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구축이 먼저일까, 자료조사가 먼저일까.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넘치는 것은 의지와 열정이고 부족한 것은 돈과 자료다. 작가에게 ‘자료’라는 단어를 인수분해시키면 대부분 ‘경험과 지식’으로 나눈다. 결국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은 대상을 인터뷰해 그들의 경험을 얻는 방법과 대상을 공부해 지식을 주워담는 것으로 구분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구분이 우스울 수도 있다. 온누리 작가들이 인터넷이란 귀인을 만나 구글링은 빛이 되고 지식검색은 소금이 되어 통합 자료라는 은총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스토리 구축과 자료조사의 선후 문제는 뒤로하고 경험과 지식을 얻는 두 가지 방법 먼저 살펴보자.
대부분 작가들의 보조작가이자 자료조사원인 인터넷, 북향사배(北向四拜)를 올릴 만큼 감사하다. 핵공격을 받더라도 지휘통제망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개발한 미 국방성의 군용통신망 기술이 인터넷으로 발전했으니, 대국에 대한 예의로 치자면 북향사배도 모자랄 지경이다. 자료조사를 위해 서점에 가는 수고를 없애줬고, 자료 검증을 위해 논문을 뒤지는 일도 덜어줬다. 글을 쓰기 위해 한번쯤 경험해야 할 일도 대신 해주었고, 몇번을 경험해도 마주치기 힘든 특이한 경험까지 제공해줬다. 시나리오작가들에겐 말 그대로 은총이다. 물론 믿음이 부족한 자에겐 그 은총이 불안하기도 하다.
몇년 전, 도굴꾼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하던 때였다. 조선 왕조 국새가 얽힌 사건 중 하나라 쉽게 가자는 생각에 인터넷만 뒤적거렸다. 생각보다 자료는 적었고, 그나마 필요한 자료 대부분은 원출처가 믿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퍼나른 자료’만 무성해 검증(크로스체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불안한 은총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자료를 다 버렸다. 검증되지 않은 자료에 욕심낼 만한 배짱이 없었다. 얼마 뒤, 자료의 원출처에 관계된 사람이 ‘국새 사기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사건의 의미는 컸지만 연루된 고위인사가 많아서였는지 떠들썩하다 말았다. 그 자료를 쓰지 않아 다행이고 검증되지 않는 정보의 위험성까지 배웠으니 내게는 행운이었다. 전생에 개미라도 구했나보다.
인터넷 자료는 내가 해석해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적어도 조선시대를 다루고자 한다면 사학계에 양천제와 반상제의 논쟁이 있음을 알고, 양쪽의 주장을 해석해 나만의 결론을 내리고 써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웹 자료를 사용하는 가장 쉽고 좋은 방법은 크로스체크를 하는 것이다. 소개팅을 할 때 주선자의 말만 믿고 나갔다가 분노의 눈물을 삼켜본 남녀라면 크로스체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크로스체크는 어떻게 하는 건데요?”
자료조사 때문에 만난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직원에게 물어봤다. 수많은 첩보를 교차시켜 정보화하고, 그 정보를 다시 교차해 핵심 정보를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알려주리라는 기대는 안 했다. 그렇다고 ‘그건… 잘해야지’라는 답변을 바란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긴. 크로스해서 체크하는 거지. 체크하면서 크로스하기도 하고.’ 더 파고들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준비했던 다른 질문을 한다. 총은 가지고 다녀요?
“왜 이래? 유치하게.”
피아 구분 없는 첩보전을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도 하잖아요. 그럼 총은 안 가지고 다니는 거죠? 훈련받은 요원을 상대로 이 따위 어설픈 유도심문이 통하겠나. 그간 만나본 사람 중 인터뷰하기에 제일 답답한 직업군이 국정원과 경호실 직원들이다.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그 직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미지의 세계로 안내해준다. 그리고 자주 길을 잃게 만든다.
영화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를 할 때 여자가 된 트랜스젠더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손을 여자처럼 작게 만드는 수술을 할 수 없는 그녀들이 악수를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몸과 마음이 여자지만 손과 발은 남자를 증거해서 그렇단다. 첫인사를 시작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까지 엄청나게 쌓이는 생생한 이야기로 배가 불렀다. 온갖 재미있는 일화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놓치기 싫어 시나리오에 마구마구 담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영화로 기획한 작품이 젠더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아깝지만 하나씩 비우기 시작했다. 내가 몰랐기 때문에 흥미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영화의 재미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료조사를 할 때 인터뷰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효과는 항상 부작용을 동반한다. 다큐작가는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찾아가지만, 시나리오작가는 사실을 바탕으로 재미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까지도 재미로 풀어내야 하는 직업적인 숙명을 안은 것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스토리 구축이 먼저일까, 자료조사가 먼저일까.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연출을 준비 중인 민호(남궁민)는 건달 이야기를 쓰겠다며 병두(조인성)를 찾아간다. 민호는 병두에게 전해 들은 건달 세계의 저열하도록 비열한 이야기를 영화로 옮겨 성공을 거둔다.
여기까지 보면 자료조사가 먼저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호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응, 건달 얘기 좀 써볼까 하고’ 하는. 영화에 스쳐듯 나왔지만 이미 민호는 ‘건달 시나리오’를 여러 번 썼지만 제작사에서 받아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길을 찾고 싶어 병두를 만나러 온 설정이다. 스토리가 먼저 구축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아무리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도 자료조사를 하기 전에 스토리를 먼저 완성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변하지 않을 주제를 만든 다음에 자료조사를 해야 이야기가 길을 잃지 않는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먼저고 길을 찾는 것은 나중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상상력이 지식보다 중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