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자 신민아. 낯설다. 찻집 주인 신민아. 낯설다. 대중에게 신민아는 밝고 명랑하고 당돌한 청춘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낯선 건 또 있다. 장률 감독과 신민아. 예술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감독과 상업영화에서 주로 활동해온 여배우의 조합이라니. 역시 또 낯설다. 장률 감독은 “누구에게나 이면이 있다. 내가 만나본 신민아는 차분하고 소박한 친구”라고 말하지만,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경주 여자 신민아는 상상이 쉽지 않다. “데뷔한 뒤 <경주>에 출연하기 전까지 명랑하고 밝은 캐릭터만 연기했던 것 같아요. <경주> 같은 영화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장률 감독은 알고 있었냐고요? 아뇨. 감독님을 만나고 난 뒤 <두만강>(2009), <풍경>(2013) 등 감독님의 전작을 찾아봤어요. <두만강>은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좋았어요.” 신민아가 장률 감독의 신작 <경주>를 들고 관객 앞에 섰다. <10억>(2009) 이후 5년 만의 영화 출연작이다.
<경주>에서 신민아는 윤희라는 경주 여자를 연기한다. 윤희는 아리솔이라는 이름의 찻집 주인이다. 어떤 사연을 품은 듯한데 표나진 않는다. 어느 날, 경주에 내려온 남자 최현(박해일)이 윤희의 찻집을 찾는다. 그러고는 대뜸 한다는 얘기가 7년 전 이 찻집의 벽에서 춘화를 봤는데, 그 춘화가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윤희는 그런 그를 변태라고 여기는데, 이상하게 이 변태남이 싫지 않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인 까닭에 신민아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윤희가 “모호한 캐릭터”로 느껴졌다. “사연이 있어 찻집을 운영하지만 어떤 성격인지,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촬영 전, 감독님께서 저를 만나면서 시나리오를 좀 고치셨어요. 말투나 자잘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말이죠. 그게 영화 속 윤희의 바탕이 된 것 같아요.”
촬영 전부터 감독과 함께 대화하며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간 건 데뷔 이래 처음이었다. 캐릭터가 분명하고, 감독의 주문대로 움직이기만 했던 전작의 작업방식과 큰 차이다. 찻집 주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신민아와 장률 감독, 두 사람은 실제로 찻집을 많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낯설고 신기했죠. 좀더 어렸을 때 감독님을 만났더라면 지금과 또 다른 배우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외려 지금 만났기 때문에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신민아는 또 장률 감독으로부터 선생님을 소개받아 다도를 따로 배우기도 했다. 윤희가 최현에게 차를 따르는 장면이 있어 미리 준비해야 했다. “차를 좋아하긴 하는데 다도를 갖춰 마시진 않았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차마다 따르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식기 전에 마셔야 하는 보이차 정도를 제외하면 차는 천천히 따라야 하더라고요.”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경주에 내려갔던 건 생소한 분위기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설렘이 그를 아스라한 꿈길로 등떠민 것일까.
프리 프로덕션만큼이나 장률 감독의 촬영 현장 역시 신민아에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감독, 스탭, 상대 배우과 처음 호흡을 맞추는 첫 촬영은 아직도 생생하다. 윤희가 밤에 절 안을 걷는 신이었다(이 장면은 편집에서 잘렸다). 다도를 통해 차분한 태도를 몸에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장률 감독은 보다 천천히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나름 천천히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윤희는 느린 여자’라고 주문하셨어요. 평소 걸음걸이보다 4배속 느리게 걸었어요. 리듬감 있게 걸었는데 모니터를 통해 본 그 모습이 섹시해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웃음) 천천히 걷고, 차분하지만 할 얘기는 또 하고야 마는 게 윤희구나라고 느꼈어요.”
무엇보다 한신이 대체로 한숏으로 구성된 장률 감독의 ‘원신 원숏’ 콘티는 단순한 대화 신도 여러 컷으로 잘게 찍어왔던 그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컷 분할 없이 긴 호흡으로 연기를 했던 까닭에 신민아는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알게 모르게 윤희에 반영됐을 거라고 말한다. “연극이었어요. 아무래도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다보니 감독님이 의도한 것도 있겠지만 제 행동이나 말투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슛 들어가면 모든 스탭들이 제가 연기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셨는데 되게 편했어요. 배우들이 연극을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경주>를 통해 신민아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이제껏 되살리지 못했던 희열을 끄집어냈다는 점이다. “컷” 사인과 동시에 “밥을 먹으러 갔다”는 철없던 시절과 달리 <경주>에서는 항상 모니터 앞에서 살았다. “지나간 컷에 대한 미련이 생기더라고요. 오랜만에 영화를 해서일까. 예전보다 좀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모니터를 열심히 하고, 감독님께 더 여쭤봤어요. 그게 습관이 되니 얼마 전 촬영이 끝난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때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청춘스타 신민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경주 여자 윤희의 얼굴만 남아 있다. 올해로 서른하나가 된 신민아는 이제 청춘 스타라는 꼬리표를 슬슬 떠나보낼 때다. 그 역시 나이듦을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현장에 가면 각 팀 막내들이 저와 10살 차이가 나더라고요.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뀐 지난해에는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올해는 어른이 된 것 같아요.” 나이를 먹으면서 여유가 생긴 까닭일까. 아직 대중은 잘 모르는 신민아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너무 어릴 때부터 일을 해서 20대 때 여러 환경과 부딪히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나를 좀 내려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장에서 열심히 모니터를 하는 나를 보면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아요. 이젠 더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