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젠장, 할리우드보다 소와 대화하는 게 더 좋다니까, 러셀 크로
2002-02-27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베를린, “여길 봐 주세요, 러셀!” 여기저기서 포토콜 요구가 이어졌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황급히 걸어 들어간다. 짧은 턱수염과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자란 고수머리, <글래디에이터> 때보다 족히 5, 6kg은 불어난 듯한 육중한 몸집. 그는 기자회견장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드럼치듯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감독 론 하워드와 제니퍼 코넬리가 민망할 만큼 질문은 러셀 크로에게만 집중되고, 당일 후보작 발표를 한 오스카 관련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염문설을 뿌렸던 니콜 키드먼에 대해 “그녀는 지금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스웨덴에 있소. 나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하지, 하하”라며 특유의 괴상한 조크를 선사하던 그는, “머리(brain)와 근육(brawn) 중 어떤 걸 쓰는 걸 좋아하느냐”는 황당한 질문이 튀어나는 순간, 마치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듯 과장된 정중함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탁드리는 바이지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제발 집어치우고 딴 질문으로 넘어가셨으면 정말 감사하겠군요.”

<이유없는 반항>의 감독 제프리 라이트 曰_ 러셀은 지금껏 내가 만난 배우 중 가장 무례하다. 반면 가장 집중력이 뛰어나다. 그는 늘 나를 엿먹인 다음엔 놀라운 테이크를 보여준다.

러셀의 辯_ 바보같으니…. 그는 10년 동안 그 말을 하고 다닌다. <이유없는 반항>은 28일간 찍었고 나는 그를 내 인생에서 그저 8주간만 알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퀵 앤 데드>의 샘 레이미 曰_ 러셀과 함께 일할 때, 문제점은 그는 언제나 좋은 아이디어로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책이 없다.

러셀의 辯_ 레이미가 언젠가는 손꼽히는 훌륭한 감독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피와 고어와 폭발에 신경쓰기보다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먼저임을 빨리 깨달아야 된다.

<프루프 오브 라이프>의 테일러 핵포드 曰_ 우리가 흥행에 실패한 건 러셀이 멕 라이언과 벌인 실제 로맨스 때문이다

러셀의 辯_ 글쎄,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약해빠진 인간이다. 그래, 그때 우리는 사랑에 빠졌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만약 그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충고에 좀더 귀를 기울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다. 이런 젠장, 내가 앞으로 ‘미스터 핵포드’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러셀 크로는 무례하다. 사실이다. 기자들에게나 감독에게 그는 결코 다루기 쉬운 별이 아니다. 그에게선 톰 크루즈가 보여주는 팬 서비스 차원의 친절함이나 카메라 플래시를 버튼삼아 튀어나오는 100만달러짜리 미소 따위는 없다. 어찌보면 퉁명스럽고 과격하고 직설적이다. 그에게 열광한다면 그 때문일 것이고 그가 싫다면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관객을 향할 때 그는 세상 어떤 배우보다도 정중하다. 이건 사인해달라고 달려드는 팬들에게 호의적이란 말이 아니다.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크로에 대한 악몽 같은 기억을 토로하는 감독들까지도 그의 캐릭터에 대한 집중력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나 뿌려대는 스캔들은 박스오피스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영화의 질만이 관객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이다.”

실존인물을 원형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론 하워드와 각색자 아키바 골드버그 그리고 러셀 크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시는 오히려 러셀 크로와 상당부분 닮아 있다. 자신감과 확신이 넘치지만 어떤 부분 세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있는, 그 안의 세계에서는 누구보다 유연하지만 한 발자국만 넘어서면 경직되고 마는, 강한 외양 속에 신산한 속내를 품고 있는. “하워드는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생각이 없다고 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본적인 맥이 흐트러지지 않는 선에서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실비아 네이사의 전기를 읽거나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임상 테이프를 보며 행동패턴을 체크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는 촬영 전까지 실존인물을 만나는 것조차 피했다. 그저 촬영 3회차, TV인터뷰에서 러셀 크로를 본 존 내시가 ‘뭐 저렇게 생긴 게 내 역할을 하나’ 싶어서 예고없이 촬영장을 방문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15분의 짧은 만남, 차와 커피에 대한 기호를 묻는 하나의 질문이 오고간 게 다였지만 내시와 크로에게는 서로를 안심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만남 이후에도 촬영 전 잡았던 존 내시의 캐릭터에 변화는 없었다.” 다만 그가 신고 온 오버슈즈와 빨간색 니트모자는 영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글래디에이터>가 내 인생을 바꿔놓은 건 확실하다. 그 영화가 개봉 전까지 사람들은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괜찮아 러셀,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시드니에서 북동쪽으로 340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한 콥스 하버. 560에이커의 농장에서 소와 말을 키우는 전원생활에 대한 자랑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이 서른일곱의 뉴질랜드산 오스트레일리아인은 농장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소들과 대화를 나누는 편이 화려한 할리우드 생활보다 훨씬 좋다고 말한다. “모든 가십 잡지들은 나를 좀생이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내가 뭘하든지 부정적으로 비추고 바람둥이 짓만 하고 다니는 쓰레기로 취급한다. 내가 투스카니에 있는 별장을 샀다거나, 젠장, 나는 투스카니에는 머리털나고 가본 적도 없다. 오스카 시상식날 밤 커트니 러브와 잤다는 이야기도 정말 뜬금없다. 정말 엿먹으라고 해라.”

오스카의 부름을 받은 것도 벌써 3번째다. <인사이더>로 후보에 올랐고 <글래디에이터>로 첫 번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며 올해 <뷰티풀 마인드>로 톰 행크스나 스펜서 트레이시를 잇는 오스카 2관왕으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러셀 크로. 그러나 “나는 찬사를 얻거나 상패를 모으기 위해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이나 하듯, 이 한 차례의 파티가 끝나면 그는 주저없이 떠날 것이다. 피터 위어의 <세상의 먼 곳>(The Farside of the world)과 감독 데뷔작 <길고 푸른 해변>(The Long green shore)의 촬영이 기다리는 고향, 오스트레일리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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