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했고 돌아갈 수 없다. 그저 현재를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돌아온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의 이 말이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출발 지점이다. 그가 경험했던 전편의 세계를 떠올려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드라’ 조직을 앞세운 적의 공격은 내 편과 네 편을 쉽게 구별했고, 지키거나 추구해야 할 정의 또한 명확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냉동상태에서 70년 만에 깨어난 <퍼스트 어벤져>의 캡틴, 크리스 에반스가 마주한 세계는 분명 변해 있다. 캡틴은 완벽한 선의 공동체라고 생각한 국제평화유지기구 쉴드에서조차 지구를 위협하는 첩자들의 기생을 목격한다. “옳은 일을 하고 싶은데 뭐가 옳은 건지 모르겠다. 옛날과 달라졌다”는 캡틴의 말에는 그의 혼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계의 질서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메커니즘 자체가 변화하면서 진실의 실체는 모호해졌다. 악이 근절돼서가 아니라 누가 악인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인류를 위해 캡틴 아메리카가 나서야 할 명분은 있지만 정의(正義)는 재정의(定義)되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캡틴 아메리카가 당도한 세상, 곧 마블의 세계가 좀더 복잡한 심연으로 들어선 것이다.
“상당히 벅차다. 나를 주눅 들게 만드는 작품이고 내가 싸워나가야 할 상대다.” 상황이 변한 만큼 인내를 갖고 전진해야 하는 크리스 에반스의 책임감도 더불어 막중해졌다. “이번 작품은 내면의 갈등이 핵심”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는 캡틴의 심리적 번뇌에 몰두했다. 단순히 과거처럼 자유를 얻기 위한 싸움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적’을 구별하고 동료를 신뢰해야 하는 보다 어려운 미션 앞에 놓인 것이다. 이 와중에 크리스 에반스는 뚝심 있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방패 없이 한판 붙어보자는 윈터 솔져에게 “얼마든지. 방패가 다는 아니다”라고 응수하는 캡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방패는 캡틴의 분신이지만 지구를 지키는 한 방편일 뿐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는 혼란을 뚫고 나갈 자신이 있는 것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각오가 돼 있다”는 그에게는 방패보다 앞선 리더의 의지가 엿보인다.
사실 고뇌하는 리더의 자리에 크리스 에반스를 세워보는 건 익숙한 그림이다. 총 6편으로 제작될 <캡틴 아메리카>뿐 아니라 반란을 이끌던 <설국열차>의 커티스만 봐도 그렇다. 리더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발언권을 갖고 인류 멸망을 막으려고 우주로 간 <선샤인>의 메이스는 또 어떤가. “임무를 완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며 대원들 앞에서 제 의사를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단호하고 강렬하다. 이처럼 최근 몇년간의 그를 보면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책무를 기꺼이 떠안는 의지의 인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가 이처럼 확실한 캐릭터를 얻게 된 건 마블과의 조우 덕이 크지만 이것이 그의 연기력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연기를 꿈꿔온 준비된 연기자였다. 고교 시절부터 배우가 될 생각을 한 그는 오디션 현장을 다니며 연기를 배웠다. 예술감독 출신인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형제들 모두 예술대학에 진학했고 그와 남동생은 배우로 활동 중이다. 2000년에 영화 <더 뉴커머>로 데뷔한 그는 이후 몇편의 하이틴물에 출연하더니 캡틴이 되기 바로 직전 <판타스틱4>와 그 속편에서 ‘불꽃맨’ 자니 스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서 그는 능글맞고 껄렁껄렁한 ‘동네 노는 형’의 포텐을 제대로 터뜨리며 4인방 가운데 가장 크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이후 그는 <당신은 몇번째인가요?>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도 도전해 사랑 앞에 한없이 적극적인 ‘남자’를 보여주는 데도 소질이 있음을 증명했다. 변신도 서슴없었다. <펑쳐>의 마약에 절어 있는 변호사 마이크 바이스나 <아이스맨>의 (거의 처음일) 장발의 살인청부업자는 상당히 파격이었다. 이 작품들은 크리스 에반스가 암울하고 묵직한 드라마에서도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또한 관객이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한정된 이미지를 깨트려준 좋은 사례가 되었다. 프랜차이즈영화의 주인공으로 갇혀 있기보다 나름의 시도를 통해 연기의 폭을 넓혀온 그의 최종 목표는 감독이다. 마블과의 계약이 끝난 이후 그는 또 어떤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올까. 그의 투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