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창의적 자극과 잉여의 이미지 사이
2014-05-2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 사람이 쓴 <한공주>의 찬/반 비평
<한공주>

1.

<한공주>는 지극히 양가적 감정을 일으키는 영화다. 모두에게 그러한 건 아닐 테고 내게 그러하다. 게다가 그 양가의 감정은 당황스럽게도 비율조차 동등하다. 한쪽에 있는 건 영화에 대한 찬사의 마음이다. 이 영화는 찬사를 받을 만한 탁월한 면모들을 많이 지녔으므로 그건 조금도 아까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 있는 건 어떤 소수의 장면들에 공감되지 않는 마음이다. 그 장면들은 적게 등장한다 해도 강력하고 강력할수록 더 공감되지 않는다. 지지하고 싶은 영화, 공감되지 않는 장면. 이런 경우에 흔히 옳은 건 장단점을 묘파하면서도 더 깊은 심도를 지닌 탐구의 장으로 옮겨가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각각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걸 택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극단의 판단이 각각 동등하게 확연하다면 그 양가적 상태를 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옳진 않아도 솔직할 순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한 사람에 의해 제출된 찬/반의 비평문, 이라는 짧지만 모순적이기 이를 데 없는 이 방식은 그러한 사정에서 나오게 됐다.

2. 찬(贊)

<한공주>의 장점은 무수히 많다. 적재적소에서 발휘되는 대사의 탄력성, 단단한 촬영 미학을 바탕으로 한 강렬한 인상의 앵글과 색감과 움직임들, 이음새 없이 매끄러운 구성력, 사건과 사건 이후의 시간이 공존하는 교차적 긴장감, 그리고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사태에 대한 막막한 비애감. 영화 한편의 데뷔작이 탁월하다고 할 때 거기엔 미래를 걸어도 될 만한 신인감독의 역량이 근거가 되는데 <한공주>의 감독 이수진은 그에 걸맞은 연출력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감독의 밝은 눈으로 성취해낸 캐스팅과 세심한 연기연출 및 성격화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보태야 할 것이다. <한공주>의 여배우 천우희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거론될 때 그녀는 이미 <써니>의 ‘본드걸’을 연기한 배우가 아니었느냐는 반응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근거다. 천우희는 뛰어난 배우이지만 <써니>의 본드걸을 연기할 때에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연출이 지향하는 과잉성에 재능이 소모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에 <한공주>의 감독 이수진은 사건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에게 필연이 되어버린 표정, 즉 무표정이라 흔히 불리게 된 방어적 표정술을 배우에게서 훌륭하게 끌어내고 있으며 천우희 또한 그걸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장점을 더 길게 열거하는 대신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영화의 심각성에 비추어본다면 거의 예측하기 어려운, 나른하고 느슨한 명랑함을 갑작스럽게 느낀 장면이 하나 있다. 한공주가 자신이 위탁된 집 문 앞에 서서 “선생님 어머니, 선생님 어머니” 하며 문을 열어달라고 나지막하면서도 애타게 부르는 순간이다. 그때 그 호칭의 장본인인 선생님 어머니는 슈퍼마켓 안쪽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하게 왈츠를 추는 중이다. 한공주의 임시 위탁을 맡은 이 노년의 여인을 한공주는 선생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그녀가 한공주의 학교 선생님의 친어머니이므로 그 호칭은 정확한 것이지만 선생님과 어머니라는 말하자면 학교와 가정에서 각각 한공주의 보호자가 될 법한 두 가지의 호칭이 연쇄적으로 섞이자 이 부름은 기이한 자극으로 틈새를 열어젖힌다.

그러니까 이때의 핵심은 명랑함이 아니라 명랑하다고 느끼게 한 어떤 예측 불허의 느슨하고 유연한 자극이다. 인물로 치자면 선생님 어머니가 이 영화에서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인물은 어딘가 예상되는 지점을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한공주를 둘러싸고 영화에 깊숙이 잠복해 있는 ‘보호와 비보호’의 잔인한 환경을 거의 도식적이지 않은 유연한 방식으로 일깨우고 있다.

가령 <한공주>에는 몇 가지 도식적 범주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성인들이 등장한다. 동윤의 아빠를 비롯하여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 사건 자체를 모르는 한공주의 엄마, 사건을 알고 있지만 서둘러 은폐해버리려는 한공주의 아빠, 무성의하게 처리하려는 형사, 피해자인 한공주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가해자를 돕기 위해 나서는 파출소 소장(이자 선생님 어머니의 애인), 조금 귀찮지만 자기 할 일이니까 하는 것 같은 눈치인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 어머니는 그들과 다르며 범주화되지 않는다. 선생님 어머니는 한공주의 보호자이지만 전적인 보호자가 아니고 나쁜 보호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보호자도 아니며 결국에는 보호자가 아니다.

<한공주>에서 가장 정체불명이며 유연한 이 인물이 매개가 되어 결정적으로 주의 환기시키는 바는 명확하다.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공주 자신만이 실은 이 영화의 유일하고 지속적이며 진정한 보호자라는 역설적인 사실이다. 동윤이 학급 아이들에게 얻어맞았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선생님 어머니가 뭇 여인들에게 얻어맞고 온 날에도 한공주는 같은 방식으로 선생님 어머니의 볼에 약을 발라준다. 한공주의 보호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이 모든 사태가 동윤을 보호하려 했던 한공주의 보호 의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우린 알아차려야 한다. 사건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 아이들은 어쩌면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현관문 앞까지 나섰을 때 한공주가 용기를 내어 “너희들 동윤이 괴롭히지 마”라고 말을 던지자 그 아이들은 갑자기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돌변했다. 또한 한공주의 죄책감 역시 임신한 화옥의 보호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한공주가 수영을 배우는 것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 거듭되는 실패와 죄책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보호자의 의식과 시도는 한공주의 것이다.

그러니 <한공주>의 슬픔은 한공주가 어떻게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미력하나마 그 보호자 한공주가 어떻게 보호의 행위를 멈추지 않았으며 동시에 그 보호의 행위 때문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슬픔이다. 비보호의 사각으로 떨어져버린 보호자. 도식적이지 않으면서도 활성적인 방식을 통해 이 잔인함을 일깨운 <한공주>에 지지를 보낸다.

3. 반(反)

<한공주>는 특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겪은 한공주가 사건 이후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과거 당시의 사건 현장 장면이 군데군데 개입해 들어오는 구조다. 대개는 과거를 환기시키는 누군가의 질문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의 촉발에 의해 직접적으로 그 장면들이 돌아온다.

예컨대 선생님 어머니가 “아빠가 시장이야? 그런데 왜 너한테 투자를 해?”라고 추궁하듯 따져 묻자, 첫 번째 과거 장면이 돌아온다. 혹은 한공주가 수영장에 있을 때 동윤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오고 거기에 한공주가 놀라는 그 순간에 동윤, 화옥과 함께 있던 과거의 날이 돌아오며,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라고 선생이 수화기 너머에서 물었을 때 성폭행당하던 그 순간이 돌아온다.

감독은 이 과거의 장면들을, 특히 성폭력의 현장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심하게 처리하려고 애쓴 것 같다. 그 의도와 노력이 의심스럽진 않다. 과거가 처음 등장할 때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진실과 사실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쩌면 감독은 진실의 전모를 대면시키기 위해 이 과거의 장면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현재의 새로운 관계와 무관하게 과거의 사건으로 얻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으므로 과거의 시간은 반복개입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들의 존재에 대해 끝내 완전한 공감은 어렵다. 그 이유를 위해 영화 스스로 중요하게 보여주었던, 그리고 한공주가 드러냈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한공주가 새 학교의 수영장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반한 학급 친구 은희는 한공주의 노랫소리를 녹음해서 도로 들려준다. 그때 한공주는 본능적으로 치를 떨며 화를 낸다. 곧이어 은희의 도움으로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 돌아선 다음 장면, 은희가 아직 거기 몰래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한공주는 은희를 붙들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친다. “왜, 이것도 녹음했니?” 한공주의 이 공포에 가득 찬 방어 자세는 계속 이어진다. 친구들이 팬 카페를 만들어주었을 때도 “내 얼굴 니들 맘대로 올리지 마”라고 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때는 누군가가 그녀를 허락 없이 기록하는 그때다. 결국 그녀의 뜻과 무관하게 홈페이지가 생기고 그녀의 우려는 현실이 된다.

우리는 그녀가 두려워하고 원치 않는 것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한공주는 자신이 녹음되거나 녹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녀를 폭행한 아이들이 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기록하여 협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단순하게나마 자신이 기록되어 외부적으로 알려질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궁극의 핵심은 녹화나 녹음 자체가 아니다. 그 녹음과 녹화가 예비하고 있는 결과로서의 ‘재생’이다. 그러니까 한공주가 가장 두려워하고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재생, 자신의 이미지의 재생이다. 그때 우리는 이 영화가 되풀이하는 과거의 장면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재생. 혹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거듭 경험하게 되는가. 한공주의 가장 끔찍한 시간의 반복 재생이며 가장 피하고 싶은 장면의 지속적인 재생이다.

이러한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장면에 공감할 수 없다. 한공주가 그토록 원치 않았던 것을 그것이 진실의 일각이라고 하여 영화가 드러낼 때 우린 지지해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돌아온 과거의 모든 장면이 성폭행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한공주라면 그 ‘이야기의 재생’조차도 원치 않을 것이다. 혹은 한공주가 두려워하는 재생의 이미지와 영화가 선택한 재생의 이미지는 다르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공주의 새 학교 친구들조차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한공주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것을 보고 만다. 그리고 거기엔 누구도 함부로 통제를 장담할 수 없는 수많은 오류와 잉여의 이미지가 잠복하고 난립해 있을 것이다. <한공주>가 재생한 과거의 장면들을 보는 우리의 경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컨대 동윤의 아버지가 동윤만을 데리고 범죄의 현장을 빠져 나갈 때 저기 말도 안 되게 구석에서 여전히 화옥을 성폭행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누군가의 저 엉덩이는, 결국 진실의 재생과는 무관하게 통제를 초과해버린 또 다른 잉여의 이미지다.

그러므로 이 장면들을 대할 때의 불편함의 정체는 재현적 강도나 세기나 그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 이미지와 이야기의 재생을 영화가 우리에게 반복 경험시키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때 오는 곤혹스러움이다. <한공주>의 과거 장면들은 악의적이지 않고 세심하며 진실을 다루고자 한 목표를 지니고 있지만 그 뜻깊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 장면을 보고 싶지 않다. 한공주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을 우리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한공주>의 이 장면들을 끝내 지지하지 못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써도 되나 고민했다. 동일한 감상에 처했던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판단에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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