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1월엔 역시 실존주의
2014-02-06
글 : 김혜리

산부인과에서 바뀐 아이를 6년 동안 양육해온 두 가정이 처음으로 친자(親子)와 보내는 주말의 시작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주 간결하게 연출했다. 키운 아들 케이타를 태우고 유다이 가족의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의 롱숏은 상대방 집에 친아들 류세이를 태우고 귀가하는 숏과 정확한 대칭을 이룬다. 매우 감정적인 영화의 분기점을 똑같은 거리에서 동일한 구도에 못 박혀 바라봄으로써 영화는 이 고역을 더 쉽게 만드는 방법 따위는 없으며 고스란히 견딜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내용을 정확히 요약한다. 아버지란 그냥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라 노력해서 ‘되어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는 그러기까지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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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이 부러져 입원했다. “발가락을 움직여볼래요?” 수술 뒤 첫 회진에서 담당의사 선생님이 던진 말씀에 <킬 빌>의 브라이드(우마 서먼)에 동일시해보려고도 했으나, 내 한심한 부상에는 영화적 요소가 약에 쓰려도 없다. 요철 하나 없는 마룻바닥에서 지레 넘어져 내 체중으로 발목을 분질렀으니 말 다 했다. 링거 주머니들이 대롱거리는 스탠드가 졸지에 나만의 못생긴 크리스마스트리가 됐고, 또박또박 방울져내리는 약물이 모래시계 노릇을 맡았다. 겨울 병동의 하루는 동이 트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아침밥으로 시작해 밤 10시 즈음 소등으로 일찌감치 저물어버린다. 합숙도 이른 취침도 어색한 나는 침대를 살살 빠져나와 모두 퇴근한 1층 외래 진료실 복도로 숨을 쉬러 나온다. 경미한 광장공포증과 경미한 폐소공포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원무과 앞 넓은 유리창으로는 연말연시답게 불빛 왁자한 거리가 그대로 내다보인다. 발에 힘주어 땅을 디딜 수 없는 처지로 고요한 암흑에 몸을 담근 채 구경하는, 닿을 수 없는 휘황한 거리는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지구 같다. 그리고 극악한 광장공포증과 극도의 폐소공포증의 이중고 속을 유영한 영화 <그래비티>로 다시 생각을 데려간다.

웃자고 하는 소리인데 <그래비티>의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 제일 닮은 캐릭터는 <토이 스토리>의 뺀질이 우주비행사 버즈 라이트이어다. 진지한 의견인데,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과 비슷한 다른 영화 속 인물은 <밀양>의 신애(전도연)다. 그녀들에겐 죽어야 할 이유는 명백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희미하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어린 딸의 사고사 소식을 접한 날부터 사실상 라이언은 계속 그저 ‘운전’만 해왔다. 우주 미아가 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진공 속을 유영했다. 그러나 신애와 달리 라이언은 캐릭터의 모든 면이 주제의식의 은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캐릭터다.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그녀는 휴스턴과 교신 장애를 겪고, 자신을 감싸고 격리시키던 헬멧과 우주복을 벗어야 하며 종국에는 말 그대로 대지를 자기 발로 디뎌야 한다. 상대역인 맷 캐릭터 역시 사실적인 인물이라기엔 지나치게 유유하며 서사가 필요로 하는 기능만 맞춤하게 완수하는 일종의 기계신이다. 모든 모티브는 굵은 고딕체로 우리의 눈앞에 디밀어진다. 어쩌면 <그래비티>는 “기술적으로 훌륭하지만 이야기가 앙상하다”라는 저널리즘 비평의 닳고 닳은 관용구가 딱 들어맞는, 가장 고급스런 사례다.

<그래비티>의 참신할 것 없는 치유의 서사 구조와 노골적인 메시지 전달법은 일부 관객이 이 영화를 잘 만든 장르물 정도로 평가하게 유도한 굵직한 근거일 터다. 그러나 샌드라 불 럭의 3D 눈물방울이 객석을 향해 떠오르는, 민망할 정도로 감상적인 숏에서 나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도 다 알고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짐작건대 그는 주제를 더 풍부한 드라마로 형상화하려다가 목표에 미달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일상적 현실의 세부를 다 지우고 내면과 정확히 일치하는 환경에 던져진 인간을 그리고자 한 게 아닐까(게다가 전작들에서 드러난 쿠아론은 인간적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데에 결코 취약한 연출자도 아니다). 만약 영화 전체를 치밀한 은유로 완성하는 것이 상위 목표라면 연출의 초점은 당연히 드라마의 뉘앙스가 아니라 “보이는 A는 곧 보이지 않는 B이다”라는 은유법의 구조에서, 눈에 보이는 항인 A- 우주- 를 최대한 치밀하게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일 테고 쿠아론의 팀은 그것을 완수했다. 물론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보여준 황홀한 활공의 감각이라든가 <칠드런 오브 맨>에서 CG의 도움을 입어 마술적으로 완성한 자동차 총격전 장면에서 보여준, 숏의 연장과 확장 능력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성취는 말할 나위도 없는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그래비티>는 은근한 뉘앙스고 뭐고 신경쓰지 않고 얼굴도 붉히지 않은 채 영화 제목을 반복하며 우리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기어코 지상에, 삶에 발붙이게 하는 ‘그래비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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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주라는 환경이 어떠하기에? 모든 관객이 즉각 실감하듯 <그래비티>가 우주를 ‘캐스팅’- 혹은 헌팅- 한 이유는 흔히 보아온 우주 배경 영화와 다르다. 전쟁액션영화의 변형이건 스페이스 오페라건 거치적거리는 현실을 깔끔히 철거한 광활한 모험의 무대로 우주를 불러들였다면 <그래비티>의 우주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특별히 비극을 겪거나 불운하지 않아도 인간이기에 지고 살아가는 실존적인 고통을 시각화해서 체험하게 한다. 상이한 법칙으로 작동하는 중력, 산소의 밀도. 언제나 우리의 발목을 끌어당기고 호흡을 가쁘게 했지만 체감하지 못했던 힘들이 보이고 느껴진다. 지구상에서는 그냥 넋을 놓아도 살아지던 삶은, 우주에 이르러서는 버티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가질 것인지 놓아버릴 것인지 준열히 묻는다. 이 대목에서 <그래비티>는 <우주전쟁> 이후 재난영화의 잠재적 경향과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영웅의 과제는 점점 정복이나 승리보다 인내와 생존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그래비티>의 액션은 전투와는 거리가 멀다. 제때에 나사를 풀고 해치를 열고 어디선가 발생한 폭발의 잔해를 피하는 소극적 액션이다. 악당은 고사하고 재앙의 근원에 누군가의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관에 앉아 있는 우리의 인식 또한 그렇다. 세상은 잘못되어가는 것이 확실한데 어디가 고장났는지는 지목할 수 없고 재앙의 근원은 정치적으로 투명하지 않은 ‘전문적’ 논의 속에 영구미제(永久未濟)의 영역으로 휘발되기 일쑤다. 현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최선의 범위는 피하고, 견디고, 살아남아야만 할 이유를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에게 수시로 환기시키는 정도가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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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침대에서 빈대떡 부치듯 몸을 뒤집다가 돌연 울적해졌다. <그래비티>가 언제 적 영화인데 아직도 <그래비티> 이야기를 끼적이고 있구나. 얼마 뒤에 다시 영화관에 갈 수 있을까 답답해하다가 막대한 데이터 요금을 불사하고 (병동에서는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2014년 신작 검색 미로에 빠졌다. 한국영화는 이미 선포된 대로 사극의 전국 시대고 임권택, 류승완 감독의 신작과 부지영 감독의 <카트>도 기대되는 기획이다. 해외 영화 매체들의 2013년 베스트 목록을 훑어보니 외화는 2013년에 제작된 많은 예술영화의 한국 개봉이 지체되는 바람에 상반기부터 화제작이 즐비하다. 상대적으로 할리우드 주류 상업영화 라인업은 조금 심심하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2015년 라인업이 장관이다(취향에 따라서는 가관이라고 표현하리라).

<아바타2>와 <배트맨 vs 슈퍼맨> <도리를 찾아서>(<니모를 찾아서>의 속편) 개봉이 2016년으로 밀리긴 했지만 2015년은 작품 수와 이름값에 있어서 가히 프랜차이즈영화들의 올림픽을 방불케 한다. <어벤저스: 얼트론의 시대>와 <스타워즈 에피소드7>을 필두로 <헝거게임>의 최종편과 샘 멘데스 감독의 두 번째 007 영화 <본드24>, <미션 임파서블5> <분노의 질주7>이 이어달리고 시리즈 영화계의 조상 <터미네이터>와 <매드맥스>와 <쥬라기 공원>도 새 속편으로 부활을 도모한다. <판타스틱4>는 <크로니클>로 슈퍼히어로 서사를 참신하게 재해석한 조시 트랭크 감독을 업어와 리부트를 꾀하고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의 에드거 라이트 감독을 물어간 <앤트맨>이 처음 명함을 내민다. 현재 상업적으로 가장 막강한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의 펭귄>과 <슈퍼배드3>도 갈아놓은 밭에서 한 차례 더 수확을 노린다. 한편 라인업을 조정하고 몇몇 프로젝트 감독을 교체한 과도기의 픽사는 2014년을 이례적으로 개봉작 없이 지낸 다음, 2015년에 피트 닥터 감독(<몬스터 주식회사> <업>)의 <인사이드 아웃>으로 새로운 연대(年代)에 진입할 전망이다. 이 목록들은 재미있는 영화에 열광하는 동시에 영화가 미래에도 오랫동안 흥미롭기를 바라는 관객인 우리를 어쩔 수 없이 흥분시키는 동시에 권태롭게 한다. 한 가지는 꽤 분명해 보인다. 지난 10여년간 오리지널 서사를 외면하고 슈퍼히어로와 기존 브랜드 우려내기에 자산과 역량을 올인해온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행보가 절정을 이루는 2015년은 영화가 문화상품으로서 대중예술로서 미래를 판정받을 해가 될 법하다.

할리우드영화에서 속편 제작이 예외적 경우가 아니게 된 지는 꽤 오래됐다. 심지어 속편이 안 나오면 망한 기획으로 여기는 풍토도 감지된다. 이달 초순 소니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사이사이에 악당 캐릭터 베놈과 시니스터 식스가 주인공인 영화들을 끼워서 내놓겠다고 발표했을 때 언론 기사들의 헤드라인에 일제히 사용된 ‘어벤저스화’(Avengers-ize)라는 신조어는 이제 거대예산 블록버스터에서 문제는 단선적 시리즈화를 넘어 종횡 네트워크화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디즈니-마블의 <어벤저스>가 솔로로서 평타를 친 캡틴 아메리카나 헐크, 토르의 상품가치를 높이고 이미 성공을 구가한 아이언맨을 트리플A급 상표로 업그레이드한 여파가 크게 작용했을 터다. 덕분에 워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가담할지 말지 여부에 무관하게 잠정 은퇴한 배트맨은 물론 원더우먼 등도 두들겨 깨워 저스티스 리그를 소집할 예정이고, 지금까지 <엑스맨> 시리즈의 확장으로 울버린을 일곱 차례 연기한 휴 잭맨은 (계약하기 나름이겠지만) 딱하게도 앞으로 몇년을 더 손등에 칼날을 꽂고 다녀야 할지 기약이 없다. 루카스 필름으로부터 <스타워즈> 판권도 사들인 디즈니는 이미 8개월 전 “2015년부터 매년 1편의 ‘스타워즈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공시’했다. 여기에는 정규 속편은 물론 특출한 팬 아닌 일반 관객도 줄잡아 20명가량은 떠올릴 수 있는 <스타워즈> 캐릭터들의 외전이 포함된다. 자칫하면 제2의 디즈니랜드가 도래할 태세다. 나는 위에 나열한 현상에 관한 구구한 불평으로 예전에도 독자를 지겹게 했고 앞으로도 불가피한 계기가 있을 테지만, 실무적인 애로(隘路) 사항만 상상해봐도 남의 일이지만 골치가 아파온다. 이를테면 각 영화의 감독들은 출연하는 히어로들이 치명상을 입거나 죽는 플롯이 대두될 경우 차후 프랜차이즈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화상회의라도 개최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의장은 누가 맡지? 더이상 개별영화의 줄거리를 기억하거나 진지하게 신경쓰는 관객이 없다 해도 마니아들은 꾸준히 존재할 테니 히어로들의 능력치를 일관성 있게 관리하려면 연례 공문이라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스타들의 스케줄 조정은 얼마나 복잡해질까? 이러다가 스타들을 전속 관리했던 고전기 할리우드 시스템을 변형해 ‘슈퍼히어로 에이전시’ 같은 법인이 문을 여는 게 아닐까. 종일 누워 있자니 오지랖만 가지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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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선배, 후배의 도움으로 다리를 다친 뒤 처음으로 시사회에 다녀왔다. 망나니 금융인 조던 벨포트의 회고록에 기초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상상을 초월한 사기꾼의 전기라는 점에서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범죄 세계와 조직이 부여하는 소속감과 흥망성쇠의 감흥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기록했다는 면에서는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좋은 친구들>을 1차적으로 상기시킨다. 혹자는 잦은 파티 장면을 보고 디카프리오의 근작 <위대한 개츠비>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개츠비와 벨포트는 자기도취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는 남자이고 솔직히 <위대한 개츠비>의 연회는 조던 벨포트가 벌이는 난장판에 비교하면 계모임 수준이다. 하지만 왁자한 표피를 걷어내면 스코시즈 감독의 전작 중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더 진한 친족 유사성을 띤 영화는 편집광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 니로)이 주인공인 <코미디의 왕>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제대로 된 사회화에 실패한 개인의 비행(非行)과 역설적 결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정작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180분 쇼에 휘둘리다 비틀비틀 극장을 빠져나오는 내 머리에 마지막으로 달라붙는 영화는 엉뚱하게도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였다.

아마도 계기는 영화 막판 조던 벨포트의 강연에 몰려든 수많은 ‘세일즈 왕 워너비’들의 광신적인 눈빛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마스터>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현대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욕망을 까발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욕망을 정당화하는 가치체계의 뿌리를 주시하려는 야심을 공유한다. 단,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중에 어느 쪽 물건을 우선적으로 팔고 어느 쪽을 부수적으로 묻어놓는지의 위계가 반대다(어찌 보면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도덕적 정당화 체계가 서로 눌어붙어 유착되기 전의 풍경을 그리는 영화이기에 훨씬 선명하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최초의 솔깃한 대사는 “돈은 당신을 풍요롭게 살도록 해줄 뿐 아니라 더 좋은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돈이 있으면 기부도 하고 멸종위기의 동물도 살릴 수 있다”라는 조던 벨포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었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 할 뿐 아니라 그 욕망에 관해 찜찜하지 않길 바란다. 조던 벨포트와 그 동료들은 작정하고 짐승처럼 생활한 게 아니다. 그들의 난행 밑바닥에는 ‘과정이 어찌됐든’ 더 많이 돈을 벌고 유명해지면 그 성공이 곧 신이 선택한 자라는 표식이 될 수 있다는 (우리가 많은 미국 대중문화에서 접해온) 역사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독일 학자 한스 디터 겔페르트는 저서 <전형적인 미국인>에서 미국인 4명 중 1명이 주식에 투자하고 도박을 즐기며, 할리우드영화가 포커, 카드, 당구 등 다양한 도박꾼을 스스럼없이 동경할 만한 영웅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과정이 어찌됐든’이라는 위험한 단서를 어물쩡 넘기고, 내가 누리는 향락은 누군가로부터 박탈한 것이라는 셈법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인물들의 행동방식 역시 미국 특유의 양상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들은 부당이득을 취한다는 표현 대신 “고객의 주머니에서 내 주머니로 옮긴다”라고 말한다. 부와 자원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는 버릇이 든- 설령 고갈돼도 다시 개척할 땅은 경계 너머 무한하다고 믿는- 거대한 나라의 고밀도 대도시에서 숫자놀음으로 돈을 벌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미치는 사회적 여파는 희미할 것이고 낭비와 탐닉은 훨씬 덜 죄스러울 터다. 옆집에서 고성방가 풍기문란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한. 어쨌든 영화를 본 지 약 5시간 뒤 나는 미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아두는 편이 장차 학업에 유익할 거라고 잘난 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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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의 실존주의

“네 사상이 뭐냐”고 포악한 형사가 다그친다. 고문으로 곤죽이 된 <변호인>의 진우(임시완)는 마비된 머리를 굴려 답을 고심한다. 구타를 부르지 않는 답이 급선무지만 뼛속 깊이 모범생인 청년은 진심으로 끌렸던 철학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해내려 애쓴다. “실, 실존주의요?” 처음에는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생뚱맞은 대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약 한달 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엠마(레아 세이두)가 오해를 풀어주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는 얘기야. 어떻게 살기로 선택하는 의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지.” 진우는 그러니까 자기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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