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추격전은 마담 D가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즈)에게 상속한 16세기 거장 요하네스 반 호이틀의 작품 <사과를 든 소년>으로 말미암아 벌어진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을 받은 북유럽 화풍을 따르는 이 초상화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전체가 그렇듯 ‘정교하게 발명된 역사’다. 반 호이틀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은 감독의 작명이고 실제로는 영국 화가 마이클 테일러가 앤더슨의 구체적 의뢰를 받아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림을 완성했다. 극중에서 <사과를 든 소년>을 훔친 자리에 걸어두는 얼핏 에곤 실레의 실패작처럼 보이는 그림 역시 ‘실레풍’의 누드를 의뢰받은 현대 화가 리치 펠레그리노의 패러디 그림이다. 모르긴 해도 10년 안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팀 버튼에게 헌정한 것과 유사한 웨스 앤더슨 전시회가 열릴 거라는 예측에 내가 소장한 앤더슨 영화 DVD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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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W.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 마르셀 카르네의 <북호텔>,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다>,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나열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호텔이다. 내로라하는 명작들 외에도 무수한 영화가 호텔이라는 공간에 혹한 이유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방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호텔은 외국이면서도 그 나라의 현실과는 얼마간 단절되어 있는 중간지대다. 또한 자기완결적인 사회이기도 해서 장기 투숙이라도 하게 되면 세면도구의 교체주기부터 아침 뷔페식당에서 통용되는 규칙까지 시스템을 운영하는 법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호텔은 평소 만날 법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딪히는 축소된 도시이며, 종업원도 손님도 암묵적인 행실의 규범에 따라 연기하는 ‘극장’이다. 무엇보다 호텔은 영화가 즐겨 그리는 간통, 자살, 범죄를 위해 사람들이 집과 이웃을 떠나 찾아가는 장소다.
웨스 앤더슨이 창조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호텔과 가장 비슷한 호텔은 토마스만의 소설 <마의 산>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고산 휴양지에 자리한 <마의 산>의 호텔은 육체적, 정신적 의미로 가슴에 ‘병소’가 생겨 세속의 공공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귀족과 부유층의 도피처다. 웨스 앤더슨이 동유럽 가상국가 주브로스카에 건축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패망해가는 ‘귀족’의 세계다. 세련된 취향과 오래된 가치를 신봉하는 그들은 산업화와 전쟁, 파시즘으로 곧 멸종될 숙명이다. 그러고 보면 <로얄 테넌바움> 이후 웨스 앤더슨 영화에는 쇠락의 국면에 접어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한때 셀레브리티였던 탐험가가 그랬고 <로얄 테넌바움>의 천재 가족이 그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구스타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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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쌓이다보면 반복되는 이야기의 패턴과 인물형이 보인다. 더불어 매번 그가 회피하거나 완곡어법으로 처리하는 대목이 무엇인지도 눈에 들어온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연애와 이별, 죽음을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는 일이 드물다. 격렬한 감정적 사건들은 회고되거나 설화처럼 구전된다. 앤더슨의 가장 감상적인 영화에 해당하는 <로얄 테넌바움>이나 <문라이즈 킹덤>의 경우에도 사랑이라는 큰 사건은 주로 편지, 그림, 소품과 같은 아기자기한 오브제들로 증거된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주인공 삼형제는 인도 현지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장례에도 참여하지만 어디까지나 감격한 ‘관광객’으로 거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웨스 앤더슨 영화의 희로애락은 멜랑콜리 안에 한데 미지근하게 용해된다. 전쟁, 살인을 전작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신체 절단과 욕설, 섹스의 암시도 자주 등장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격정과 비탄을 에둘러 가는 웨스 앤더슨의 고집스런 취향은 거꾸로 두드러진다. 메인 화자인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연인 애거사와 처음 사랑에 빠진 과정을 관객에게 이야기하려다 말을 접는다. 훗날 그녀와 갓난아이가 병사했다는, 그의 인생에서 필시 가장 무거웠을 사건도 내레이션으로 간단히 언급되고 지나간다. 제로를 지키려다 구스타브가 맞이한 슬픈 결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쿵짝거리는 러시아 춤곡이 관객의 애도를 부드럽게 사양한다. 정념이라는 회오리가 웨스 앤더슨의 반듯하게 정리 정돈된 세계를 흐트러놓을 위험이 있어서일까. 고통과 갈등의 현장을 목도하는 행위 따위 부질없다는 판단 때문일까. 나는 웨스 앤더슨이 무감동한 작가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앤더스 영화의 필사적인 우회에는 어떤 애잔함이 있다. 급박한 추격과 도주의 상황에서도 직진해서 프레임의 균형을 깨느니, 한사코 90도로 좌회전하고 우회전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물들도 유사한 감정을 자아낸다. 재미로 술래잡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을 둥 살 둥 하면서도 영화가 지어놓은 대안적 세계의 가장자리를 절대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결의는 절박하고 치열하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문득 웨스 앤더슨이 3D영화를 만드는 날이 두려워진다. 좌우대칭과 구도의 데코룸(decorum)을 향한 감독의 가공할 집념을 고려할 때 스크린의 X축(가로)과 Y축(세로)뿐 아니라 Z축(깊이)까지 정밀한 비례가 적용된 웨스 앤더슨표 3D영화는 정녕 우리 모두의 시지각에 대한 난해한 도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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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가게와 같은 예쁘장한 외양과 달리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죽음’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죽음의 현장을 건드리진 않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죽음에 관해 자꾸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앤더슨의 영화에서 인간 대신 노골적인 위해를 당하는 존재는 개와 고양이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 속 동물의 안위에 예민한 관객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로얄 테넌바움>에서는 비글종의 개가 차에 깔리는 참사가 있었고 <문라이즈 킹덤>에서는 스누피라는 이름- 찰스 슐츠의 만화를 통해 비글의 대명사가 된- 의 테리어가 화살에 정통으로 찔려 죽는 적나라한 장면이 귀여운 첫사랑 이야기에 느긋하게 젖어 있던 관객을 깜짝 놀라게 했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서도 개가 상해를 입고 주인공이 기르던 고양이의 부음을 듣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전통을 지킨다. 개들이 무사한 대신 마담 D의 변호사(제프 골드블럼)가 키우는 페르시아 고양이가 창문 밖으로 냅다 던져진다. 거기까지는 비주얼 개그 차원에서 웃어넘길 수 있지만, 곧이어 카메라가 한사코 보도블록 위에 납작하게 추락한 고양이의 시신을 내려다보면 입가에 떠오르던 미소가 경직된다. 왜 이렇게까지? 이 모든 동물들의 희생이 해당 영화의 서사 전개에 필수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웨스 앤더슨이 극중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직접적 상실과 수난을 개와 고양이에게 전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앤더슨의 악취미에 진저리를 치기 전에 눈길이 가는 대목은 반려동물과 사별한 극중 인물과 영화의 반응이다. 그들은 충격은 받지만 길게 애통해하지는 않는다.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문라이즈 킹덤>의 소년 소녀가 개의 죽음을 곱씹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스티브 지소(빌 머레이)는 고양이의 죽음에 관한 아내의 무신경한 발언에 불쾌해하면서도 나중에 고양이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아무려면 어떤가라는 투로 자세히 추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그러면서도 죽은 고양이가 추억 속에 차지하는 자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변호사는 고양이의 유해를 합당하게 장례지내는 대신 그냥 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다만 영화가 사람의 죽음을 동물의 그것만큼 대놓고 쳐다보지 못한다는 점이 차이다. 생명이 방금 빠져나간 인간을 직시하긴 힘들어서 동물을 통해 통과의례를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웨스 앤더슨 영화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 살아 있는 존재는 사람이건 동물이건(감독 본인을 포함해) 죽기 마련이고 세계는 계속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최선은 개별적 운명에 연연하지 않는 고유한 세계를 짓다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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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피너츠> 예고편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가필드와 스머프로 모자라,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마저 완벽하고 평화로운 평면성의 세계로부터 3D CGI의 소란 속으로 끌려나와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렇지만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가 공개한 <피너츠>(2015)의 첫 예고편은 뜻밖에도 그리 나쁘지 않다. 카툰을 읽으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상상했던 피너츠 마을의 한적한 무드와 사물의 질감, 각 캐릭터의 특징 있는 움직임을 잘 옮겨놓아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