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1천만명을 넘은 흥행영화 <변호인>에서 곽도원은 썩은 애국심과 신념에 눈이 먼 악랄한 고문 경찰관 차동영을 맡았다. 그의 말처럼 <변호인>은 “동물 같은 감각을 지닌” 주연배우 송강호의 힘이 큰 영화였으나 중요한 순간에 맞서 버티는 곽도원도 훌륭한 조역이었다. 지독한 악역을 연기하고도 관객에게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칭찬받는 악당이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나쁜 짓도 없었는데 그냥 한눈에 악당처럼 보였던 <황해>의 김승현 교수, 범죄를 소탕하는 검사인데도 오히려 깡패보다 더 깡패처럼 보였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의 조 검사. 그에 비견할 만한 또 하나의 곽도원식 악역이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검사, 고위급 경찰관 등 권력 지향적 인물들을 꽤 많이 맡는다.
=원래 그런 인물들은 좀 매끈하고 그렇지 않나. 그런데 나는 좀 예외 아닌가. 현실적으로 생겨버린 내 체형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를 선택한다는 건 ‘안전빵’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범죄와의 전쟁>에서 그런 역할을 했었으니까. 내가 일단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 감독님들이 내 체형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 제안을 하는 것 같다. 먹고살려니 함부로 뺄 수도 없고, 나 참. 지금 촬영 중인 <타짜2: 신의 손>(가제, 이하 <타짜2>)에서도 이 체형을 계속 유지해달라고 할 정도다. <타짜2> 끝나고 나면 살을 빼서 다른 역할도 좀 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 덕분에 당대의 주목받는 악역 배우가 됐다.
=내가 했던 역할들이 다 악역… 인지… 는 잘 모르겠다. <황해>에서는 하정우에게 돈까지 쥐어주고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죽지 않나. (웃음)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다 깡패고 나만 법조인인데 나보고만 자꾸 나쁜 놈이라고 하고…. <변호인>의 차동영 경감은… 이건 뭐 부정 못하겠네. 송강호라는 국보급 배우가 있어서 열심히 리액션하다 보니 관객이 저놈 나쁘다며 좋아해 주신 것 아닐까. 앞으로는 좀 좋은 이미지로도 먹고살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 힘들 때도 있다. 남에게 못되게 굴거나 폭력을 가하는 역할을 연기하면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캐릭터들이 한눈에도 강압적인 데다 악랄해 보여서 악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와의 전쟁>의 조 검사와 <변호인>의 차 경감은 어떻게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법 테두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의 상징이 <범죄와의 전쟁>의 조 검사였다면, <변호인>의 차동영은 자기 자신이 법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한 단계 더 위인 거다. 인간의 존엄이나 법 자체와는 상관없이 잘못된 사명감으로 자기 스스로 법이 된 경우다.
-<변호인>의 어떤 장면을 찍을 때 가장 짜릿했나.
=4차 공판에서 차동영의 신념과 송우석(송강호)의 신념이 부딪치는 장면이다. “입 닥쳐, 이 빨갱이 새끼야!” 하는 장면. 그때 보면 송우석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지만 실은 차동영도 눈물을 품고 있다. 그때 멱살을 잡으면 어떨까도 생각했다. 내가 증인석에서 일어나며 의자가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되면 강렬함이 더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물리적인 움직임이나 폭력적인 행동보다도 그렇게 마주 서서 대치하여 그들 생각의 대립을 보여주는 쪽으로 간 거다.
곽도원의 말 속에는 성취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악인 캐릭터를 얼마간 더 밀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매너리즘과 싸워야 한다는 숙제가 남는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성취는 성취이되 새로운 인물형과의 접속도 필요하겠다는 마음이 없을 리 없다. 분량은 매우 적지만 그 실마리가 바로 <남자가 사랑할 때>의 영일 역이다. 곽도원이 맡은 영일은 주인공 태일(황정민)의 형이자 동네 이발사인데, 무심하고 얄미운 것 같다가도 정이 넘치는 희극적인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지금까지 영화에서 주로 누군가를 협박하고 욕하고 무시하던 곽도원이 덩치에 맞지 않게 동생 태일에게 어설픈 뭇매를 맞거나 아내(김혜은)에게 아양을 떠는 장면을 연기할 때, 관객이 다들 좋아하며 웃었다는 점이다.
-연극을 할 당시에는 어떤 역할들을 했나.
=그때는 거의 희극 연기를 했다. 약장수, 극단 단장, 변사 같은. 80% 이상이 희극 연기였다. 영화 하면서 바뀐 거다.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는 그런 희극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은 영일 캐릭터 제안이 들어왔을 때 처음엔 고사했다. 이상하게 민폐를 끼칠 것 같더라. 그래서 그보다는 태일의 친구 두철을 하겠다고 했다(두철은 고리대금업자이며 태일의 친구이자 직속 상관이며 동네 깡패다. 완성된 영화에서는 정만식이 연기한다). 그런데 <신세계> 쫑파티 놀러 갔다가 (황)정민이 형을 만났는데 나보고 그러더라. “너 두철이 하기로 했다며?” “예” 그랬더니 내 손을 쓰윽 잡고 이렇게 말하더라. “네 얼굴을 한번 봐라. 너 언제든지 나쁜 역할 할 수 있어 임마! 이제 착한 역할도 하고 이미지도 바꾸고 그래야지.” 그래서 용기를 내 영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냥 두철을 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
=지금보다 더 거대한 조직의 깡패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만식이가 정말 잘했다. 동네 양아치들 수준을 넘치지 않게 정말 잘 연기했다.
-그럼 영일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나.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내내 생각했다. 영화 속 태일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부모님들 살아 계실 때 내가 사고 정말 많이 치고 다녔다. 영화에 보면 태일하고 싸우고 난 뒤에 영일이 소파에서 뒹굴며 하는 말 있지 않나. “아, 나, 힘들어 못살겠다, 진짜!” 내가 사고치고 다닐 때 아버지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 현장에서 갑자기 그걸 해본건데 오케이된 거다.
-영화에서 아내에게 약 발라달라고 칭얼대는 장면은 사람들이 가장 크게 웃은 장면 중 하나다.
=그 장면은 대부분 애드리브였다. (웃음) <범죄와의 전쟁> 할 때 나도 혜은이도 지금은 완전히 뜬 성균이도 비중 있는 역할은 다 처음이었다. 셋이 모여 정말 많이 얘기하고 위로했다. 그래서 혜은이하고는 호흡이 잘 맞는 편이다.
-본격적인 희극 연기를 해보니 어떻던가. 앞으로는 어떨 것 같나.
=변하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이발사 옷을 입으니 또 이발사가 되더라. 인물에 따라서 맞으면 맞아지고 때리면 때려지고, 그런 것 같다. 그냥 되어진다, 고 해야 하나. 그걸 믿고 계속 가야겠다.
곽도원의 차기작은 <타짜2>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빌린 돈은 받아낸다”는 악인이다. 그렇게 이발사는 다시 옷을 벗고 범죄가 들끓는 화투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공공의 적과 정겨운 소시민을 번갈아 하면서 관객의 민심을 여러 방면으로 자극해내는 곽도원의 현재에 관하여, 다소 예스런 그의 이름의 어감을 충동적으로 빌려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곽도원의 난(亂)’이다. 원래 난 중에는 환란이 아니라 어떻게든 민심을 건드리고 반영하고 끌어당기는 난들이 많았으니 <변호인>의 악인이건 <남자가 사랑할 때>의 소시민이건 어떻게든 민심의 기초를 흔드는 곽도원의 난도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그 난은 종국에 성공에 이를 것인가. 물론이지만, 완전한 왕국의 주인공이 되거나 공신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스스로의 행보일 것이다.
magic hour
반말 연기의 달인
곽도원의 악역 연기를 주목하게 한 세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보자. <황해>. 김승현 교수는 한밤중에 자기 빌딩을 어슬렁거리는 자(하정우)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사우나라도 가서 자라고 한다. <범죄와의 전쟁>. 조 검사는 최익현(최민식)과 화장실에서 만나자 방금 전까지 허허 웃던 인상을 고쳐 잡고 험악하게 일장 훈계한다. <변호인>. 차동영은 자기 사무실에 숨어 들어온 송우석을 엎어치기하며 누구냐고 묻는다. 저들은 저 장면에서 특별히 더 악랄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린 곽도원이 연기한 그들이 그 순간 나쁘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기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김승현도, 조 검사도, 차동영도 전부 반말을 한다. 존댓말로 말해야 할 사이인데도 반말을 하는 이들을 묘사할 때, 곽도원은 그 어투를 징그러울 정도로 얄밉게 그려내 그 인물의 성격으로 살려낸다. 그게 그 인물들이 악하게 보이는 이유의 몇할은 될 것이다. 이른바 재수 없는 반말 연기의 일인자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