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옛날 옛적에
2014-04-03
글 : 김혜리

노화의 징후 중 하나는 여위어가는 표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은 감정의 진폭을 게을리 반영한다. 배우도 사람이니 늙어감에 따라 안면근육이 둔해진다. 다만 그들은 캐릭터에 따라 표정의 스펙트럼을 좁혔다 넓힐 수 있다. 강제로 입양된 아들을 수십년 뒤 찾아나서는 <필로미나의 기적>의 주인공 필로미나는, 낙천적 천성과 신앙으로 끔찍한 슬픔을 쓸어 담으며 살아온 할머니다. 그녀를 연기하는 주디 덴치의 클로즈업은, 특정 표정과 감정이 관련돼 있다는 상식을 깨끗이 뒤엎는다. 배우가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된다는 연기의 설화를 그녀의 필로미나가 증명한다.

3/4

소설가, 만화가, 감독을 가족 친지로 두는 일은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진배없다는 평소 믿음이 사라 폴리 감독의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를 보면서 확고해졌다. 우선 픽션일 경우, 극중 캐릭터의 말과 행동에서 내 모습의 일부를 발견한다고 치자. 작가/감독이 아무리 “넌 영감을 줬을 뿐이야”라고 말한들 우리의 자격지심은 극중에서 캐릭터가 그려지는 방식이 작가/감독인 지인이 평소 나를 보는 시선이겠거니 넘겨짚기 마련이다. 예술가란 종족은 대체로 회의적인 관찰자이므로 해당 인물이 어리석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장면이 반드시 있을 텐데 이때 모델인- 혹은 그렇다고 믿는- 나는 객석에서 부끄러움과 은근한 울화를 맛보게 된다. 반대로 미화돼 있다면 작품 전체가 시시해 보이면서 김이 샐 확률이 높다. 내가 한 말과 행동만 기록되므로 상대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다큐멘터리는 픽션보다 덜 위험하지만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처럼 가족의 내밀한 속사정이 소재라면 얘기가 다르다. 손님이 우리 집 옷장이나 냉장고를 열어보는 일도 못내 불편한 노릇인데 하물며 집안의 해묵은 비밀을 불특정 다수가 구경하는 스크린에 ‘배급’하고 해외로 ‘수출’하다니! 그렇다고 ‘가족사’(家族史)에 엄연한 공동 소유권이 있는 집안의 예술가가 (어차피 다른 식구에겐 실제적 효용이 없는) 무형의 ‘가산’(家産)을 활용하겠다는 데에 반대할 명분도 마땅치 않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23년 전 암으로 사망한, 감독의 어머니 다이앤 폴리의 생애를 가족과 친구들의 회고를 통해 복원한 다큐멘터리다. 회고 내용은 인터뷰와 가족이 소장한 사진 및 동영상 자료, 그리고 홈무비 형식을 감쪽같이 모방해 연출한 재연 장면으로 이뤄졌다. 중반 이후 영화는 엄마가 마흔둘에 낳은 늦둥이 막내 사라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로 주제를 옮겨간다.

사라 폴리 감독은 영화 서두에서, 말로 옮겨지지 않은 체험은 그저 혼돈이며 언어로 진술될 때에야 비로소 이야기의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을 인용한다. 이는 뒤집으면 경험이란 이야기로 화하는 순간 내가 직관적으로 아는 ‘진실’과 질적으로 다른 구성물로 변이된다는 뜻이기도 할 터다. 본인이 직접 발화한 스토리에서도 그처럼 소외감을 느끼는 마당에, 내가 연루된 사건에 대한 타인의 진술이 가져다주는 이물감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원제 <Stories We Tell>의 복수형이 꼭 집어 명시하듯 사라 폴리 감독이 택한 차선은, 이야기와 진실 사이에 게재되는 불가피한 간격을 최대 다수의 시점을 두루 수용함으로써 최소화하는 방침이다. 이는 가족과 지인의 공동 소유인 엄마의 이야기를 감독이 독점하지 않겠다는 페어플레이의 몸짓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내가 들려줄 이야기’와 선을 긋는 것 못지않게 ‘너희가 들려줄 이야기’도 배제하는 영화다. 캐나다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우이기도 한 사라 폴리는 딸과 재회해 흥분한 생물학적 아버지가 단독 회고록을 출간하려 하자 반대하고, 비밀을 눈치챈 기자에게 호소해 보도를 저지한 연후에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를 찍었다. 어차피 누군가가 말해야만 한다면 진실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우리’가 말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셈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유명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정당방위로 보이기도 한다.

3/5

사라 폴리는 영화가 스타의 사생활 고백으로 변질될까 염려한 탓인지 카메라 앞에 설 때면 대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인터뷰이들에게 발언 기회를 분배하고 조율하는 자리를 지키려 한다. 심지어 아역배우 시절에도 센티멘털리즘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 영화인이긴 하지만,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에서 사라 폴리가 꿋꿋이 유지하는 거리는 그녀가 터울 큰 막내라는 사실에서도 기인하는 듯하다. 부모 세대와 중첩되는 삶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막내들은 가족사 집필의 적임자다. 그들은 가족 내 최약자이기에 매우 예민한 관찰자이고,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가장 긴 멤버이기에 유사시에는 얄미우리만큼 냉철해질 수도 있다. 부모와 동생들 사이에서 중재역을 전담하기 마련인 맏자식의 감수성으로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과연 영화를 통해 보는 사라 폴리 감독은 ‘못된’ 딸, 독한 동생이다. 아버지 마이클 폴리에게 수기를 낭독하도록 하는 스튜디오 장면에서 사라는 종종 기술적 문제인 양 “한번만 그 대목을 다시 읽어주세요”라고 요구하는데 공교롭게도 문제의 구절들은 아버지의 갈등과 가족의 아픔이 스며 있는 부분들이다(과거에도 그녀는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늙은 아버지를 양복 입은 채 수영장에 장시간 집어넣은 역사가 있다). 카메라 앞에 불러다 앉힌 오빠와 언니들에게 사라 폴리는 농담 반 진담 반 통고한다. “다큐멘터리라고 했지만 취조예요.” 마침내 아버지는 한숨을 쉰다. “넌 참 가학적인 인터뷰어구나.” <씨네21>에 긴 인터뷰를 연재하던 시기에 나는 가족 인터뷰야말로 인터뷰의 궁극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부모 형제와 긴 시간 마주 앉아 시선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주고받는 문답은 엄청나게 괴로운 작업일 테고, 판도라의 상자에서 꺼낸 결과물은 어떤 인터뷰보다 내게 진한 자국을 남길 것이다. 불운하게도 인터뷰어로서 각종 무능에 더해 내가 지닌 핸디캡은 맏딸이라는 점이다.

사라 폴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제목에 부합하는 영화로 완성하고자 나르시시즘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에게 점점 선명히 다가오는 이미지는 감독인 그녀의 초상이다. 폴리는 본인의 출생이 가족에게 상처가 되어 미안해한다거나 하는 연약한 피해자의 제스처는 결코 취하지 않는다. 희생자이긴커녕 카메라를 잡은 그녀는 가족을 ‘심문’하는 권력자다. 게다가 ‘개량형’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사라 폴리가 배우들을 기용해 연출한 재연 장면을 진짜 기록 영상과 뒤섞고 있다. 캐스팅부터 상황의 세부까지 사라 폴리의 해석에서 비롯된 이 이미지들은 다른 가족의 목소리보다 힘이 세다. 결정적으로 영화의 표면적 주인공으로 스크린 타임의 큰 비중을 점유하는 어머니 다이앤은 사라 폴리와 판박이다. 배우 겸 캐스팅 디렉터로 일했던 주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매혹적이지만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 상처를 주는 작은 회오리바람 같은 여자. 다이앤은 사라 폴리 감독의 극영화 전작인 <어웨이 프롬 허>의 줄리 크리스티, <우리도 사랑일까>의 미셸 윌리엄스의 자매이기도 하다. 치매로 인해 혹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배우자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다른 남자한테로 흘러간 사라 폴리의 여주인공들은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를 보고 난 관객의 눈에 감독 어머니의 분신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속 내레이션과 공개 뒤 인터뷰에서 사라 폴리 감독은 이 영화의 목표가, “동일한 사실을 사람들마다 어떻게 달리 진술하는지, 역사와 진실이 사람들의 스토리텔링에 의해 재구성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 포부는 공허한 ‘보도자료’로 느껴진다. 감독이 밝힌 야망과 달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결코 <라쇼몽>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이앤 폴리에 관한 가족과 지인들의 추억은 대동소이하며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영화 속 진술들은 사라 폴리라는 여성 예술가와 그녀를 사로잡은 영원한 여성상으로 수렴된다. 결국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엄마와 나>다. 역사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과 필요가 가장 강한 자의 것이고 이 게임에서 그건 사라 폴리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주관적 진실에 관한 객관적 연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에세이로서 흥미롭다.

3/6

<300: 제국의 부활>을 보는 동안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약 300가지 부질없는 의문으로 심경이 어지러웠다. 일단 사소한 난센스들에 대한 ‘트집 잡기’에 해당하는 불평으로 이는 넓게 보면 장르영화 관람의 부수적 즐거움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스군은 의복의 3대 기능에 신체 보호가 포함돼 있다는 걸 배우지 않은 걸까? 달은 왜 저리 크지? 고대의 밤에는 달 대신 목성이 떴나? 테미스토클레스(설리번 스테이플턴)가 다리우스 황제를 화살로 맞추는 장면에서 두 진영은 멀리 떨어져 있건만 크세르크세스 왕자(로드리고 산토로)와 테미스토클레스는 어떻게 눈빛 교환을 한 걸까? 페르시아의 어의들은 왜 황제에게 치명상을 입힌 굵은 화살도 뽑지 않은 채 폐하를 침상에 눕혀놓았을까? 비장한 그림을 위해? 슬로모션을 덜어내면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70분대로 족하겠는걸?

여기까지는 애교이고 <300: 제국의 부활>에는 좀더 소화하기 거북한 모순들도 있다. 전편의 노골적 인종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불만을 존중한 듯, 노암 모로 감독은 속편에서 그리스군이 저지른 잔학 행위도 보여준다. 사슬에 묶인 채 꼼짝없이 배와 함께 침몰하는 그리스 노예의 이미지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우리도 알아”라는 투로 일회적으로 던져질 뿐 서사 속으로 통합되어 전개되지 않는다. <300> 시리즈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를 그리스 백인 세계와, 미신적 독재 사회를 페르시아와 등치로 놓는다. 영화는 남성 전용 클럽인 이 영화에서 두명의 여성 캐릭터를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고위층에 배치했다. 과연 제독 아르테미시아(에바 그린)는 <300: 제국의 부활>을 통틀어 눈여겨볼 만한 유일한 인물이지만, 살로메와 유디트를 모델로 삼은 그녀의 매력은 유서 깊은 남성 판타지의 상투형을 안전하게 답습하는 데 그친다. 영화 속 에로틱 팜므파탈 캐릭터 계보 안에서 아르테미시아를 딱히 참신한 캐릭터라고 부를 근거를 찾긴 어렵다. 영화가 꽤 공들여 보여주는 그녀와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사 시퀀스에서 컨셉은 자명하다. “섹스 신을 액션 세트 피스처럼”이다. 하지만 남녀의 물리력과 성적 에너지가 동시에 대등하게 충돌하는 광경을 얼마나 흥미롭게 그렸느냐를 두고 볼 때, 오래전 캐슬린 터너가 주연한 몇몇 영화나 <다크 섀도우>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 비해 <300: 제국의 부활>이 특출난 면은 없다. 남녀 배우의 노출 수위도 딱히 공평하지 않다. 스파르타 여왕 고르고(레나 헤디)는 스크린 점유시간이 짧은 대신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는 목소리로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하는 물음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그녀의 몫이 되어야 할 극적, 구조적 필연성의 결핍은 고르고의 존재감을 영화의 잉여분으로 밀어낸다. <300> 연작의 비주얼은 게이 관객에게 소구하지만 이야기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대해 품는 호모포비아적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이 시리즈의 주제는 민주주의를 숭배하지만 미학은 아리안족의 나체와 일사불란한 군중의 움직임을 사랑한 나치 미술의 그것과 동류다. 어쩌면 모순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3/7

그럼에도 <300: 제국의 부활>의 가장 심각한 약점은 위에 늘어놓은 모순이 아니라 보기 흉한 비주얼과 지루한 스토리텔링이다. 나는 이 영화가 적어도 멋진 볼거리를 가졌다는 감상에 동의하지 못한다. 다양한 점성의 피가 스크린에 3D로 뿌려지는 광경을 가리켜 흥미로운 스펙터클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특히 100분 동안 반복될 경우에는. <300: 제국의 부활>의 화면은 종종 포토숍이 잘못된 디지털 사진 같고 3D는 어두컴컴한 홀로그램을 보듯 답답하다. 시종일관 스크린에 부유하는 미세먼지는, 3D의 공간감을 티내기 위한 장치인지 화산재인지 역사의 유장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시간의 티끌인지 알 수가 없다. 원작인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이미지를 스크린으로 옮긴 결과라는 의견을 접해도 내 의견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결과가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번역’되지 않았다면 원작의 미장센을 비슷하게 옮기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 <300: 제국의 부활>을 보고 이틀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전편 <300>이 그래도 일관성이 있는 오락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씁쓸했고 볼프강 페터슨 감독이 연출한 <트로이>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10년 만에 간절해졌다.

좋아요

<만신>, 신과 함께

영화 자체를 하나의 굿으로 여기는 박찬경 감독의 <만신>은 극화해서 연출한 이미지를 더해 큰무당 김금화의 비전에 현실 못지않은 리얼리티와 발언권을 부여한다. 그녀가 모시는 다양한 신과 금화가 가족사진을 찍듯 둘러선 이 숏에서 신명들은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강골의 영웅들이 흔히 그렇듯 구척장신쯤 돼 보인다. 그들은 인간보다 크지만 감당 못할 만큼 거대하지는 않다. 서운하게 대하면 노했다가 읍소하면 흔들려 은혜를 베풀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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