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14 <인간중독> 2013 <9월이 지나면> 2011 <재난영화> 2010 <포커페이스걸>
연극 2013 <라뀔로뜨> 2011 <해무> 2010 <택시드리벌>
호기심은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의 선물이다. 좀더 알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이밀다보면 어느새 뒤로 뺄 수 없을 만큼 빠져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건 그런 거다. <인간중독>의 종가흔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아마도 그녀의 표정이 안개처럼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얼굴인데 어딘가 다르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떠올려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녀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스크린을 압도하는 대신 차갑고 촉촉해 기분 좋은 새벽안개처럼 층층이 쌓여 어느새 영화를 잠식한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순간 관객은 이미 이 묘령의 여인에게 중독되고 만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종가흔이라는 캐릭터에 피와 살을 돌게 하는 건 온전히 배우 임지연의 매력이다. 아직은 그것이 의도된 연기력이라고 선뜻 확신할 수 없다. 차라리 타고난 분위기라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임지연은 늘 말을 꺼내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푼쯤 속내를 감추고 있는 듯한 이 신인배우의 모호한 표정은 호기심이란 이름의 강한 인력을 품고 있다. 그녀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순간 이야기를 더 듣고 싶고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것이 <인간중독>의 종가흔인지 그녀를 연기하고 있는 임지연인지조차 헷갈린다. 그것이 완벽한 캐릭터 연기인지 적확한 캐스팅인지 구분하긴 어렵지만 임지연이라는 새로운 얼굴에 호기심을 느끼는 순간 당신도 이미 덫에 빠진 것이다.
임지연은 첫인상으로 누군가에게 확신을 주는 타입은 아니다. 김대우 감독이 신인인 그녀를 주연으로 과감히 캐스팅한 이유도 그 모호함 때문이었다. “어느 날 농담처럼 넌지시 나를 캐스팅한 이유를 물어봤다. 다른 여배우들은 이렇게 종가흔을 소화할 것 같다는 그림이 대강 그려졌는데 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 궁금해서 뽑았다고 하시더라”라는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종가흔이라는 역할 자체가 확신의 캐스팅보다 불확정적인 입체감이 필요한 배역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임지연을 위해 마련된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신인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가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당연히 부담이 됐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라는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어린 시절 뮤지컬 <캣츠>를 보고 배우의 꿈을 키웠다는 그녀는 부모님의 걱정 때문에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진학했지만 끝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입학해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양한 모습, 다양한 색깔을 지닌 단단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건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슬쩍 고개를 기울인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이 입체적인 얼굴의 여배우는 <인간중독>을 통해 검증된 멜로연기뿐 아니라 이미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재난영화> <9월이 지나면> 등의 단편영화에서 다진 기본기도 좋은 밑거름이다. “아직은 어리둥절하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많고 그만큼 배운 것도 많다.” 단 한 작품이지만 이미 많은 것을 보여줬고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 더 감추고 있을 것 같은 기대감. 한동안 한국 영화는 그녀를 계속 궁금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