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이 1천만 관객에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쫓다’ 란 <삼국지연의>의 일화가 떠올랐다. 제갈공명이 죽자마자 쳐들어온 사마중달이, 죽기 전 공명이 미리 만들어놓은 그의 목각인형을 보고 기겁을 해 도망갔다는 얘기다. 무릇 이 엄혹한 시대에는 영화가 전쟁을 치르는 목각인형이구나 싶어 ‘고맙다 너 영화여!’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영화의 주인공 노무현은 인권 변호사 시절과 주류 정치인일 때의 평가가 상당히 엇갈린다. 심지어 영화계에서도 한-미 FTA 체결을 위해 스크린쿼터 축소를 무리하게 실행했던 대통령 노무현을 얼마나 비난했던가? <변호인2>가 나올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그의 나머지 후반전 삶이 다시 한번 예리한 칼에 의해 목각인형으로 깎였을 때, 우린 뜨거운 가슴만으론 모자랐던 현실적 한계를 직시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번 <변호인>의 열렬한 호응을 통해 한국 영화계에도 그간 등한시되었던 근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전기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외국영화엔 정치인들의 삶을 다룬 <간디> <닉슨> <프로스트 VS 닉슨> <JFK> <말콤X> <철의 여인> <링컨> <마이클 콜린스> <마지막 황제>부터 <알리> <도어즈> <레이> <뷰티풀 마인드> <샤인> <아마데우스> <에비에이터> <머니볼> 같은 명망가들, 그리고 <에드우드> <래리 플린트> <이디 아민> 같은 문제적 인물들의 전기영화까지 수두룩하다. 최근엔 죽은 지 몇년 안 된 스티브 잡스를 영화화했고, 버젓이 살아 있는 페이스북 창립자까지 <소셜 네트워크>로 만들었다. 한국영화가 근현대사 인물들에 소흘한 이유는 성공한 이들의 대필 자서전류가 대부분인 한국의 빈약한 전기문학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아울러 근현대사의 정치적 갈등을 피하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하나 이번의 교학사 교과서 파동이 보여주듯 과거를 바꿔 미래를 소유하려는 권력에 의해 역사는 언제나 왜곡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침략에 맞서는 죽은 공명의 ’목각인형‘이 되어야 한다.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나온 이래 20여년 만에 <변호인>은 전기영화의 큰 힘과 가치를 보여주었다. 앞으로 <김구> <유관순> <장준하> <김대중> <문익환> 같은 전기영화가 계속 나와야 한다. <이승만> <박정희>도 나와야 한다. 한국영화가 근현대사의 거인들과 만나 그들의 공과 사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인간의 내밀한 진경(眞景)을 가감 없이 보여줄 때, 관객은 한국영화가 올바른 역사와 인간의 가치를 수호하는 진정한 ‘변호인’임을 깨닫고 박수치며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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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열풍으로 전기영화 제작이 활성화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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