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세 영화는 국적이 다 달랐다.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을 필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이란 출신의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이 만든 프랑스어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이 세 영화 모두 아버지가 등장한다. <변호인>의 아버지는 낯익다. 상고 출신의 가난한 고시생 송우석은 변호사로 성공한 뒤 정치적으로 각성된 인권 변호사가 된다. 아버지로서의 송우석의 모습은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인생 행로는 해방 이후 변천해온 전형적 아버지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지상 명제였던 전후의 아버지들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향유하는 개발독재 시대의 아버지들로 대체되었다가 80년대를 지나면서 윤리적 각성을 경험한 새로운 아버지들로 모습을 바꾼다.
식당 밥값이나 떼어먹던 가난뱅이가 유능한 아버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은 아파트의 매입이다. 그 시절의 이상적인 아버지란 아파트를 지은 노동자가 아닌 남이 지어놓은 아파트를 현찰로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자라는 것을 영화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파트를 가족에게 ‘선물’해 떳떳해진 아버지는 이제 무능하던 시절의 부채를 갚고 잃어버렸던 도덕적 자아를 되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영화는 바로 이 대목, 도덕적 아버지의 탄생에서 멈춘다.
그러나 영화적 시간이 멈춘 뒤에도 세상은 변해갔다. 도덕적 아버지들은 두번의 커다란 시련을 겪으며 무너진다. 1997년과 2008년의 경제 위기가 그들에게 현실의 냉혹함을 일깨운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도 그들의 윤리 감각을 흔들어놓는다. 이제 그들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으며 부자 아빠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이조차도 여의치 않다. 부자는커녕 아빠도 되기 힘든 판국이다. 겨우 장만한 빚더미 아파트에는 자기 자리조차 없다. 유능하면서도 도덕적인 아버지가 되겠다는 웅대한 포부 따위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에 ‘친밀한 아버지’라는 매력적인 환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TV가 가장 먼저 그들을 호명한다. ‘아빠, 어디 가’냐고. 함께 캠핑을 떠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대화하는 아버지, 성공에만 쏟았던 시간을 아이에게 돌릴 줄 아는 자상한 아버지가 요구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버지는 유능한 아버지가 도덕적인 아버지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친밀한 아버지로 변모한다는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두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유능하되 냉정한 아버지쪽에 맞춰져 있다. 그의 대척점에는 시골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무능하되 친밀한 아버지가 있다. 잘생기고 유능한 ‘부자 아빠’는 도쿄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 같은 거창한 일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도심의 전망 좋은 고층아파트에 산다. 영화에서 주어진 정보들로 짐작해보건대 그는 아마도 송우석처럼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그 아파트를 샀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기를 안 닮은 것만 같던 어린 아들이 남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는 사건, 즉, 아이를 남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자기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비록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어도 좋은 아버지였다고 자부합니다”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전파상 주인은 일갈한다. “무슨 소리야? 아이에겐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치밀하고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버지상은 별로 현실감 없이, 다소 성급한 윤리적 선언처럼 다가온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도시/시골, 외둥이/다둥이, 전업주부/워킹맘, 유능/무능, 냉정/친밀의 이항대립항들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항대립은 문제를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편리한 장치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은 이항대립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현대의 가족들은 전선이 분명하게 그어진 정규전이 아니라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시가전을 치르고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아버지는 유능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친밀하지도 않다. 게다가 그는 아예 가족의 경계 밖으로 추방되어 있는 상태다. 한때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았던 전처와 아이들(그나마도 그의 친자가 아니다)은 선진국 프랑스에 살고 그는 전근대 사회인 이란에 돌아가 있다. 그의 출현은 유사 균형 상태의 가족을 본의 아니게 혼란에 빠뜨린다. 일단 어디에서 잘 것인지부터가 애매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문자에 불과한 것이다. 기껏 시작한 십대 딸과의 대화는 가족이 애써 감춰왔던 민감한 비밀을 폭로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억눌렀던 갈등들이 이를 틈타 폭발한다.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은 오직 어머니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연결되는데, 이 어머니는 최소한 다섯 차례나 남자를 갈아치운 데다가 지금은 세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과거 아버지들이 도맡았던 양육과 보호의 의무를 국가가 대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분명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국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결혼/사실혼/비혼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급되는 충분한 출산/양육 수당과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그 밑천이다. 저출산으로 고민하던 프랑스 사회가 내린 현실적 결정이었고 이에 따라 가족의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의 필요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프랑스나 일부 유럽 국가들에는 일종의 신모계사회가 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남과 이별이 쉬워지고 출산에 대한 인센티브는 커지면서 가장 확실한 연결인 모계를 중심으로 가족이 구성된다. 간혹 남자들이 깃들지만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미래는 이미 도착해 있다.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배분되었을 뿐.” 그의 말대로 어떤 미래는 이미 실리콘 밸리에 도착해 있다. 거기서는 구글이 제작한 무인자동차가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어떤 미래는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가 타려는 버스가 몇분 뒤에 정류장에 도착할지를 미리 아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면에서만 본다면 서울이 뉴욕의 미래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가족의 미래는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자수성가한 상고 출신의 변호사가 자기가 지은 아파트를 현찰로 사는 고성장 시대가 다시 돌아올까? 아닐 것이다. 친밀감까지 장착한 성숙한 ‘부자 아빠’가 미래일까? 환상적이지만 현실성은 적어 보인다. 그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결합에서 탄생한 구성원들이 닥쳐오는 갖가지 윤리적 딜레마를 힘겹게 풀어가면서 살아가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속 가족의 모습이 아마 우리가 미구에 경험하게 될 가족상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느슨하고 어지러운 가족 관계에서는 주인공 아마드와 같은 태도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는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되 누구의 말이든 주의 깊게 듣고 보편적 윤리에 호소한다. 네가 딸이니까 이래야 한다, 당신이 엄마니까 이래야 한다는 당위의 언어는 함부로 동원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구성원에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을 조심스럽게 요구한다. 가족과 타인을 가르는 기준이 급속히 희미해지는 시대, 그런 아버지가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