올렸을 사람도 꽤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호망을 거두게 하기 위해서 자식은 무엇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어내든,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기든, 선견지명을 가진 누군가를 알아보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능력과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단시일에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울왕국>은 이와 같은 서사적 콤플렉스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엘사와 안나의 부모를 일찌감치 죽여버림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부모라는 존재에게서 해방시켰다. 대신 ‘자매’가 그 자리에 들어선다. 하지만 ‘자매’란 수직적이기라보다는 수평 혹은 사선과 같은 관계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 서열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경사각은 둘 사이의 유대감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엘사는 안나를 자신이 보호해야만 하는 아기 동생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부모와의 사이에 있었던 약속마저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언니, 나와 같이 눈사람 만들래?”라고 노래를 부르던 아기 안나는 자라서 소녀가 되었고 소녀는 다시 여자가 되었다. 그동안 엘사는 문을 닫고 있느라 자신의 동생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전혀 보지 못했다.

멋진 뮤지컬 넘버들로 빛난다

<겨울왕국>에서 ‘문’(門)은 중요한 모티브다. ‘문’을 열고 닫음은 소녀들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렌델 왕국의 흥망과도 직결되어 있다. 엘사가 방문을 걸어 닫게 된 이후 성문도 굳게 닫혔으며 안나 역시 바깥 세계와 접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나는 성 밖 세계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안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긴장감을 호감으로 착각하고 그 호감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엘사가 스스로 방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자기부정을 통해 성장을 멈추었다면 안나는 일종의 감금 상태를 거치면서 자아 이상에 왜곡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엘사가 세상 어떤 것과도 유리되어야 하는 자신 때문에 괴로웠다면 안나는 세상 그 무엇과도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엘사의 즉위식 때문에 성문을 열게 된 첫날 안나는 타자와 사랑에 빠지고 엘사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확인하게 된다. 그림이나 거울 속의 자아가 아닌 타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나 장갑으로 꽁꽁 숨겨왔던 자기 능력의 극한을 맛보는 것. 얼핏 보기엔 전혀 다른 것 같아 보이는 이 행위들이 결국 자아의 ‘성장’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향한 발판이 된다. 또 이 소녀들의 성장 과정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성문은 타국과의 교역을 통해 성취되는 아렌델 왕국의 번영과 유비를 이룬다. 아렌델 왕국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왕국과의 관계 안에서 위기를 맞기도 하고 자긍심을 회복하기도 한다.

<백설공주> <피노키오>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이 고전 동화들에 살아 움직이는 숨결을 불어넣었던 디즈니는 <환타지아>처럼 마니아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한동안은 만화영화의 역사에 기록된 화석처럼 시대착오적인 작품들에 머물기도 했었다. 안데르센의 슬픈 동화를 매력적인 뮤지컬 선율과 능동적인 여성주인공을 내세워 재해석한 <인어공주>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전까지 말이다. <뮬란>에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 이르는 동안 여성주인공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해석마저도 상투적인 코드가 되어버렸다. <겨울왕국>은 단순히 한 인물의 입지전적인 성장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자아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이 도달했던 지점에서 한 차원 도약하고 있다. 지난해 전미의 온갖 비평가상을 휩쓸다시피한 <겨울왕국>에 대한 열광은 아마도 거기에 기인하고 있을 듯싶다. 또 <라이온 킹> 이후 한동안 귀에 남는 주제가를 들려주지 못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에 비해 <겨울왕국>은 <Let It Go>를 비롯해 바로 브로드웨이 무대 위에 올려도 될 만큼 멋진 뮤지컬 넘버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여타의 3D애니메이션들이 롤러코스터 같은 화면을 만드느라 소홀했던 애니메이션의 본분에도 충실하다. 현실에서 결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시각적 구현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어른들이 참고 버티며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니다. 자매간의 묘한 신경전과 그렇게 으르렁대면서도 결국은 부둥켜안게 되는, 아렌델 왕국이 자리하고 있는 깊고 험준한 협곡보다 더 깊고 심오한 인간의 마음을 알아야만 더 흥미로워지는 그런 영화이기 때문이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
<라푼젤>

디즈니 월드의 공주님들은 어떻게 성장해왔는가

디즈니 스토어의 한쪽 벽면은 늘 공주 아이템들이 장식하고 있다. 바비 인형 사이즈의 공주 인형들부터 베이비 버전의 공주 인형들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가 공주로 변신할 수 있는 코스튬까지. 디즈니 만화 주인공들의 출신성분을 따져보면 여자의 경우 압도적으로 ‘공주’가 많다.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남자주인공들은 짐승보다(?)도 못하다. 디즈니가 운영하고 있는 ‘Disneyprincess’ 사이트를 들어가보면 그들은 ‘포카혼타스’나 ‘뮬란’과 같이 공주와 거리가 먼 캐릭터들까지 공주 타이틀을 부여하고 있다. 어쩌면 디즈니에게 공주란 자사 애니메이션의 여성주인공(heroine)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초기 디즈니 만화의 ‘공주님’들은 현모양처상, 즉 ‘숙녀’(lady)에 가까웠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는 말할 것도 없고 공주는 아니었지만 웬디마저도 ‘엄마’ 같은 여자들이었다. 신데렐라는 계모와 두 언니를, 백설공주는 무려 일곱이나 되는 난쟁이를 돌보는 살림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보살피는 데 능숙하지만 자신을 주장하는 데는 서툴렀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선 공주님들뿐 아니라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 필수였다. 공주님은 예쁜 비주얼을, 동물친구들은 유머와 귀여움을 맡았다.

<인어공주>의 에이리얼은 완전히 색다른 공주님이었다. 공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우아함이랑은 담을 쌓은 것은 물론이고 못 말리는 호기심 때문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 특히 그녀는 공주의 트레이드 마크인 금발 머리에서 벗어나 말괄량이의 상징인 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린 최초의 디즈니 공주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멋진 왕자님과 강력한 아버지라는 남성의 조력이 있어야만 ‘사랑과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나름의 한계를 가진 캐릭터였다. <미녀와 야수>에서 발명가 아버지를 둔 벨은 책을 사랑하는 매우 지적인 브루넷(brunette)이었다. 그녀의 태생은 공주가 아니지만 야수 왕자와 결혼을 통해 로열 패밀리에 합류한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는 왕궁의 갑갑함을 피해 서민 복장으로 잠행을 하는 왈가닥 공주였다. 디즈니는 원작에서는 서민의 딸이었던 <라푼젤>마저 공주로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공주였지만 매번 그 모험은 행복한 결혼이라는 매우 가부장적인 결말로 귀결되고 말았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 와서야 결혼에서 탈피하고 싶은 와일드한 공주의 욕망이 가족과 조화롭게 조정되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혼이 선택이 되고 웨딩드레스가 행복한 삶을 환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인지 모르겠다. <겨울왕국>의 두 공주는 외형적으로는 금발 머리로 돌아갔지만 서사적 차원에서는 가장 자유로운 결말을 향유하고 있다. 결혼은 행복한 결말을 위한 필수적 고려 대상이 아닐뿐더러 사랑을 ‘운명’으로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바보가 된다. 사랑은 단 한번의 눈길로 간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깨우쳐가는 것이며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가 가장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성간의 사랑뿐 아니라 가족간의 경우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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