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인공지능 운영체제와의 연애 <그녀>
2014-05-21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영화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 중인 테오도르(와킨 피닉스)의 얼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고백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이 음성인식으로 작동되는 근미래에 살고 있는 러브레터 대필 작가이며, 깊이 아꼈던 아내와 이혼 소송 중이다. 그런 그가 의외의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바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란 이름의 인공지능 운영체제다. 사만다는 따뜻한 목소리와 뛰어난 전산처리 능력을 통해 테오도르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테오도르는 자신의 육체를 통해 사만다가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그렇게 둘은 직접적인 접촉보다 밀도 높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보통의 연인들처럼 함께 기승전결을 헤쳐 나간다.

<그녀>는 상투적인 로맨스영화의 틀을 갖추고 있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특별해 보이는 영화다. 연애의 과정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면면을 단순히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차원으로만 환원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표정들을 시청각적 경험으로 체험하게 한다. 처음에 관객은 주인공 남녀의 대화, 웃음소리, 숨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와킨 피닉스의 얼굴에 전보다 더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캐릭터 사이의 모든 소통이 청각적 신호로만 이루어지다보니 역으로 배우의 얼굴이 전달하는 시각적 신호에 훨씬 더 예민하게 감응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가서는 다시 인간의 목소리 속에 담겨 있는 풍부한 표정에 빠져들게 된다. 여느 때보다 차분하고 정밀한 표정 연기를 선보인 와킨 피닉스와 목소리만으로도 가상의 육체적 형상을 가공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 스칼렛 요한슨, 두 배우의 호연 덕분이다.

물론 몇 가지 아쉬움도 든다. 침묵을 대화만큼 섬세하게 다루지 못한 점, 섹스의 문제를 비교적 쉽게 초월해버린 점, 연애의 풍경을 미술적으로 아름답게만 그리려 한 점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점들이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을 헤아리며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큰 방해물이 되진 않는다. 연애도 약속된 연기를 동반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프로그래밍된 언어인 게 아닐까, 사랑이란 개념은 관념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중 어느 쪽에 더 많이 기울어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얼기설기 엮어가며 보기에 괜찮은, 따뜻한 체온을 지닌 SF 로맨스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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