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리나가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낸 건 장 뤽 고다르의 <여자는 여자다>(1961)를 통해서다. 이제 막 스물살의 훤칠한 여성은 덴마크 출신답게 프랑스어 억양이 부자연스러웠는데 그게 또 매력으로 비쳤다. 영화에서 스트리퍼로 나오는 카리나는 곧바로 스트립쇼를 연기한다. 그런데 춤추는 카리나의 모습은 허구의 영화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모델의 누드화를 그린 화가의 초상화에 더 가까웠다. 화면 가득히 카리나의 얼굴 클로즈업이 잡히고, 또 그녀의 머리칼, 눈매, 목덜미 등이 차례로 강조된다. 이 시퀀스는 영화를 이용한, 카리나라는 배우의 스타로서의 대관식에 가까웠다. 그리고 카메라 뒤의 고다르가 얼마나 카리나에게 반해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촬영 도중에 결혼한다. 신인 카리나는 이 작품 덕에 파격적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누벨바그의 신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고다르에 의해 갑자기 등장한 신성
카리나의 경쾌하고 밝은 제스처, 행복한 미소, 동시에 눈가에 스치는 불안과 우울한 분위기의 이중적인 인상은 그녀의 개성이 됐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고다르의 1960년대 초창기 영화들에 나오는 여성배우들의 공통된 매력이자, 고다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였다. 그 초창기 영화들에서 가장 자주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가 안나 카리나다.
사실 안나 카리나와 장 뤽 고다르의 첫 번째 작업은 <작은 병정>(1960년 제작, 1963년 개봉)이었다. 프랑스에서 광고모델을 하던 10대 소녀 카리나는 고다르의 눈에 띄어 영화계로 입문하는데, 이 작품이 당대의 민감한 테마인 ‘알제리 사태’를 다루는 바람에 검열에 걸려 개봉이 연기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카리나는 불행하게도 배우로서의 첫 작품은 알려보지도 못했다.
사실상 카리나의 데뷔작인 <작은 병정>에서도 고다르의 사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카리나는 실제 자신의 직업 그대로 영화에서도 모델로 출연한다. 당시 카리나의 남자친구가 사진작가였는데, 영화에서도 그녀의 남자친구는 사진작가이자 정치범으로 나온다. 고다르는 늘 그렇듯, 실제의 상황을 허구 속에 교묘하게 섞어 넣었고, 사진작가의 시점을 빌려, 카리나의 매력을 십분 담아냈다.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카리나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머리를 빗는 게 연기의 대부분이었다. <작은 병정>은 당시의 표현법을 빌리면 ‘Cinema Po’, 곧 고다르의 ‘정치(Politic)영화’의 포문을 연 첫 작품인데, 이런 진지한 영화에서도 그는 카리나의 아름다움을 잡아내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 영화를 찍으며 고다르는 매일 촬영장에 나타나던 카리나의 남자친구 면전에서 그녀를 뺏어버렸다.
<여자는 여자다>의 성공에 뒤이은 작품이 <비브르 사 비>(1962)이다. 그런데 첫 작품에서 느꼈던 밝고 경쾌한 분위기는 대단히 약화됐고, 영화는 우울 속에 빠져버린 듯한 느낌을 전달했다. <여자는 여자다>에서 처음 제시됐던 팝아트 스타일의 컬러 표현법도 사라지고, <비브르 사 비>는 다시 흑백필름으로 되돌아갔다. 나나(안나 카리나)라는 여성이 혼자의 힘으로 파리에서 배우가 되려고 고군분투하는데, 생존의 위협에 내몰리자 길거리에서 매춘에 나서고,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여자는 여자다>에서의 뮤지컬 스타 같은 카리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비브르 사 비>에서 그녀는 불과 1년 만에 멜랑콜리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무겁게 보였다. 사실 카리나의 성장기 자체가 멜로드라마처럼 우울했다.
‘재투성이’ 아가씨, 불행을 넘어서다
안나 카리나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성장했다. 배우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전형적인 신데렐라의 판타지 같았다. 모진 고생 끝에 빛을 본 경우다. 카리나와 모친과의 불화는 대단히 유명했다. 카리나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부모는 헤어졌고, 그래서 부친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모친은 일을 이유로 갓 태어난 딸을 외조모에게 보냈다. 카리나는 외할머니 아래서 자랐고, 4살 때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양모 아래서 자랐다. 8살 때 카리나는 처음으로 친모와 함께 살았다. 모친이 새로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릴 형편이 된 것인데, 새로 만난 아버지에게 정을 붙이며 친부처럼 따랐다. 그런데 그 관계도 얼마 가지 못했다. 모친이 또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이번의 새 남자는 카리나를 아주 귀찮아했고, 종종 그녀를 때리기까지 했다. 카리나는 10대 초부터 학교를 빼먹었고, 가출을 반복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오직 한 가지 꿈을 안고, 17살 때 히치하이킹을 하여 파리로 간다. 모친과의 사실상의 이별이고 독립적인 삶의 출발이었다.
파리에서 굶다시피 하는 고생이 시작됐다. 그러나 행운이 일찍 찾아왔는데, 광고계 사람이 사진 촬영을 권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모델 일을 시작했다. 피에르 가르뎅, 코코 샤넬 같은 유명 디자이너의 모델도 됐다. 카리나의 덴마크식 원래 이름을 지금처럼 ‘안나 카리나’로 바꾼 사람이 코코 샤넬이다. 그때쯤 고다르를 만났다.
카리나 자신이 말했듯, 고다르와의 관계는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같았다. 고다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카리나를 ‘조각’해 갔고, 카리나는 그 조각가가 빚어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보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가 된 것이다. 사실상 헤어진 뒤 함께 만든 <국외자들>(1964), <미치광이 피에로>(1965), <알파빌>(1965)도 모두 영화사의 문제작으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의 마지막 작품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1966)이다. 이들의 결별을 예언하듯, 카리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남자에 의해 희생되고 조종되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적극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험프리 보가트처럼 트렌치코트를 입은 카리나가 모든 사건을 해결한 뒤,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말한다. “이제 미래에 무엇을 하지?” 말하자면 홀로서기에 대한 선언문 같은 말이었다.
카리나는 고다르와의 이별 뒤, 비스콘티와 <이방인>(1967), 파스빈더와 <중국식 룰렛>(1976) 등을 찍었지만, 과거와 같은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고다르와 함께 만든 영화들(여기 소개된 7편의 장편과 한개의 단편)은 1960년부터 66년까지의 결과물들인데, 짧은 기간 발표된 그때의 작품들이 영화사의 영원한 보석으로 남아 있다. 고다르와의 마지막 작품이자 사실상 자신의 마지막 대표작인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를 만들 때, 카리나는 겨우 26살이었다. 역시 ‘너무 빠르게’ 살았고, 그렇지만 가장 화려하게 타오른 누벨바그의 불꽃이 됐다(카리나의 전기적 사실은 콜린 매케이브가 쓴 <고다르>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