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TV에서 예지원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요 청백전 스타일의 오락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예지원의 활약은 대단했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차이니스 드레스를 입은 채 조신하게 <홍콩 아가씨>를 부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머리를 산발하고 겉옷을 거칠게 벗어 내던지더니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를 활보하며 <배반의 장미>를 불러젖혔다. 대본도 강요도 없었다. 그냥 예지원의 ‘설정’이었다. 예기치 않은 반전, 아니 배반에, 녹화장도 안방도 뒤집어졌다. 예지원이 자신을 희화화해서가 아니라, 그 가무가 장기자랑이라는 무대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불면 날아갈 듯 작고 가녀린 몸매, 오목조목 참한 이목구비의 이 아가씨가 준비한 진짜 ‘반전’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지원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언제부턴가 <여고시절>의 왈패가 됐지만, 그 전엔 정반대였다. <꼭지>나 <줄리엣의 남자>의 예지원은 얼굴 생김생김 그대로 순하고 참하고, 약간 강단도 있는 누이의 이미지였다. 영화 <아나키스트>에서는 중국 상하이 밤무대의 프리마돈나였지만, 남자영화 속에 구색 맞추기로 들어간 예쁜 꽃 이상의 임팩트는 없었다. 그런 예지원을 재발견한 이는 바로 홍상수 감독. <줄리엣의 남자>를 보고 “역할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느낌”이 좋다며, <생활의 발견>에 합류시킨 것이다. 예지원은 팬이었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 무조건 출연하기로 했고, 잦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본색’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었다. 춘천 여자 명숙이가 작가 지망생에서 무용학원 강사로, “순수하고 솔직하고 엉뚱한 여자”로 다듬어지게 된 것은 영화 속에 자연인 예지원이 묻어 들어가 있다는 증거.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 그 자신감이 예지원이 <생활의 발견>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수확이다.
어려서부터 예지원은 좀 유별나게 놀았다. 춤추고 노래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좋아한 것은 기본. 소풍 날 드레스 입길 고집하는가 하면, 남자애들과 치고 받고 싸우기도 잘했다. 그러다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제동이 걸렸고, 국악예고와 서울예대에도 투쟁 끝에 힘들게 들어갔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한테 많이 억눌려 살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한테 너무 끼가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셔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첫 번째 벽이 아버지였다면, 두 번째 벽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96 뽕>으로 데뷔하던 당시, 본인은 작품과 역할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상처가 남은 게 아니라, 미련이 사라졌다. 그렇게 연극과 뮤지컬에 전념하던 그녀를 다시 브라운관과 스크린으로 이끈 이는 디자이너이자 후견인인 하용수씨. “원래 단순해서 하나에 필이 꽂히면 그것만 한다”는 예지원이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발레학원에서 살다시피 할 때 “잘한다”고 응원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알고 준비한 것도 아닌데, <아나키스트>의 무용수 가네꼬를 만난 건 그 즈음이었다. 그뒤론 일사천리. 운도 좋았지만, 그만큼 노력한 덕이다.
<생활의 발견>과 <여고시절>에 합류하기 전에, 예지원은 <록키 호러 픽쳐쇼>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무대에 섰다. 두 작품 모두 자신의 성적 욕망과 정체성을 알아가는 여성의 역할이었다. <여고시절>의 터프한 여성상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캐릭터라서, 좋아한다. 요즘 “역할처럼, 실제로 그런 사람 아니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듣는데, 예지원에겐 그게 최고의 찬사로 들린다. 특정 캐릭터 이미지를 맺고 끊는 건 순전히 자기 몫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장희빈, 니키타, 본드걸, 서커스단원…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어떤 역할이든 그 인물로 보여지고 싶다는 것이, 이제 시작하는 배우 예지원의 당찬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