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임권택] 결국 내 안의 ‘흥’을 찍는 거지요
2014-03-31
글 : 이화정
사진 : 백종헌
강우석과 김태용, 임권택 감독에게 그의 102번째 영화 <화장>을 묻다

임권택 감독은 <화장>을 자신의 ‘102번째 영화’로 수식하는 걸 극구 거부한다. “그런 말은 사양합니다. 기념비적 영화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어느 작품에 대해서나 의미를 부여하려 들면 멋쩍어하며 손사래를 치는 임권택 감독의 화법 그대로다. 하지만 그가 102번째 자리에 <화장>을 놓기를 거부하는 것은 비단 겸손의 발로에서만은 아니다. 영화는 소설가 김훈의 <화장>을 원작으로 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연정을 품고 있는 젊은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다. 오랫동안 자신이 주목해온 전통의 아름다움과 풍광을 모두 버리고, 한 남자의 내면이라는 좁디좁고 알기 힘든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려는 낯선 시도다.

지난 1월1일 크랭크인해서 3월8일 촬영을 마친 <화장>은 최근 임권택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적은 회차로 촬영된 작품이다. 명필름과의 작업에서 오는 영화적 환경의 변화, 김형구 촬영감독과의 첫 만남 등 임권택 감독에게 <화장>은 101번의 작업의 무게를 내려놓고 경험하는, 지금껏 만든 영화 중에 가장 ‘어린’ 영화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인 임권택 감독과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강우석, 김태용 감독과의 만남의 자리를 주선했다. <화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지금 영화를 하는, 세대가 다른 세 감독들의 토로의 장이 되었다.

김태용_<화장>은 감독들이 많이들 욕심냈던 작품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어려워서 다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작품이었어요. 감독님은 이번 영화 하시면서 어떤 점이 끌리셨나요?

임권택_기왕에는 해오지 않은 소재인데 그 점때문에 명필름으로부터 제안을 받고서 호기심이 생겼어요. 100여편의 영화를 해오면서 내가 임권택이라는 틀에 갇혀 그만그만한 영화를 만들어왔을 텐데 <화장>이라는 소재는 생판 안 해봤던 것이니 그 틀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전까지 난 매번 자연을 쫓아가면서 찍는 감독이었는데 이번엔 병원, 빈소, 회사 세 군데 실내에서만 찍는 영화를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주 막막했어요. 내 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소재란 점에서 해볼 만하단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그런 환경으로 들어오고 보니 막막해질밖에요. 김형구 촬영감독과는 처음으로 작업했는데 그 사람의 역량이 이런 데서 빛을 발했어요.

김태용_전 <화장>은 임권택 감독님이 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이전에 이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 감독들을 생각해보면, 이 친구가 만들면 생각보다 감성적으로 만들지 않을까, 또 저 친구가 만들면 너무 상업적인 부분이 강조되겠구나 걱정이 들더라고요. 영상으로 전혀 안 떠오르는 작품이었어요. 감독님이 하시면 너무 감상적이지 않으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최근에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을 봤는데 한 여자의 참혹한 마음을 쫓아가는 감독의 공력이 느껴지면서 <화장>이 떠올랐어요.

강우석_나는 감독님이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이 영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기분도 좋았어요. <달빛 길어올리기> 때는 한지라는 전통 소재 같은 부분에 대한 어려움이 컸죠. 영화적으로 과연 재밌게 다가올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있었고요. 그런데 <화장>은 ‘화장’이 주는 복합적인 의미나 시사하는 바가 큰 영화가 되겠구나 싶었어요.

임권택_이 영화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김훈 작가의 엄청난 힘이었어요. 문장으로 이루어진 힘은 있는데 영상으로 잡아내기는 너무 힘든 이야기였어요. 그런 소설이다 보니 도리없이 다른 걸 시도하기보다는 원작 그대로 하자 생각했죠. 단지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일상을 살면서 누구나 어떤 대상을 향한 성적 욕구들, 평소 우리가 살면서 드러내고 살기에는 부끄럽게 생각하는 부분들을 영화에서 드러내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김태용_저는 감독님이 연출하신 <춘향뎐>을 좋아하는데 실제 십대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찍은 정사 신을 보면 젊은 감독들은 못 잡아내는 도발적인 부분이 있었어요. <화장>은 그런 지점들을 훨씬 더 기대할 수 있는 영화다 싶어요. 인간의 성적 욕망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까지 가져가야 만들 수 있는 작품이고 이번엔 그런 점에서 정말 세게 나오겠구나 싶었어요.

강우석_원작이 있는 작품을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웹툰 원작의 영화를 두편 했는데요. <이끼> 때는 담배도 술도 끊었어요. 다 싫더라고요. 반쯤 찍으니 후회가 왔어요. 내가 왜 이걸 시작했나. 남이 다 써놓은 걸 옮긴다는 게 딴에는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었어요. <전설의 주먹>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게 따지면 시나리오도 다른 사람이 써놓은 거지만 좀 다르죠. 아무도 이 시나리오를 모르는 거니까. 좋은 원작을 가지고 영화를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작품들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임권택_원작 안에서 또 하나 내가 더 힘들었던 것은 <화장>이 2004년에 쓰인 소설이라는 거였어요. 벌써 10년 전에 나온 소설인데 난 지금 현재 화장품 만드는 회사 이야기를 찍어야 하는 것이었죠. 십년 전 이야기로는 진행시킬 수 없었어요. 소설과는 환경이 모두 바뀌었으니까요.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본인도 원작을 읽었는데 “지금은 회사가 그렇게 운영되지 않습니다” 하시면서 그나마 계열사 중에 좀 비슷하게 운용되는 쪽에서 찍을 수 있게 도움을 주셨어요. 그런데 막상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 이해도 없이 영화를 한 거예요. 처음에는 이 부분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덤볐어요. 주인공의 정신적 추이만 좇아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막상 그렇게 하다 보니 막히더라고요. 크게 혼났어요. 다행히 이 부분을 고증해줄 사람을 만나서 많이 도움을 받았지요.

옛날의 활기가 안 찾아질 때 곤란하더군요

강우석_무엇보다 안성기씨가 전적으로 매달리는 걸 보고 오랜만에 정말 좋은 역할 하는 것 같다 싶었어요.

임권택_배우들이 정말 대단했어요. 특히 안성기씨의 경우는 기왕에 해왔던 틀로부터 벗어난 전혀 새로운 연기라 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안성기라는 배우는 6∼7편의 작업을 하면서 알고 있던 모습의 배우였어요. 그 안에서 해내겠지 했는데 이번엔 좀 넘어선 것 같아요. 오죽하면 다른 사람들이 안성기씨 연기하는 걸 봐야 해서 현장을 뜰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43회차를 찍는데 43회차 모두에 나오니 고생도 많이 했죠.

강우석_안 그래도 촬영 동안에는 안성기씨가 엄청 예민해져 있더라고요.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촬영 동안 너무 즐기듯이만 하면 막상 화면에서는 관객이 못 즐기는데, 본인이 이렇게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거 보니까 이번엔 뭔가 좀 다르겠다 싶더라고요.

임권택_김호정씨는 이번에 처음 만났고, 어떤 정보도 없는 배우였는데 추천을 받았어요. 맨날 짜증내고 야위어가는 말기암 환자의 역할이니 저보고 그런 연기 하라면 도망갔을 것 같아요. 절대 안 했겠지요. (웃음) 신기한 연기자더라고요. 깜짝 놀랄 만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어요. 살을 8kg 정도 뺐는데 정말 채소만 먹으면서 버텼어요. 저러다 드러누우면 영화 중단하는 사태까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어요. 신재호 팀장(특수분장)이 병자의 더미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엄청 잘 만들었어요. 그런데 더미를 쓸 필요가 없다 싶을 정도로 본인이 말라버리니까. 더미만큼은 살이 안 빠져도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어진 거죠. 아름답게 찍힐 리가 만무한데 정말 아름답게 찍혔어요.

김태용_전 얼마 전까지는 젊은 영화인들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은 영화인들 중 막내 역할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요즘 부쩍 커졌어요. 감독님이 이번 작품을 하시면서 “그전에 해왔던 것들을 이번에 영화하면서는 쓸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게 뭔지 궁금합니다.

임권택_나이가 쌓이면 영화가 좋아지는 게 아니고 힘든 점이 있어요. 80살 된 고령자가 영화 찍으면 영화도 그 나이만큼 좋아져야 하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당장 순발력이나 이런 부분에서 젊은 사람들보다 많이 떨어지니까. 점점 옛날에 했던 걸 버려야겠다,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강우석_전 이제는 관객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받아들이든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 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책(시나리오)을 읽어보고 단점을 지적해주면 그게 싫더라고요.

임권택_누구나 작품 하다보면 간섭받는 것도 싫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게 되지요. 예전에는 감독들이 머릿속에 영화의 모든 걸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갔어요. 강 감독은 영화를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콘티를 그리고 가는 영화가 있어요? 진행을 하면서 가는 거 아닌가요?

강우석_콘티를 다 짜놓고 가긴 해요. 안 하고 가면 불안하니까요. 그런데 현장에서는 계속 뒤집혀요.

임권택_그렇죠. 저도 지금까지 그런 작업들을 해왔어요. 젊을 때는 쫓기듯이 작업을 했는데 그게 감독들에게 잠재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과제를 가지고 시달리면서 하는 고민들이 내 안에 맴돌다가 어느 순간 정연한 모습으로 나오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어느 날부터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는 거예요. 70살이 넘으면서는 좀더 심해지더라고요. 물론 젊었을 때보다 삶 자체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그게 영화로 이월되는 건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의 장점이겠지만, 번쩍번쩍 잠재됐던 순발력이 빛을 발하고 나오는 것은 힘들어진 게 지금 내 나이예요. 해서는 안 될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어요.

강우석_그럼에도 옆에서 지켜보면 지금 연세에도 작품에 대한 열의를 계속 가진다는 게 정말 대단하세요. 그게 꺾이신 적은 없나요?

임권택_나는 그런 건 없어요. 나 나름대로 지켜온 감독으로서의 소신이 바뀐 적이 없어요. 그게 꺾일 바에는 이 일을 그만두고 말아야지요.

김태용_계속 재미가 있으신 거예요?

임권택_그럼요. 재미는 있는데 옛날 활기가 안 찾아질 때 곤란한 거죠. 내가 배가 너무 나와서 3kg만 빠졌으면 했는데 이번에 그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촬영하는 동안 감기로 한달을 앓으면서 찍으니까 너무 아파서 살이 빠지더라고요. 의사 말로는 현장에서 링거라도 맞으라고 하는데 젊은 스탭들에게 그런 모습까지 보일 수는 없잖아요. 혈기왕성했을 때의 에너지가 아직도 조금은 살아 있겠지 하고 그런 일정을 짰는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내 나이가 이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제일 힘들었던 건 준비가 덜 갖춰진 상태에서 촬영을 했다는 거였어요. 내가 더 깊이 알고 시작을 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했어요. 끝나고 보니 이번 영화를 43회차 만에 찍었어요. 다들 빨리 찍었다고 신기해하는데, 예전에 <안개마을>은 10일 정도 만에 찍어서 검열을 받았어요. 내 머릿속에는 아직 그런 속도가 있는 건데, 그게 지금은 마음대로 될 리가 없지요. 이번에 그래서 명필름에 대한 고마움이 컸어요. 이 나이까지 내가 영화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거지요.

내 안에 ‘흥’을 실을 수 없으면 그만둬야지요

강우석_저는 요즘 새로운 이야기를 찾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어요. <공공의 적> <투캅스> 할 때는 나름대로 다 새로운 영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끼>를 하면서부터는 그런 마음을 찾지 못했어요. 제가 <장군의 아들2> 현장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데 그때 감독님께서 어마어마하게 화내시는 모습을 봤어요. 콘티에도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걸 보면서 그게 열정이다 싶었어요. 요즘은 그렇게 할 만한 게 없이 그냥 뭐가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신이 나지도 않아요. 지금 개발 중인 <두포졸>은 ‘조선판 <투캅스>’라는 생각으로 그 즐거웠던 기억을 되살려 영화를 해보자 해서 붙잡았는데 그게 또 말처럼 되지를 않더라고요. 일단 글로 써져야 현장에 가서 색다른 유머를 구사할 텐데 이게 만만치가 않아요.

임권택_<두포졸>은 <투캅스>를 조선시대로 옮긴 거다라는 설정만으로 흥미가 가는 작품이에요. 이건 강우석 감독이라면 되겠다 했는데 왜 그런 수렁에 앉아 있나요?

강우석_감독님이 재밌다 말씀하시니 더 부담이 갑니다. 다행히 설경구씨가 지금 당장은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촬영 일정이 아직 여유가 있어 쫓기지는 않는 편이에요. 그런데 정말 이 대본으로 자신 있나, 하는 생각 때문에 조금 조심스러워요.

임권택_강 감독 같은 사람이 계속 흥행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야 후배 감독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겠지요.

강우석_감독님 이후로 제가 한국에서 가장 영화 많이 찍은 감독으로 등극했습니다. 이번이 20번째 영화인데 따져보니 그렇더라고요. 영화는 찍을수록 가벼워지지 않고 계속 무거워집니다.

임권택_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요. 20번째밖에 안 되나요? 하도 떠들썩해서 그보다는 훨씬 많이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강우석_감독님 이후 그렇게 영화를 많이 만든 감독이 없습니다. 이장호 감독님 영화도 따져보니 19편이고, 정지영 감독님도 저보다 많지는 않고. 작품 수로는 제 후배가 되는 거죠. (웃음)

임권택_우린 이상스러운 시대에 영화를 했어요. 거의 놀지를 못했어요, 짬이 없었어요.

강우석_<투캅스>가 1993년 연말에 개봉해서 5월에 종료했는데 8월에 <마누라 죽이기>를 이미 찍었어요. 그런데 변두리에서는 아직 <투캅스> 상영을 하고 있었어요. <실미도> 하고 수익금 찾기도 전에 <공공의 적> 2편 찍고 있었어요. 지금 보면, 저도 옛날 감독님들처럼 찍었어요.

임권택_그렇게 연달아서 안 찍으려면 흥행이 안 되었어야 하지요. (웃음)

김태용_두분 감독님과 저는 너무 비교가 되네요. 전 <여고괴담2>로 29살 때 데뷔했는데 아무것도 모를 때 한 거죠. 그런데 이후에는 쓰는데 잘 안 되고 완성을 하면 투자가 안 되고 이렇게 몇년을 보내다보니 제가 데뷔한 지 15년인데 작품은 3∼4편밖에 안 됩니다. 그간 단편 작업도 하고 강의도 하고 이것저것 했어요.

강우석_그게 결국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거다 싶어요. 시네마서비스에서 열 몇편씩 작업할 땐 믿음 하나로 투자가 됐어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대기업 직원들이 책 보고 점수 매기는 상황입니다. 예전 같으면 ‘임권택 감독’이면 영화 찍으면 되는 거예요. 감독님이 <취화선> 찍는다고 하시는데 <취화선> 어떻게 찍으실 거냐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감독의 재량에 맡기는 겁니다. 이제는 연출자에 대한 존중이 없어요. 오직 제품처럼 시나리오를 다룹니다. 감독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아니라 책대로 찍어라 이런 분위기지요. 감독님도 요즘 영화 만들면서는 속에 굉장한 분노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전 요즘 영화를 하지 말까, 남의 돈 받아서 이렇게 눈치 보면서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임권택_그만둬지지를 않을 거를 말로 하면 실언이 될 테지요. 이번에 작업을 해보니까 영화를 만드는 세대가 바뀐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일례로 촬영이 끝나고 나니 조감독은 그 날부터 안 나오고 기록(스크립터)만 편집실에 오더라고요. 난 또 상황을 모르고 “연출부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는 거기까지만 계약이 되어 있더라고요. 요즘은 많이들 그렇게 하는데 나는 그것을 멍청하게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임권택이니까 해봐라, 무조건 위임을 받고 찍던 시절에 영화를 찍었어요. 누구 간섭받을 일도 없고, 이런 소재로 하고 싶다고 하면 그래 해봐라 했지요. 잘됐건 못됐건 간에 그걸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래서 제작자도 제가 많이 망쳤어요. (웃음)

강우석_<만다라> 말고는 감독님이 제작자에게 피해준 작품이 없는데요. (웃음)

김태용_지금 보면 <여고괴담2>가 운 좋은 케이스였죠. 투자배급을 한 강우석 감독님이 시사실에서 영화 보시며 엄청 담배를 태우셨던 게 기억납니다. 영화 끝나고, “잘 만들었네. 그런데 흥행은 안 될 거야” 하고 나가셨어요. (웃음) 그래도 이런 영화가 개봉할 수 있었던 시기였죠.

강우석_김 감독도 요즘은 점점 속상한 일이 많지 않은가요? 요즘 바뀐 환경이 분노의 차원을 넘어서 이젠 포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영화로 기업이 돈을 벌려고 하나. 돈을 많이 번 기업이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전 이창동 감독이 <초록물고기> 할 때 ‘5억원까지는 손해 봐도 돼’ 이런 표현을 했어요. 약간 손해를 봤는데 충격은 없었어요. 류승완 감독을 <피도 눈물도 없이>로 데뷔시킬 때도 ‘이 영화로 돈 못 벌어도 된다. 데뷔시켜라’라고 했죠. 다른 영화에서 흥행을 해서 그 수익금으로 조금 손해 봐도 이런 영화들을 만들 수 있는 풍토가 되어야 하는데. 임권택 감독님 영화도 투자받기 힘든 시대라니, 참 속상합니다.

김태용_선배님들을 보면서 영화를 시작했다가 지금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세대니까요. 대기업 자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영화를 찍을까 고민하는 거죠. 그전에는 감독들끼리 만나면 어떤 영화 좋아하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은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 투자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예요.

임권택_나 스스로는 그렇게 박탈감이 크지는 않아요. 난 긴 세월을 해왔고 좋은 환경을 나처럼 많이 누린 감독도 앞으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왕에 기울어가는 나이니까 전망이 안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어떻게든 갈 수 있는 거죠. (웃음) 그런데 젊은 세대가 자기 기량이나 창의성을 활짝 펼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게 더 걱정이에요. 이번엔 명필름이라는 확실하게 갖춰진 회사를 만나서 참 다행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나조차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에요. 여태도 투자가 제대로 다 안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촬영이 끝났는데도 투자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한쪽으로는 참담한 생각도 들지요.

강우석_그래서 저는 요즘은 후배들을 못 만나겠더라고요. 이젠 감독들이 만드는 영화가 아니에요. 1천만 관객이 들어도 감독 생각이 안 나는 거죠. 그냥 영화 한편 즐기다 나오면 끝인 거죠. 그 감독이 뭘 만들었고 다음 영화도 꼭 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김태용_저희 또래는 영화도 많이 안 만들어봤으면서 십수년 동안 영화만 생각하며 사는 세대들이에요. 쓰다가 투자 안 되면 접고 그게 반복이에요. 그런데 저 스스로의 문제는, 옛날에 재밌던 게 지금은 재미없어서이기도 한 것 같아요. 새로운 걸 찾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게 더 큰 문제이지 싶어요.

강우석_그건 어떤 면에서는 요즘 감독들이 용기가 부족한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다들 겁이 많아요. <실미도>도 원래는 내가 하려던 작품이 아니었어요. 제작해달라고 왔는데 시나리오가 아주 별로였어요. 그런데 <신동아>에 실린 사건일지를 보니 실화는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되겠다 싶어 제목만 가지고 오고 다시 시나리오를 썼지요. 그런데 요즘은 자기가 준비하는 작품도 있지만 의뢰가 오는 작품이 더 많은 시대예요. 내가 별로 안 좋아해도 관객이 좋아하는 거라면 이유가 있는 거고 한번 매달려서 자기식으로 고쳐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임권택_결국은 ‘흥’을 찍는 거라고 봐요. 책은 별로라도 그 안에 흥이 실리면 <실미도>가 찍히는 거죠. <장군의 아들>을 할 때도 제작자가 예전 초창기 내 ‘저질’ 액션영화를 기억하고 그렇게 해달라고, 굳이 싫다는 감독한테 영화 찍어달라고 한 거였어요. 이태원 사장은 당시 극장가에서 액션영화가 흥행이 잘 안 되니 이 작품으로 그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처음엔 제작자의 집요한 성격에 내가 당했군 했는데, 결국은 내가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나도 이런 영화를 하고 싶었구나’ 했어요. 내 안에 이런 흥이 있었던 겁니다. 그 안에 자신이 그걸 실을 수 없으면 아무리 100억원대 영화를 해달라고 의뢰가 오더라도 당연히 도망가야지요.

김태용_저도 요즘은 그런 부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올가을에는 장편 들어가려고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투자 문제도 있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기회가 주어졌으니 제대로 매달려보려는 마음이 큰 거지요.

<화장>은 조금은 새로운 영화

임권택_백편 넘게 영화를 개봉한 감독인데 한건도 예상이 맞아떨어진 적이 없어요. 막연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저 합니다. 이번 <화장>도 똑 떨어지게 말할 수는 없는데 조금은 새로운 영화기도 하니까 그런 것들이 매력으로 닿는다면 좀 매력으로 봐줄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는 것이지요.

강우석_전 감독님 작품 스코어를 대부분 다 맞혔어요. <달빛 길어올리기> 할 때는 (박)중훈이를 만나서 제가 ‘좋은 영화고 평가는 잘 받겠지만 흥행은 기대하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웃음)

김태용_젊은 감독이 찍었다면 기대가 되지 않을 지점도 오히려 감독님이 찍으셔서 궁금하고 보고 싶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 그게 분명히 관객에게도 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의 새로운 영화를 지지합니다.

<화장> 촬영현장.

보이지 않는 것과의 사투

<화장> 시나리오를 쓴 송윤희 작가

영화 <화장>에 대해 원작자인 김훈 작가는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은 소설이다.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감독님과 배우가 끌어내줘야 하는데 어려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는 우려를표했다. 1년여에 걸친 송윤희 작가의 시나리오 작업은 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의 사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설은 내면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다. 애초부터 그걸 영화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영상화할까를 고민했다.” 영화 전체가 어쩌면 오 상무(안성기)의 내적 고민과 같은 이름인 난해한 작업. 기획 단계부터 명필름과 송윤희 작가가 주목한 것은 그래서 그의 앞에 놓인 두 여인이었다. 바로 ‘화장’(火葬)을 하게 되는 죽어가는 몸과, 생의 활력을 가진 젊은 여자의 육체를 대비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여인에 대한 접근이 결국 소설의 문장들을 영상으로 풀 수 있는 해법이었다. 오 상무와 젊은 여인 추은주(김규리)의 육체적 관계를 판타지와 현실의 어디까지 가져가야 하나, 이런 모든 것들이 새롭게 해부되고 논의되었다. 송윤희 작가는 “<화장>은 새로운 소재, 새로운 시각의 영화가 아니라 한 남자의 일년여에 걸친 내면을 담담하게 따라가는 영화다. 그게 결국 가장 근본적인 삶의 주제로 접근하는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