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크고 움푹 들어간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눈은 그녀의 얼굴 전체에 불안감을 드리운다. 이 눈 때문인지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연약한 내면과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내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그리고 물론 적지 않은 영화에서 단순한 ‘긴장’ 이상의 신경증적 연기까지 펼쳐야 했다. 불안감 이상의 히스테리를 연기하는 것은 배우로서 기꺼이 도전해볼 만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짐이기도 하다. 그 강렬한 연기의 잔상이 길게 남아 다른 장면에서 다른 감정을 연기할 때도 계속 그 그림자를 남기는 것은 물론, 연기 자체가 1회용 도구처럼 소모될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을 넘나들며 60편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역시 이와 비슷한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불안을 담아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그녀의 깊은 눈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마른 몸은 여러 감독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부서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슬픔이나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을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 그녀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로만 폴란스키의 <비터문>(1992)만 보아도 그렇다. 남자주인공의 성적 환상을 대담하게 표현해낸 이 영화에서 토머스는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정신을 파는 남편(휴 그랜트) 옆에서, 등장하는 장면마다 불편한 심기를 연기해야 했다. 매력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건 다른 여배우(에마뉘엘 세이그너)의 몫이었고, 그녀는 단지 남편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인내하는 역할만 소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출연한 <벨 아미>(감독 데클란 도넬란, 2012)나 <쇼퍼홀릭>(감독 P. J. 호건, 2009) 같은 영화들 역시 감독들이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란 배우를 어떻게 상투적으로 ‘사용’하는지 잘 보여준다. 즉 차갑고 예민하며 신경질적인 여성 스테레오타입에 그녀를 캐스팅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영화들 속에서도 토머스는 성실한 연기로 자신의 존재를 빛내지만 영화가 그녀의 이미지를 소품처럼 간단히 사용한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이런 연기에 대해 토머스가 느꼈을 법한 피로감은 그녀의 말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녀는 당분간 작품 활동을 쉬고 싶다며(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종종 엉성한 촬영 과정에 일종의 ‘무게’를 실어주기 위한 연기를 요구받아요. (…) 그들은 제가 할 수 있는, 눈에 띌 만한 작은 역할을 줘요. 적재적소에서 눈물 흘리는 것과 같은 연기 말이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런 연기를 계속 해왔는데, 지난해 갑자기 삶이 너무 짧다는 걸 깨달았어요. 더이상 이런 연기를 할 수 없어요.”
누가 보아도 뛰어난 매력을 가진 배우가 “무게를 실어주기 위한 연기”만을 요구받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물론, 그녀는 주어진 역할을 수동적으로 연기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연기를 시도하며 꾸준히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중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린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감독 마이크 뉴웰, 1994)은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차가운 이미지가 어떻게 변주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인 찰스(휴 그랜트)의 오랜 친구인 피오나를 연기한 토머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녀의 이미지 중 하나, 즉 자로 대고 자른 듯한 단발머리, 세련된 옷과 함께 도도한 인상을 연기하며 드라마에 자신만의 색깔을 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짝사랑 고백과 셀프 거절신’에서 자신이 단지 차갑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여린 감수성을 그 뒤에 숨기고 있음을 드러내며 이 신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리고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다. 줄리엣 비노쉬, 레이프 파인즈, 윌렘 데포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이 한꺼번에 출연한 이 영화에서 이야기의 핵심인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를 이끌어간 건 단연 토머스였다.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을 가진 유부녀 캐서린을 연기한 그녀는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예의 그 불안한 눈빛을 선보이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순간마다 그 불안조차 넘어서는 열정을 연기하며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비극적인 캐릭터를 빚어냈다.
또한 2000년대 접어들어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준 출연작 중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감독 필립 클로델, 2008)이다. 이 영화가 그녀에게 특히 중요한 건 그녀가 단독 주연을 맡아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감정을 혼자서 모두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로 15년간 감옥에 있었던 줄리엣은 자신이 감추고 있는 비밀의 크기만큼 선명한 불안을 드러낸다. 경계심 섞인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어린아이에게 갑자기 소리지르는 그녀의 연기는 우리가 이미 다른 영화에서 봤던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토머스는 그 연기의 조각들을 한자리에 모아 자신만의 호흡으로 다시 정렬한다. 다시 말해 한 신에서 끝나는 짧은 호흡의 연기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에서 각자 다른 감정을 세밀하게 조율하며 눈에 보이는 불안과 신경질적인 반응 뒤에 숨은 그녀의 상처 입은 내면을 짐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영화는 최근 개봉한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온리 갓 포기브스>이다. 개연성 있는 서사와 사실적인 인물 묘사 같은 건 처음부터 걷어낸 채, 넘치도록 힘을 잔뜩 불어넣은 연출로 기묘한 매력을 만들어낸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주인공의 어머니인 크리스탈 역을 맡아 이 이상한 영화에 자신의 연기로 또 다른 기이함을 얹는다. 원래 그녀의 얼굴이 어땠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짙은 화장을 한 채 상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일단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더 인상적인 건 토머스가 이런 역할조차 그녀만의 방법으로 위엄 있게 소화해낸다는 것이다. 즉, 영화 속 그녀는 분명 과장된 캐릭터이지만 토머스는 그 과장된 묘사 자체를 자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으로 흡수하는 힘을 발휘한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경찰청장과 단둘이 대치하는 장면을 보자. 그녀는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안함을 드러내지만 이를 히스테릭하게 폭발시키는 대신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그 긴장을 필사적으로 얼굴 뒤편으로 숨기려 한다. 그리고 이때 짙은 마스카라와 함께 만들어진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은 분명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그녀의 새로운 얼굴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연기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연기는 뛰어나지만 더이상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멋대로 단정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매번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연기를 기대해볼 생각이다. 토머스는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며 “나는 그저 내게 이 역할을 맡기려 한 미친 사람(감독인 니콜라스 윈딩 레픈을 두고 하는 말이다)을 만나보고 싶었다”라고 농담을 섞어 말했지만, 그녀의 이 호기심이 다음에도 놀라운 인물을 연기하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차갑고 불안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의 연기와 함께 말이다.
magic hour
눈빛이 살아 있는 스파이
<온리 갓 포기브스>에서 그리스 비극의 인물과 같은 역할조차 능숙하게 연기해낸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이지만, 드물게도 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어색함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의 <미션 임파서블>(1996)로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이단 헌트(톰 크루즈)의 팀 동료 중 한명이었다. 즉 프로페셔널한 스파이를 연기한 것인데, 그녀가 이런 블록버스터영화에 출연한 것도 의외지만 그녀의 연기 역시 의외의 재미를 준다. 화려한 파티장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팀 동료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맞이하는 연기를 펼치는 그녀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여긴 어디? 나는 누구?’란 질문이 적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슬아슬한 연기에 관객조차 불안을 느낄 때쯤 곧 위급한 상황이 터지고, 그녀는 즉시 자신의 특기인 차가운 눈빛을 능숙하게 선보인다. 톰 크루즈의 동료 스파이를 연기할 때조차 그녀는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