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
[청춘스케치] 잉여롭고 놀라운 형제가 나타났다
2014-04-24
글 : 주성철
사진 : 최성열
‘제2의 류승완, 류승범 형제’라 불리는 <잉투기>의 엄태화, 엄태구 형제
왼쪽 엄태구, 오른쪽 엄태화

'제2의 류승완, 류승범 형제'라 불리는, 역시나 감독과 배우라는 조합을 갖춘 형제가 있다. 11월14일 개봉한 <잉투기>의 감독 엄태화와 동생이자 배우인 엄태구의 이야기다. 이른바 ‘정가 형제’의 <기담>에 각각 연출부와 단역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도 묘한 운명처럼 느껴진다. <기담>(2007)의 단역으로 출발한 동생 엄태구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엄태화 감독은 바로 그 동생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잉투기>를 통해 충무로를 향한 ‘한방’을 장전했다. 그들의 유년기 기억부터 단편과 장편을 이어 이제 막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로 그 '엄가 형제'를 소개한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모 영화사가 마련한 파티가 무르익어 야심한 시각에 이를 무렵, 몇몇 감독들이 그 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한 한 영화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박찬욱 감독은 “옛날 내 영화 <친절한 금자씨>랑 <파란만장>연출부를 했던 친구인데, 하여간 나는 모르는 이상한 세계더라고. 뭔가 새로운게 있어”라고 했고, 한참을 듣고 있던 류승완 감독은 또 다른 형제 감독과 배우의 등장이라는 소식에 “우리 형제 살기도 빡빡한데 왜 자꾸 그런 친구들이 새로 등장하는지, 거참 아예 싹을 잘라놓든가 해야지, 원”이라며 웃었다. 그렇게 여러명이 보지 못한 ‘번외의 화제작’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보다 ‘형제’라는 점에서 류승완, 류승범 형제와 비교되는 것에 대해 엄태화 감독은 “류승완, 류승범 선배님들은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그런 비교를 할 때마다 정말이지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비교지만, 가문의 영광’이라고나 할까. <잉투기>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세상에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형제의 첫 합작품 <잉투기>는 ‘ING+투기, 우리는 싸우고 있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잉’에서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표현은 바로 ‘잉여’다. 형은 영화감독, 동생은 영화배우, 그렇게 두 사람도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잉여로운’ 날들을 보낸 적 있다. 홍익대 광고디자인학과를 다니던 엄태화는 어딘가 학과 공부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무작정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고, 딱히 간절히 영화배우를 꿈꿨던 것은 아니지만 ‘어려서도 튀게 생겨 아역 배우 해보라는 말을 꽤 들었던’엄태구는 건국대학교 영화학과를 무려 3수 끝에 합격했다. 고등학생 때 공부가 싫어 미술을 시작했던 형과 역시 공부가 싫어 연기학원에 다니던 동생은 그렇게 조금씩 영화를 향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의외로 빨리 이뤄졌다. 그들이 맨 처음 영화 촬영현장에서 만난 건 엄태화가 선배의 영화 현장에서 붐마이크를 들고 있던 때였다. 마침 배우로 고교생이 필요해 엄태화는 동생을 추천했다. 비용이 부족해 현상을 하지 못하면서 그 둘의 첫 작업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지만, 엄태화의 머릿속에는 “손발이 오글거려서 아는 사람이 연기하는 모습은 도저히 못 쳐다보겠더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엄태구 역시 “필름 작업이어서 어색하게 나와 카메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계속 쟀던 기억이 난다”며 “필름이 비싸서 NG를 내면 돈 나간다는 얘기에 무진장 긴장했던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고 거든다. 두 사람 모두 그 결과물이 세상이 없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눈치다.

‘류가 형제’와 비교할 때 ‘엄가 형제’의 가장 다른 점, 그것은 그들이 너무 수줍음이 많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평소의 수줍은 애틋함이 깊게 응축됐다가 영화의 에너지로 발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대화는 별로 없다. 어려서도“밥 먹었냐”, “응, 알았어”라는 대화가 주를 이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나면 시선을 돌리고 각자의 일을 했다.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누구나 남자형제 둘이서 별로 할 얘기가 없지 않나”라고 입을 모은다. 게다가 동생이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거의 붙어 있을 시간도 없었고, 또 함께 붙어 있을 만하면 한 사람이 군대를 가면서 또 떨어져 지내게 됐다. 그래서 엄태화가 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거의 떨어져 지냈다. ‘형이 유난히 만화를 잘 그렸다’, ‘동생은 배우 하라는 소리를 꽤 들었다’는 것 정도가 둘의 현재를 설명해주는 연결선이다.

<잉투기>는 ‘잉여’라 불리는 키보드 파이터들이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하는 격투기 도전의 이야기다.

감독지망생 형과 단역으로 경험을 쌓은 동생 학교를 휴학하고 <몽정기>(2002) 제작팀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던 엄태화는 졸업과 동시에 박찬욱 감독과 함께하며 본격적인 충무로 생활을 시작했다. 첫 작업은 ‘화면에 금붕어가 날아다니던’ 이승렬의 뮤직비디오 <시크릿>이었다. 이후 박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2004), <친절한 금자씨>(2005)에도 연출부로 참여했는데, 그 인연으로 <쓰리, 몬스터> 조감독이었던 정식 감독 형제의 입봉작 <기담>에서도 일하게 됐다. 이때 가장 큰 공부가 된 것은 자신이 ‘영화광’이 아니라는 정체성의 파악이었다. “연출부들이 모여서 코언 형제, 키아로스타미 감독 영화 얘기를 하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재밌어 보이는 감독이나 영화제목이 나오면 나중에 찾아보며 공부했다. 그게 너무 재밌었다. 한 선배는‘너는 코언도 모르냐’며 핀잔을 줬지만, ‘(그런 영화들을 아직 안 봤기에) 네가 아직 생의 큰 즐거움을 남겨두고 있는 것 같아 부럽다’고도 했다. (웃음)”

한편, <기담>은 두 사람이 다시 조우한 현장이기도 한데, 그저 혈연과 지연으로 엮인 단편 작업이 아니라 첫 번째 메이저 영화현장이었다고나 할까. 엄태구가 말년휴가 때 형의 권유로 오디션을 봤고 제대와 동시에 ‘일본군1’로 캐스팅됐다. 말하자면 제대와 동시에 취직이 된 셈인데, 그 첫 번째 ‘사회생활’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엄태구가 산에서 일본군 장군(김응수)에게 옷을 갖다주고는 격렬하게 ‘뒤로돌아’를 한 뒤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는 지금도 외고 있는 그 일본어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며 당시를 재연했다. 하지만 옷을 가져왔다고 하는, 집에서 수백번도 넘게 연습했을 그 짧은 일본어 대사를 계속 틀렸고 겨울이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름 ‘충무로 상업영화 데뷔작’을 망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엄태구는 견딜 수 없는 ‘멘붕’이 와서 일본 군복을 입고 어깨에 총을 찬 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더니 저 멀리서 자신을 쳐다본 등산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직 2차대전이 끝난지도 모르고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 혼자 남아 살아가던 일본군의 모습이 그러했을까. 하지만 <기담>은 ‘3수 끝에 영화과에 들어간’ 엄태구의 오기를 살려준 작품이기도 하다. 제대하면 극단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영화를 좀더 해보기로 했다.

두 번째 작품은 ‘역시나 대사가 한줄뿐이었던’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2008)다. 전남 순천까지 가서 달랑 대사 하나만 하고 올라왔지만, 데뷔작에 비해서는 너무나 능숙하게 NG도 없이 촬영을 끝냈다. 이후 <무료항공권>(2009) 같은 단편영화를 비롯해 <심야의 FM>(2010)과 <악마를 보았다>(2010)의 ‘형사 아무개’ 등 수많은 작품들에 얼굴을 비쳤다. 비중보다는 경험이 중요했다. 이때 형 엄태화는 제대로 된 잉여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는데, 가끔씩 집에 가서 엄마에게 ‘형, 어디 갔어?’라고 물어보면 늘‘카페에 갔다’고 하더라. 스스로는 ‘감독 지망생’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들이 볼 때는 그냥 ‘백수’였다. 정말 안타까웠다. (웃음)”라며 당시를 회고하자, “그땐 용인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멀리 서울 종로까지 나가서 카페에 가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힘들게 나가면 스스로 그 시간과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집중해서 일할 수 있었다. 잘 풀리지 않으면 낙원상가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서 영화를 봤고 근처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정가 형제 중 정범식 감독님도 아트시네마 단골이라 자주 만났는데, 그때도 ‘네 일본군 동생, 지금은 잘하고 있냐’라고 물어오셨다. (웃음)”는 형의 풋풋한 기억이 이어진다.

유숙자

제2의 ‘류가 형제’라는 이름을 갖게 해준 영화 <숲> ‘형 연출, 아우 출연’의 본격적인 첫 작업은 바로 단편 <유숙자>(2010)다. 서울독립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올랐던 이 작품에서, 엄태구는 ‘집이 있는 노숙자’로 나와서 구걸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머리를 박박 밀고 목욕하는 장면을 연기했다. 이후 엄태화 감독의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는 ‘이방인’ 혹은 ‘꿈과 현실의 경계’라는 테마가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원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었는데, 영화에서 머리를 박박 미는 장면을 추가하자 도저히 할 수 없겠다고 해서 동생에게 부탁한 것. 형은 옴니버스영화 <도쿄!>(2008) 중 레오스 카락스가 연출한 <광인>의 드니 라방 같은 느낌을 원했고 “자를래?”, “응”, 그렇게 <유숙자>가 만들어졌다. 이를 포트폴리오 삼아 엄태화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됐다. 형제의 첫 번째 역사는 그렇게 쓰여졌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된 엄태구 주연, 김중현 감독의 <가시>(2011)와 지난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한 엄태화 감독의 <숲>(2012)은 두 사람에게 ‘류승완, 류승범의 뒤를 잇는’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해줬다. <숲>은 한 남자(정영기)의 콤플렉스로 인해 친구(엄태구)가 위험에 빠지는 내용으로, 그 남자는 자신의 행동이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가시>는 언제나 깡패나 건달 등 인상 강한 역할로 출연하던 엄태구의 ‘맨 얼굴’을 보여준 영화다. 엄태화는 “동생의 그런 얼굴을 나도 처음 봤다. 나도 동생을 데리고 그런 영화를 해보고 싶은데, <숲>이나 <잉투기>도 그렇고 늘 나부터가 동생에게 ‘센’ 역할만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엄태구는 “<유숙자>와 <숲>을 보면서는 형과 동생 관계를 떠나, 나 스스로 관객으로서 시나리오를 너무 재밌게 읽었다. 게다가 그림을 잘 그려서 정말 완벽한 콘티를 보여주는데 그게 놀랍다. 뭐지? 이대로만 나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형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말한다.

엄태화는 <숲>이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으로 발표되던 순간, 자기 옆에 있던 엄태구가 자신의 무릎을 탁 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문자메시지도 큰 힘이 됐다. 박찬욱 감독이 마침 <스토커> 작업으로 미국에 체류 중이었는데 “올해 대상 받았다는 엄태화가 너냐?”라고 물어오셨고, “부끄럽지만 접니다”라고 답하자 “옳거니!”라는 짧고 굵은 문자가 돌아왔다. 동생이 자신의 무릎을 탁 쳤을 때 내질렀을 법한 소리가 그 문자에 활자로 찍혀 있었다. 그는 지금도 그 감촉을 잊지 않으려 한다. <숲> 이후 여러 편에 출연한 엄태구 역시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에서 특수공작부대 총교관(손현주)의 오른팔로 출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산동네 촬영장에서 친해진 꼬마들에게 처음으로 사인을 해준 영화이기도 하고, 이른바 ‘대선배’ 손현주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배움을 받았다. 이제 형은 <잉투기> 이후 두 번째 장편영화를 준비 중이고, 동생은 내년 초 방영 예정인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TV드라마 <감격시대>를 맹촬영 중이다. 물론 그보다 앞서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을 통해 만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본격적인 ‘엄가 형제’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옳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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