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씨네스코프] 여인의 얼굴을 만나다
2014-04-04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트레일러 촬영현장

잔다르크와 정은채. 멀찍이 떨어진 두 여인의 옆얼굴이 대구를 이룬다. 잔다르크가 주인공인 흑백영화 앞에서 정은채가 주인공인 또 다른 흑백영화가 펼쳐지는 것 같은 인상마저 든다. 전혀 다른 시대의 여인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 내밀한 감정이라도 주고받는 것일까. 묘한 긴장감이 어린다.

“잔다르크의 감정이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잔다르크의 수난>을 처음 보고 느낀 감상을 ‘아픔’이라고 말하던 그녀. 현장에서 다시 만난 잔다르크가 이번에는 그녀에게 어떤 잔상을 남길까. 카메라를 등진 정은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잔다르크의 애상에 젖은 얼굴을 통해 짐작해볼 뿐이다.

“나중에 눈물이 마르면 그때 음악의 힘을 빌릴게요.” 무성영화라는 컨셉에 맞춰 현장에도 음악이 따로 없는 상태. 하지만 정은채는 곧바로 감정을 추어올려 눈물을 떨군다. ‘컷’ 소리가 난 뒤에도 그녀의 눈물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춘정>으로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미랑 감독.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한 목소리 톤을 잃지 않으며 모니터 앞을 떠나지 않는다. 돌리의 움직이는 속도를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다. 배우의 감정 몰입이 중요한 촬영이라 감독은 틈날 때마다 “은채씨, 어디 불편한 데 없나요?” 하고 묻고 또 묻는다.

이동식 활차 위의 카메라 한대. 커튼을 스크린 삼아 오직 한 장면만이 반복 재생된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1928년 흑백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 속 눈물을 흘리는 잔다르크의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그리고 카메라와 스크린의 중간쯤에 덩그러니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이것이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트레일러 촬영현장 풍경의 전부다. 이렇게 간소할 수가. 그런데 이 단출함이 묘하게 현장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정은채씨 아니면 안 됩니다.” 연출을 맡은 이미랑 감독이 홍보팀장에게 보냈다는 캐스팅 관련 메일의 한줄이다. 감독은 극중 잔다르크처럼 얼굴만으로도 힘을 전달할 수 있는 배우를 찾았다. 그런 감독의 눈에 단박에 든 배우가 정은채다. “가만히 보면 은채씨와 잔다르크 역의 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선이 묘하게 닮은 것 같지 않아요?” 감독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 애상과 결기가 교차하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해원의 얼굴 때문이었을까. 해원의 마스크에 잔다르크의 얼굴을 살포시 포개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감독님이 내게서 뭘 보셨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찾지 못했다”라며 웃는 정은채의 얼굴이 마냥 해사하다.

촬영 컨셉은 간단하다. 카메라가 잔다르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잡고 곧이어 의자에 앉은 정은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단 이 모든 게 원신 원컷으로 진행된다. 언제부터인가 영화의 시원(始原)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감독은 이번만큼은 최대한 단순하게 찍고 싶었다고 한다. 군더더기를 줄이려는 감독의 노력은 또 있다. 촬영장소가 지하철역이 됐다가 카페로 바뀌더니 결국 대학교 내 작은 강의실로 결정된 것도 촬영의 변수를 최소화하고 오직 배우에게만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다시 카운트할게요.” “몇초가 자꾸 남네요.” 단순 명쾌한 컨셉만큼 촬영도 그러면 좋으련만.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는데도 뭔가가 자꾸 어긋난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속도와 배우가 앉은 의자가 돌아가는 속도가 맞아떨어져야 잔다르크와 정은채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적절하게 앵글에 잡힐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감독과 촬영감독이 계속 의견을 주고받으며 시도를 거듭한다. 그사이 좀전까지만 해도 해맑던 정은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녀는 소리도 없이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다. 스크린 속 잔다르크와 함께. 두 여인의 얼굴이 꽤나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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