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옴니버스 <신촌좀비만화>를 통틀어 제일 깊은 공간은, <피크닉>의 소녀가 뒤집어쓴 이불 속이다. 아픈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작은 어깨에 짊어진 수민(김수안)이 순정만화를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짓는 우주가 그 안에 들어 있다. <피크닉>은 인물의 상황을 공간감으로 옮겨놓아 감흥을 준다. 수민이네가 사는 좁고 깊은 집의 구조, 작은 아이의 몸집과 대비되는 너른 바다와 호젓한 숲길의 광활함이 기술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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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so serious?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 소환이나 그룹 샤이니의 노래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 <10분>의 주인공인 6개월 인턴사원 호찬(백종환)에게 정규직원들이 제일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시청각 지원’을 하자면, “뭘 그렇게 진지하고 난리야? 응?”으로 해석되는 말에 찡긋하는 눈짓과 어깨 툭 치기가 동반되는 그림을 상상하면 된다. 호찬은 초등학생 때부터 목표한 방송국 교양 PD가 되기 위해 채용 시험에 응시 중이다. 하지만 학업도 마친 처지에 돈벌이를 몰라라 할 수도 없고 장차 이력서에도 한줄 보탤 수 있으리라는 판단으로, 단기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이내 호찬은 기로에 선다. 방송사 2차 전형 관문이 좀처럼 뚫리지 않는 가운데,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업무를 잘해내면 마침 결원이 생긴 정규직에 뽑아주겠다는 암묵적 제안을 받는다. 호찬은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내키지 않는 처세까지 열심히 해낸다. 한데 호찬의 진지함은 비단 정규직원 낙점을 노린 전술만은 아니다. 친구들과 스터디를 하고 ‘스펙’을 쌓는 것 외에는 안정된 미래를 위해 달리 기댈 구석이 없는 청년에게 진지한 태도는 몸에 밴 유일한 장기 생존 전략이다. 호찬과 같은 단기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정래(성민재)가 대조를 이룬다. 자칭 ‘강남 빈민’인 호찬과 달리 정래에겐 유학이라는 굵은 ‘스펙’을 한방에 보태줄 수 있는 부모가 있고, 파워 블로거라는 유명세만으로도 자존감을 유지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다. 그는 호찬과 반대로 매사가 농담이고 놀이다. 만약 진지해지면 현재의 단기 비정규직 생활을 본인 인생의 ‘정규’ 내용으로 인정하게 될까봐 방어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정규직 사원들도 호찬이 “뭘 그렇게 진지하고 난리인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이미 시스템에 진입해서 안착한 영화 속 인물들은 진지해지기를 기피한다. 술렁술렁 화기애애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편이 덜 고되기 때문이다. 고지식하고 진지하게 따지면 자신이 이미 편입된 체제가 가진 허점이 거론되고 변화의 시도가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모든 변화는 귀찮은 노력을 요한다. 게다가 그 노력에 적절한 인정과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선배들에게서 보았고 경험으로 배웠다. 그러나 시스템에 진입하지 못하고 우회로가 없는 사람은 진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호찬이 첫 출근한 날 “무슨 계약서를 그렇게 꼼꼼히 보고 그래?” 라고 눙치는 상사의 대사가 쓴웃음을 불렀다. 고용 계약서보다 더 꼼꼼히 보아야 할 문서가 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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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찬은 남달리 야심이 웅대한 청년이 아니다. 특별히 정의감이 높지도 않다. 그저 적성 맞는 일을 하며 꼬박꼬박 보수를 받아 살아가고자 하는 사회초년생이고 영화가 보여주듯 여의치 않으면 절충안을 받아들일 준비까지 돼 있다. 그러나 무원칙하고 편의적으로 비정규직 인력을 이용하며 친목으로 모순을 덮는 조직 생활을 경험하면서 호찬은 그 바람조차 사치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청년이 인생에 거는 기대치는 한 단계 저하된다. 고작 고등학생이고 미술에 재주가 있는 호찬의 동생은 형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체념에 적응한 모습을 보인다. <10분>에서 가장 선뜩한 장면은, 아우에게 뭐라고 조언하고자 입을 벌린 호찬이 끝내 아무 말도 못하는 순간이다. 나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청년의 입을 쳐다보며, 내가 속한 소위 X세대라면 뭐든 이러쿵저러쿵 충고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세대는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의 분야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면 빠듯해도 직업을 갖고 밥벌이를 하며 살 수 있는 현실을 경험했다. 호찬의 세대는 그런 인생을 풍문으로만 들었다. 청년들의 삶에서 꿈꾸는 시간은 짧아지고 환멸의 시간은 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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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라는 영화를 봤더니 B라는 영화를 향한 갈증이 급히 동하는 일이 간혹 생긴다. 두 영화의 연관은 경우마다 다르다. 카스텔라와 우유처럼 합치면 더 환상적인 맛을 낼 조합이 있는가 하면, 못 만든 느끼한 크림 스파게티가 김치나 피클을 부르듯, 맞춤한 입가심이 간절해서일 때도 있다. 가령 진부한 대사와 기계적 3D 효과로 점철된 영화가 준 스트레스를 다스리기 위해 “<파고> 둘에 <그래비티> 하나가 필요해”라고 진단할 수 있다. 마치 금연의 금단 현상에 시달리는 <셜록> 속 홈스(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 사건은 니코틴 패치 세장짜리 생각 거리야”라고 감정하듯 말이다. 오늘 샐리 포터 감독의 <진저 앤 로사>를 보고 오는 길에 오래전 영화 한편이 급작스레 당겼다. 알랭 타네 감독의 <2000년에 스물다섯이 되는 요나>(1976, 이하 <요나>)다. 성장영화인 <진저 앤 로사>와 후일담 영화인 <요나>는 나란히 비교할 작품은 아니다. 두 영화의 공약수는 청춘을 보내고 부모가 된 ‘운동권’이다. <진저 앤 로사>에서 진저(엘르 패닝)의 아버지인 왕년의 진보주의자 롤랜드(알레산드로 나볼라)가 오랜만에 간절히 <요나>를 보고 싶게 만들었다.
스위스영화 <요나>는 1968년 5월 혁명에 뛰어들었던 여덟 남녀의 중년을 그린 영화다. 혁명은 실패했으나, 아저씨 아주머니가 된 그들은 과거의 이상을 청춘의 치기로 치부하지 않는다. 소시민적 일상 속에서도 자본주의의 모순에 눈감지 않겠다는 개인적 원칙을 지키고 미세한 차이라도 만들려고 소극적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예컨대 교사가 된 친구는 본인이 믿는 사상을 교실에서 가르치다 해고되기를 반복하고, 슈퍼마켓 계산원으로 일하는 친구는 연금생활자에게 물건 값을 슬쩍 깎아준다. 유기농 농사를 연구하는 멤버도 있다. 먹고살기 위해 자본주의의 부품이 된 현실을 자조하면서도,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룹 중 한명이 낳은 아기 요나를 위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요나>의 극중 인물들은 스스로를 패배주의자로 자조하지만, 오늘날 다시 보는 이 영화는 무모할 정도로 진취적인 이야기다. “나는 노동이고 당신은 자본이야,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시시한 노력은 하나 마나야”라는 식의- 실제로는 전면적 체념의 합리화로 귀착되는- 우리 세대에 익숙한 태도에 견주면.
진저와 로사는 1945년생, 즉 <요나>의 주인공들과 같은 세대다. 2차대전 당시 전쟁 반대 신념을 실천하다 옥살이를 했던 진저의 아버지 롤랜드는 그러니까 68세대의 부모뻘이다. 한편 그는 영화가 제작된 시점으로 따지면 2012년산 캐릭터다. 롤랜드는 딸 진저가 살아갈 미래의 세계를 그리 염려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근심거리는 혁명아로서 자신의 과거에 생활의 때를 묻히지 않고 완전한 신화로 보존할 방법이다. 솔직히 나는 롤랜드가 딸의 이름을 ‘아프리카’로 지었다는- 모두 그 이름 대신 진저라고 부른다- 대목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마 압제를 뚫고 일어서야 할 대륙이라는 의미였겠지만, 자식의 이름은 슬로건이 아니다. 책 제목도 아니다(딸을 아시아라고 이름붙인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도 있지만). ‘대한’이나 ‘해방’ 같은 거창한 성명으로 출생신고를 하려는 부모는,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느낄 아이의 부담을 재고해보아야 한다. 영원히 젊고 자유로운 영혼이기를 소망하는 롤랜드는 딸과 아내가 사는 가정을 ‘부르주아의 덫’이라고 부르며 멀리하고, 딸의 동갑내기 단짝을 애인으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분란은 겁내서, 딸에게 침묵해주길 부탁한다. 너는 똑똑하고 특별한 아이니까 이해할 수 있지? 제일 슬픈 점은 진저가 아빠를 무척 동경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신세 한탄만 하는 엄마처럼 절대 살지 않겠다고, 아빠랑 통하는 진보적 여성이 되겠다고 열망하는 소녀는 무리해서 센 척하다 무너져버린다. <진저 앤 로사>의 교훈은, 아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일은 그들을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친구 같은 부모는 바람직하지만 부모는 친구가 아니다. 특히 아이가 미성년인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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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의 리사 피셔
백업 싱어에 관한 다큐멘터리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은, 주인공들을 ‘실력에 합당한 영광을 누리지 못한 억울한 뮤지션들’로만 규정하지 않는 데에서 풍성해진다. 리사 피셔는 그런 맥락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그래미상까지 받고도, 솔로보다 백업 싱어가 성정에 맞는다고 판단해 평생의 업으로 택한 경우다. 성취가 곧 행복이 아닌 사람도 있다. “내게 노래는 나누는 거지 경쟁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팬들의 구애에 시달리는 스타가 아님에도, 스스로를 만인의 애인으로 여긴 나머지 결혼할 생각을 못해봤다고 겸연쩍어하며 털어놓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직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