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이었던 <한공주>와 <셔틀콕>이 일주일 차로 개봉한다. <한공주>는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열일곱 소녀 한공주(천우희)의 마음을 따라가고, <셔틀콕>은 보험금 1억원을 들고 도망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누나를 쫓는 열여덟 소년 민재(이주승)의 시점을 따라간다. 두 영화 모두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이고, 배우의 얼굴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조금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한공주>는 남성감독이 소녀의 심경을 들여다보는 영화이고, <셔틀콕>은 여성감독이 소년의 심정을 묘사하는 영화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이 <셔틀콕>의 이주승을, <셔틀콕>의 이유빈 감독이 <한공주>의 천우희를 인터뷰해 보아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들 흔쾌히 이 크로스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이어지는 기사 참고). 인터뷰는 애초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했다. 대신 더 풍요로운 대화가 4명 사이에 오갔다. 3라운드에 걸쳐 진행된 <한공주>와 <셔틀콕>의 크로스 인터뷰를 전한다.
ROUND 1
이유빈-천우희 “사연 있는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이유빈_(고향이) 이천! 오빠 있고!
천우희_어떻게 아세요?
이유빈_<마더> 했던 남성호 PD님이랑 최근에 몇번 만났는데 우희씨 칭찬을 하더라고요. 또 <셔틀콕> 촬영한 친구가 <써니>의 이형덕 촬영기사님 퍼스트였고, 제가 <회사원>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이형덕 기사님이랑 같이 작품도 했고. 그때 <써니>도 찾아 봤어요. 개봉 지나서 보니까 상미(본드걸)가 제일 눈에 띄더라고요. 착하고 순진한 인물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그때부터 천우희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셔틀콕>과 <한공주>는 굉장히 다른 영화지만 영화 외적으론 비슷한 점이 많은 영화잖아요.
천우희_맞아요. 게다가 이주승씨 스타일리스트랑 제 스타일리스트가 같아요.
이유빈_<셔틀콕>이 2012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상반기 제작지원작인데, 그때 이수진 감독님이랑 면접을 같이 봤어요. 경쟁자니까 주시하고 있었죠. 근데 남자분이더라고요.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두 영화가 같이 공개되고, 개봉 시기도 비슷하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상을 나눠 받고. <셔틀콕>은 주승씨가 배우상을 받고, <한공주>는 촬영상 받았는데, 여러 가지로 재밌는 인연이란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독립영화를 볼 때 늘 걸리는 게 완성도인데, 그중에서도 일정선 이상으로 만족을 못 주는 게 연기와 미술인 것 같아요. 돈이 없으니까. <한공주>는 확실히 만듦새에 있어서 ‘힘들게 찍었으니까 감안하고 봐주세요’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엔 두말할 것 없이 극을 빈틈없이 채워준 우희씨의 연기가 큰 축을 차지하고요.
천우희_감사합니다. 상업영화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비교를 하면, <한공주> 때는 예산이 부족해서 밥 먹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촬영하는 한달 반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촬영했거든요. 그래도 고생을 공유하면서 단단해지더라고요.
이유빈_저희는 지방 돌아다니면서 먹는 건 잘 먹었는데. 횟집에서 촬영 협조를 받는 대신 우리 스탭들이 비싼 회를 시켜 먹겠다, 그렇게 딜을 하는 거죠. 물론 스탭이 적었어요. 배우 포함해서 15명, 아역배우 어머니 포함해 16명이서 여행하듯 다니며 찍었으니까. 봉고차 2대, 소품차 1대, 아역배우 어머니 차 1대. 총 4대에 짐이랑 기자재 다 때려넣고 3주간 지방 돌아다니면서 찍었어요. 그러 니 몰입도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나마 제가 자랑할 거라곤 스탭들 돈 잘 챙겨준 거? 제작비의 1/3 이상을 인건비로 책정했으니까. 멀리 보면 사람한테 잘하는 게 이득인 것 같아요. <한공주> 현장은 어땠어요.
천우희_현장에서 외로웠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영화가 총 107신이었고 몽타주 한신 빼고 전부 제가 나왔어요. 쉴 틈도, 외로울 틈도 없었어요. 촬영할 때도 혼자 있고 싶진 않더라고요. 몰입해서 감정을 잡아야 하는 장면이 많았지만 사람들이 제 감정 신경쓰면 그게 더 불편하고 싫었어요.
이유빈_우희씨는 사연 있는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행복한 인물, 사랑받고 자란 인물은 연기한 적이 거의 없는데 해보고 싶은 역할이 따로 있을 것 같아요.
천우희_유쾌한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인물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한공주>는 다루는 이야기가 이야기인지라 특정 단어들을 보게 되면 마음이 힘들어지더라고요. 바로 다음 작품은 좀 유쾌한 걸 해보고 싶어졌어요.
이유빈_찍을 땐 힘들 것까지는 생각 못했어요?
천우희_촬영한 지 2년이 지났는데, 시간이 흐르고 영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공주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힘들어지더라고요. 촬영 초반엔 이수진 감독님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혹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면 어떡하나, 얘기 많이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배우로서 마음을 다해 연기하는 것밖에 없었고요.
이유빈_주승씨는 호락호락하거나 편한 타입은 아니었어요. 보통의 배우들은, 표현이 좀 그런데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감독님 말씀이면 믿겠습니다’ 하는데, 주승씨는 그런 게 없었어요. 첫 테스트 촬영하고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얘가 하기 싫은데 이러고 있나.’ 비중 있는 롤을 맡은 배우하고 내면적으로 어디까지는 연결이 돼야 하는데 초반엔 그런 연결 고리를 못 찾았던 것 같아요. 어색한 상황에서 촬영을 시작했어요. 서울에서의 1, 2회차 촬영이 완전 엉망이었는데, 주승씨는 워낙 독립영화 경험이 많으니까 이거 완전 밀렸다 싶었죠. 주승씨와의 대화의 90% 이상은 촬영이 끝나고 나서 했던 것 같아요.
천우희_이수진 감독님도 말씀이 없으세요. 준비 단계에서 얘기를 많이 했는데 감독님은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어요. 제가 느낀 것들을 쭉 얘기하면 ‘음, 그래’ 하고 약간 동조해주실 뿐. 현장에서도 그다지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았는데, 서로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유빈_중요한 주파수만 맞으면 가벼운 잡음이 들어가는 건 문제 되지 않는 거 같아요. 잡음까지 미세하게 맞추려다보면 완전히 엇나갈 수도 있으니까.
천우희_이건 처음 얘기하는 건데, 감독님이 저를 한번 떨어뜨리셨어요. <한공주> 시나리오 읽자마자 이거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떨어졌다는 거예요.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다 일주일쯤 뒤에 PD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감독님이 생각을 바꾼 것 같다고. 그러고 다시 만났을 때 “감독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신 것 같다”고 했죠.
이유빈_우스갯소리로, 별볼일 없는 여자가 재벌집 남자 뺨 때리면 재벌남이 ‘이런 느낌 처음이야’ 하잖아요. 캐스팅도 그와 비슷한 데가 있어요. ‘예, 잘하겠습니다’ 이러면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절박하면 재미없어요. 머릿속에서 1년 넘게 늘 생각했던 인물, 이상형처럼 그리고 있던 인물을 현현시켜주는 사람을 찾는 거니 제가 봤을 때 매력적인 사람이어야 하고.
천우희_열심히 했는데 안 되면 운이 없는 거지 뭐, 그러고 마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오해도 종종 사요. <마더> 때도 ‘쟤는 뽑히러 온 건가 뭔가’ 싶으셨대요. 열심히 준비해서 연기를 잘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 얼마나 간절한지 이건 어필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저 말고도 간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좀 편하게 보는 편인데 그런 모습이 종종 싸가지 없게 보이기도 했나봐요.
슬슬 재밌는 얘기가 나오려던 찰나, 사람들이 모두 모였으니 단체사진 촬영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인이 들어왔다. 절대적으로 인터뷰 시간이 부족했다. 애초 이유빈 감독이 배우 천우희에게, 이수진 감독이 배우 이주승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려던 크로스 인터뷰는 꼬이고 말았다. 이수진, 이유빈 감독은 오후 4시에 한겨레신문사와 인터뷰가 잡혀 있었는데, 사진 촬영을 모두 마치니 3시20분이었다. 결국 미처 인터뷰를 마무리 짓지 못한 이유빈 감독과 천우희도 한 테이블에 불러 앉혔다. <셔틀콕>의 감독, 배우, <한공주>의 감독, 배우 4인이 모였다. 인터뷰 2라운드가 시작됐다.
ROUND 2
이수진-이주승-이유빈-천우희 “죽음을 맛본 적은 없죠?”
천우희_감독님이 저 떨어뜨렸다고 폭로했어요.
이수진_잘했어. 나이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시나리오 쓸 때 제가 생각한 공주의 최대 나이치가 21살이었는데 그걸 훌쩍 뛰어넘더라고요. 속으로 ‘왜, 왜 나이가 많은 거지’ 그랬으니까. 그게 제일 큰 걸림돌이었고 그외엔 다 좋았어요. 고지식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배우의 나이가 너무 많으면 남한테 거짓말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어요. 근데 마음이 바뀌었죠. 어린 친구를 원했지만 전 배우를 굉장히 몰아붙일 것이고 어린 배우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이유빈_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는데 남자는 군대 갔다오면 변한다잖아요.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다 본 그 눈을 카메라에 담는 게 걸렸어요. 십대의 불안한 눈빛, 몰라서 갈팡질팡하는 그 눈빛이 좋은 건데 군대에서 후임들 갈구고 나와서 18살을 연기한다는 게 끌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나만의 기우일 수 있다고 느꼈고 결과적으로 ‘어디서 이렇게 연기 잘하는 18살짜리 배우를 구했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전 캐스팅하려고 군대 면회까지 갔다니까요. 호두파이 사들고. 그때 주승씨가 ‘싸이월드’를 열어놓고 있었는데, ‘현재 상태 슬픔’ 그 아래 제대 날짜를 적어놨어요. 10월28일. 11월1일에 우리는 크랭크인 해야 하는데 28일 제대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포기하려다가 말년휴가가 2주 이상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싸이월드에 글을 남겼죠.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그런데 운전은 할 줄 아시나요?’
이주승_군대 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시나리오 읽고, 궁금한 것 메일 쓰고, 처음엔 그랬어요.
이수진_근데 주승씨는 지금 봐도 고등학생 같아요. 군대 갔다왔다는 게 안 믿겨. 저는 <셔틀콕> 보면서 우리보다 힘들었겠다 싶었는데. 우리는 정해진 곳에서 약속대로 움직이면 됐지만 <셔틀콕>은 계속 이동을 해야 했고 즉흥적인 것도 많았을 것 같고. 연출자가 중심을 잘 잡았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유빈_연출자로서 좋은 마인드는 아닌 것 같은데, 영화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골인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배우들이 대사 NG 같은 건 안 내니까 테이크도 많이 가지 않았고, 생각하던 것의 85%만 건지면 OK했어요.
천우희_이수진 감독님은 한컷당 15테이크씩은 꼭 갔는데. 어느 순간은 좀 지치더라고요. 나중엔 이게 감독님의 성향이란 걸 알고 받아들였지만요.
이유빈_주승씨는 <셔틀콕> 촬영 기간에 중요한 오디션이 겹쳐서 힘들었을 거예요.
이주승_<방황하는 칼날> 오디션을 6차까지 봤거든요. 지방에서 촬영하다 서울 가서 오디션 보기를 반복했는데, 당진 마을회관이었나. 마을회관에서 스탭들이랑 같이 자고 있었는데 새벽에 ‘축하한다 두식아’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죠. 그때 스탭들 다 깨워서, 붙었다고 소식 알리고 그랬죠. (두식은 <방황하는 칼날>에서 이주승이 연기한 캐릭터 이름이다.)
이유빈_지방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오디션을 봐서 거의 막바지 촬영 때쯤 붙었으니까 심적으로 부담이 없진 않았을 거예요.
이수진_감독은 싫었겠다.
이유빈_의심 많이 했어요. 주승씨가 차에서 뭘 보고 있는데, ‘<방황하는 칼날> 시나리오 보고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도 들고. 하루는 감독으로서 판단력을 잃고 다음날 오전에 오디션이 있다기에 한신을 덜 찍고 보내줬어요. 스탭들은 연출자가 제정신이냐면서 뭐라 했죠. ‘니가 지금 두 시간 일찍 보내준다고 배우가 고마워할 것 같냐, 영화가 잘 나와야 좋아하지’라면서. 그런데 확실히 프로페셔널한 배우더라고요. 편집실에서 주승씨 연기 다시 보는데, 의심한 게 미안해질 정도였어요.
이수진_천우희도 똑똑했어요. 준비를 많이 해오는 편이었고 이해가 빨랐어요. 테이크를 많이 가다보니 거기서 오는 어려움이 분명 있었을 텐데 갈수록 좋아지니까 저는 그럴 수밖에 없었죠. 본인은 지친다고 하는데 지친 모습이 오히려 더 좋았을 수도 있고. 그리고 일차원적인 건데 그렇게 찍어야 하는 영화였어요. 많이 찍는다고 꼭 진실된 모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 또한 영화에 필요한 부분이었어요.
천우희_절 죽일 뻔했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수조 세트에서 촬영한 건데, 차가운 물속에 교복만 입고 들어갔어요. 물이 닿을 때마다 숨이 콱콱 막히는데 그렇게 8시간 넘게 찍었어요. “감독님 저 이제 진짜 못하겠어요” 그러면 “음, 그래 한번만 더 하자. 그래 이게 끝이야 끝” 그러시고. 어떻게 그렇게 평온한 목소리로 말씀하실 수 있는지.
이수진_모든 스탭들이 안타까워하니까 내가 막 미안해할 수 없더라고. 대신 손잡아줬잖아. “괜찮지?” 이러면서 뜨거운 물 한번 부어주고.
천우희_‘괜찮지, 한번 더 할 수 있지?’ 이런 뜻이었죠.
이주승_테이크 여러 번 가는 감독님은 만나봤는데….
천우희_죽음을 맛본 적은 없죠?
이주승_있어요. <간증> 찍을 때 얼음물에서 몸이 묶인 상태로 따귀를 140대 맞았는데 딱 1년 동안 삼겹살 못 먹었어요. 턱이 빠져서.
천우희_난 아무것도 아니네.
이주승_실신 직전까지 가서 다음날 다시 맞았어요. ‘이게 연기인가. 이렇게 고되고 힘든 길인가. 죽음 직전까지 가야지 연기인가.’ 그런 점에서 <셔틀콕>은 꿀이었죠, 꿀촬영.
이수진_<셔틀콕> 보고 그 장면에서 놀랐어요. 민재가 누나에게 “기형아나 낳아버려”라고 말하던. 대사 자체가 너무 셌고. 그다음에 주승씨가 누나 머리를 지그시 누르는데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했어요.
이주승_그 말의 의미는 내가 당한 것만큼 너도 당해봐, 이런 거였거든요. 처음 사랑이란 걸 하면 자기가 아프고 슬픈 것들이 화로 느껴질 때가 많잖아요. 아픈 건지도 모르고 화만 나고. 그걸 풀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복수는 해야겠고. 누나가 임신한 상황에서 민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 그거라고 생각했어요. 머리 쓰다듬는 건 이겼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어요. ‘네가 나보다 어려. 네 사랑이 내 사랑보다 어려’ 그런 느낌. 배신감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이수진_극중 동생인 김태용군하고 옥신각신하는 것도 굉장히 재밌었어요. 형 같기도 하고, 아빠 같기도 하고. 영화 밖에서도 그랬을 것 같은데.
이유빈_싸운 얘기 좀 해줘.
이주승_영화 안과 밖이 똑같았어요. 놀리고, 울면 달래주고. 귀찮다가도 몇 시간 안 보면 보고 싶고. 태용이는 어머니가 잘 챙겨주시니까 스탭들이 저를 많이 챙겨줬거든요. 매니저도 없고 하니까. 그런 거 보고 태용이가 질투도 좀 했어요.
이유빈_남해 보리암에서 촬영할 때였는데, 주승씨도 본인 연기를 준비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태용이는 친해졌다고 자꾸 기어오르는 거죠. 주승씨가 먼저 ‘귀뺨 때리기’로 도발했고, 얘도 복수는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돌을 던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주승씨가 꽥 소리를 질렀더니 그거 갖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 애증의 관계가 연기에도 묻어난 것 같긴 해요.
이주승_보리암에서, 태용이가 저 뒤에서 밀려는 장면 있잖아요. 그렇게 싸운 다음날 그 장면을 찍었는데 얘가 진짜로 밀까봐 엄청 두려운 거예요. 절벽이라 떨어지면 끝인데.
이수진_벌써 마지막 질문인데 식상한 질문을 좀 하자면, 이주승 배우에게 볼살이란?
이주승_볼살이란… 빠질 때도 됐는데 안 빠지는, 내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숙제?
이수진_시간이 지나면 극복될 거예요. 오늘 주승씨 보면서 천우희하고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눈매라든지 표정이라든지. 표정이 참 많아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고.
이유빈_둘 다 사랑받는 역할 좀 했으면 좋겠다.
이주승_누가 나 사랑하는데 거부하는 그런 것 좀 해보고 싶어요.
천우희_나도.
이수진_그럼 둘이 멜로 찍으면 되겠네.
천우희_그거 좋네요.
감독들이 자리를 떴다. 다행히 배우들은 이후 일정까지 여유가 있었다. 스타일리스트를 공유하던 사이인 천우희와 이주승은 이날 처음 인사를 나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천우희와 초면엔 좀 무뚝뚝해 보이는 이주승은 솔직하게 자신들의 고민을 주고받았다. 배우로서 비슷한 태도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20대의 두배우는 제법 잘 어울렸다.
ROUND 3
이주승-천우희 “행복합니다”
천우희_89예요?
이주승_네. 제가 두살 어려요. 부산영화제 때 스치면서 봤는데.
천우희_저 봤어요?
이주승_네, 옷깃 스쳤어요. 비전부문 작품 소개하는 자리에서. 저는 여태까지 여배우를 보면서 저 배우랑 같이 작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한공주> 보면서 ‘저 배우랑 나랑 뭉치면 장난 아니겠는데’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천우희_와, 좋다.
이주승_여자주인공으로 항상 추천할 테니까 앞으로 남자주인공으로 저 추천해주세요.
천우희_요즘 계속 물어보시더라고요. 성인 역할 하게 되면 누구와 호흡 맞추고 싶냐고. 이제 주승씨 얘기해야겠네요. 근데 전 학생 연기를 하면서 부담까진 아니어도 성인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거든요. 주승씨도 그랬는지.
이주승_같은 마음일 거예요. 이번에 20대 역할을 네 번째로 맡았는데, 새로 시작한 느낌이에요. 여태까지 어린애들 다 제치고 고등학생 역할 많이 꿰찼는데,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극복하려면 분명 제 노력이 필요하고. 작은 역할이라도 당분간은 20대 역할을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천우희_<카트>에서 처음 20대 연기를 했는데, 거기선 제가 애였어요. 다 대선배님들이라. 돌이켜보면 제가 봐도 성숙하지 못한 점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성숙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들이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민재랑은 닮았나요?
이주승_항상 인물과 합의를 봐요. 너무 나로서 연기하면 나만 보여준 게 되고, 인물로만 연기하면 그건 이주승의 연기가 아닌 게 되고. 그래서 합의를 봐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요. 저와 (인물이) 비슷하면 더 좋죠. <셔틀콕>의 민재는 많이 비슷했어요. 첫사랑의 감정도, 불안한 심리도. 군대 제대하면 진짜 불안하거든요.
천우희_전 인물 만들 때 나와 캐릭터를 많이 분리하는 편이에요. 결국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지만 최대한 분리해서 창조하려고 해요. 분리해서 몰입하고, 몰입한 뒤엔 나로 돌아오죠. 그런데 실제의 나와 비슷한 인물을 연기한 적이 없어요. 공감할 여지가 많은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고.
이주승_원래 성격은 어때요?
천우희_평범해요. 자아성찰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한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해선 생각 안 해요.
이주승_남의 시선 많이 신경쓰는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통화도 못해요. 내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 다 들리잖아요. 부러워요. 남의 시선 신경 안 쓰고 자기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천우희_그럼 주승씨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주승_배우가 마인드만 안 달라지면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의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제 꿈이에요. 초심은, 어떤 작품을 할 때 누구도 따라올 수 없고, 누구도 이 작품을 말할 때 나를 빼놓고 말할 수 없게 연기하는 거. 그러려면 정말 틈나는 대로 대본 보고 분석하고 생각해야 해요.
천우희_마인드가 중요하다고 하는 건 결국 연기의 진정성과도 통하는 것 같아요. 진정성에 더해져야 할 건 흥미고요. 배우들은 하기 싫으면 하기 싫은 티가 나고, 하고 싶으면 신나서 하는 게 보여요.
이주승_혹시 배우 말고 다른 꿈이 있어요?
천우희_배우를 안 했다면?
이주승_제2의 직업이라든지.
천우희_없어요. 싫증을 잘 내는 편인데 이상하게 연기만큼은 싫증이 안 나요.
이주승_저도 없어요. 원래 감독이 꿈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하나만 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잘하는 게 없어요. 남들이 연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냐고 그래요. 그래서 한눈팔 수가 없어요.
천우희_(연기할 수 있어) 행복하죠?
이주승_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