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로마, 죽음으로의 여행
2014-06-19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매혹을 이야기하는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

이탈리아 영화감독 파올로 소렌티노는 2004년에 발표한 <사랑의 결과>가 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며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관심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일 디보>(2008)로 제6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아버지를 위한 노래>(2011)로 제64회 칸영화제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탈리아 영화의 심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소렌티노가 신작 <그레이트 뷰티>에서 오랜 역사를 품은 도시, 로마를 다룬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다.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예술과 아름다움의 테마를 다뤄온 소렌티노의 길로 안내한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로마는 나른하다. 2천년이 넘도록 늘 현재로 살아온, 아마 가장 늙은 도시이기 때문일 테다. 로마처럼 누적된 시간을 소유한 도시들은 대개 과거 속에 잊혀 있다. 이를테면 이집트의 카이로처럼 과거가 월등 빛나는 도시 같은 곳이다. 반면 로마는 지금도 살아 숨쉰다. 하지만 몽롱한 선잠을 잘 때와 비슷한 조건에서다. 로마의 시간은 향수에 젖어, 설핏 잠을 자듯,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혼동케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희미한 기억 같은 것이다. 소렌티노는 그런 늙고 무력한 로마의 시간을 ‘위대한 아름다움’이라고 보고 있다. <그레이트 뷰티>를 통해 로마만이 소유한 죽음 같은 시간의 나른함을 여행하는 까닭이다.

‘노인의 집에서 나는 냄새’

영화는 로마의 여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푸른 하늘, 황금빛 태양, 인적 드문 황량한 느낌의 거리들, 그리고 일본인 관광객이 보인다. 아쿠아 파올라 분수 근처에서 로마 전경을 사진 찍던 일본인 남자 관광객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데, 아마 로마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때문인 것 같다. 말하자면 ‘스탕달 신드롬’(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봤을 때 느끼는 극심한 현기증)의 과장법이다. 그런 과장법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도입부의 로마는 말 그대로 장관이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여름의 로마 풍경에 적응할 때쯤, 영화는 갑자기 미친 듯 춤을 추는 밤의 파티 장면으로 이동한다. 주인공 젭 감바르델라(토니 세르빌로)의 65회 생일 파티다. 온갖 괴상한 외모를 뽐내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테크노 팝의 리듬에 따라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대는 흥분되는 밤이다. 게다가 남녀가 줄을 맞춰, 오로지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장면에서 들려오는 세속적이다 못해 천박한 가사의 음악은 이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세속적인 쾌락의 무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젭이다.

첫눈에 젭은 <달콤한 인생>(1960)의 주인공 마르첼로(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처럼 순간을 즐기는 쾌락주의자의 전형처럼 보인다. 주위의 여성들과 눈길을 맞추기 바쁘고, 이런 파티를 연 데,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나르시시스트 같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자신의 취향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는 젭이 어쩌면 유아기적 나르시시스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젭의 고백에 따르면, 소년 시절 친구들끼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말할 때, 다른 소년들이 모두 ‘여성의 그곳’을 꼽았는데, 오직 자신만은 ‘노인의 집에서 나는 냄새’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인공 젭은 자신이 이미 소년 시절에 ‘늙음과 죽음’에 본능적인 끌림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감성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고, 그런 감성 때문에 작가가 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젭은 지금까지 단 한편의 소설을 썼는데, 그 작품은 일부 사람들에게 지금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젭은 감독 소렌티노의 분신이고, 그래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매혹을 느낀다는 건 사실 소렌티노의 고백인 셈이다. 소렌티노의 작품은 늘 늙음과 죽음이라는 테마에 집중해왔다. 죽음 같은 침묵에 갇혀 사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인 출세작 <사랑의 결과>(2004), 뒤늦게 쾌락에 몰입하는 노인을 그린 <가족의 친구>(2006) 등 소렌티노의 작품들은 대개 ‘노인의 집에서 나는 냄새’에 관한 은밀한 탐닉이다.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일 디보>(2008)도 죽음에 다다른 노(老)정치가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레이트 뷰티>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토니 세르빌로는 <사랑의 결과>와 <일 디보>에서도 주연을 맡았는데, 이를테면 펠리니 영화의 마스트로이안니처럼 감독의 분신인 셈이다. 따라서 세르빌로의 등장 자체가 ‘늙음’과 ‘죽음’에 대한 소렌티노의 끌림을 환기하는 모티브인 것이다.

로마의 냄새

소렌티노는 늘 펠리니와 비교됐다. 미학적 공통점이 많아서다. 이를테면 에피소드 중심의 비전통적인 서사구조, 현실과 환상 사이 경계의 모호함, 지중해적인 에로티시즘, 사회 비판적인 코미디 감각 등이다. 그러나 두 감독의 미덕 혹은 소렌티노가 펠리니로부터 물려받은 최고의 미덕이라면 <그레이트 뷰티>의 도입부 자막에 소개된 ‘상상력’일 것이다. <그레이트 뷰티>는 프랑스 작가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소설 <밤 끝으로의 여행>(1932)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여행이 주는 상상의 미덕에 관한 제법 긴 문장인데, 요약하면 이렇다. “여행이 유용하다면, 상상력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것도 상상적인 것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이 여행은 모두 지어낸 것이고, 소설이며, 허구의 이야기다. 모두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다. 단지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삶의 이면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삶이라는 여행을 통해 상상을 펼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삶은 상상, 곧 지어낸 이야기이고, 이것은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성찰이다. 삶 자체를 눈을 감고 펼치는 상상으로 치환하는 이런 태도는 바로 두 감독의 공통된 영화적 미덕인데, 그 상상의 내용이 죽음의 허무주의와 더욱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 게 소렌티노의 다른 점이다. 물론 펠리니도 후기로 갈수록, 이를테면 <그리고 배는 간다>(1983) 같은 작품에선 청년의 활력보다는 필멸의 적막에 더 주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펠리니의 개성은 <사티리콘>(1969)에서처럼 금지된 쾌락을 공격할 때 더 빛났다. 반면에 소렌티노는 초기작부터 ‘노인의 집에서 나는 냄새’ 주변에 머물렀다.

소렌티노의 이런 데카당스한 태도는 펠리니보다는 비스콘티를 더 환기시킨다. <레오파드>(1963)에서 시칠리아의 늙은 귀족(버트 랭커스터)이 고백하던, ‘긴 잠’에 대한 소원 혹은 망각에 대한 욕망이라는 죽음에의 탐닉은 <그레이트 뷰티>에서 젭의 ‘소멸에 대한 충동’으로 표현돼 있다. 그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천장은 푸른 지중해로 변하고, 젭은 그 바다로 ‘사라지며’ 죽음으로의 여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실제로 젭은 기린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사 친구에게, 자신도 사라지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젭이 늘 이렇게 허무주의적이지는 않다. 어릴 때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감수성은 ‘늙은 도시 로마’에서 더욱 발전된 것 같다. 말하자면 ‘노인의 집에서 나는 냄새’는 젭에겐 ‘로마의 냄새’인 것이다.

<데카메론> 같은 세속의 만화경

젭은 26살 때 나폴리에서 로마로 왔는데, 처음 도착했을 때 꾼 꿈은 ‘세속의 왕’이 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종교계 혹은 사회의 엘리트 같은 공적 인물이 목표가 아니었다. 오로지 육체가 있는 인간이 세속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단맛을 최고의 자리에서 맛보고자 했다. 자신은 그걸 성취했다고 생각 했다. 젭의 고급 아파트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는데, 그곳에선 로마의 역사인 콜로세움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젭은 사교계의 인물들을 초대해 그 테라스에서 파티를 열고, 파티를 주관하며 자신이 ‘세속의 왕’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한축은 ‘로마의 냄새’를 맡고 다니는 젭의 세속의 경험이다. 개념예술을 한다며 이름까지 ‘탈리아 컨셉트(Concept)’로 바꾼 어느 여성 행위예술가는 로마의 유적지에서 나체로 머리를 벽에 처박는 행동을 한 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소리 지른다. 넘쳐나는 로마의 예술가들, 자신을 예술가로 굳게 믿는 이 여성은 예술가일까, 혹은 예술을 이용하는 사기꾼일까? 또 젭의 나폴리대학 동창인 좌파 여성 작가는 자기의 작품은 사회적 소명의식으로 쓰인 것이라고 자부한다. 개인적 감성이나 드러내는 젭의 소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좌파와 경제적 조건은 별개라고 해도, 수영장이 있는 집에서 집사, 정원사, 운전사, 하녀를 부리며 자식들을 방기하다시피 하는 작가가 쓰는 ‘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 뒤에 숨은 이런 작가는 또 얼마나 많을까? 신도와의 사적인 만남에선 토끼 요리법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는 추기경, 오직 엄마만을 사랑하여 그 고통에 차를 몰고 허공을 나는 젊은 아들 등 <그레이트 뷰티>는 마치 <데카메론>처럼 로마의 세속을 피카레스크 형식으로 전개한다. 그러면서 로마의 모순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식이다. 2012년 침몰한 뒤, 지금도 복원 작업이 이어지며 바다에 반쯤 잠겨 있는 유람선 콩코르디아호의 모습은 그 자체가 로마의, 또는 모든 세속의 은유처럼 제시돼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 세속의 허물들을, 혹은 세속 사람들의 추함을 넘어서는 게 있다면, 그건 늙어가고 죽어가는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도시 로마, 그 ‘로마의 냄새’라는 것이다. 젭이 새벽에 로마의 테베레 강 주변을 걸으며, 다시 말해 ‘여행’하며 ‘상상’하는 것은 자기 삶의 이야기들인데, 이것은 허구이고, 결국 죽음에 다다르며 끝날 것이다. 그 상상의 내용을 소렌티노는 <그레이트 뷰티>에 펼쳐놓았고, 그런 과정, 그런 로마의 시간을 ‘위대한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것 같다. 말하자면 ‘늙은 시간’을 산책하는 <그레이트 뷰티>는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로마에 대한 최고의 찬사에 가깝다. 영화의 도입부, 역사적 기념물에 조각된 글자, 곧 ‘로마가 아니면 죽음을’이란 말은 ‘죽음처럼 아름다운 로마’로 번역해도 될 것이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

상상력, 외로움, 축구의 화학작용

파올로 소렌티노에게 영감을 준 네 거장

<그레이트 뷰티>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을 때, 소렌티노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4명의 거장’을 소개했는데, 그들은 펠리니, 스코시즈, 토킹 헤즈, 그리고 마라도나였다. 시상식에선 거명만 하고 내려왔지만, 이후에 소렌티노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먼저 펠리니를 통해 판타지의 미덕을 배웠다고 말했다. 예술가의 최고의 덕목을 꼽자면 그건 상상력이고, 펠리니의 영화들은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소렌티노는 펠리니의 후계자로 종종 언급된다.

소렌티노는 17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사실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때 10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뮤지션이 토킹 헤즈다. 당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디스 머스트 비 더 플레이스>였다. 이 노래는 숀 펜이 주연한 <아버지를 위한 노래>(2011)에서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있고 싶은 곳이 바로 집’이라는 가사가 홀로 남겨진 소년에겐 특별하게 들렸을 것 같다. 토킹 헤즈의 리더 데이비드 번은 이 영화에 출연하여, 주제곡을 부르기도 했다.

마라도나는 소렌티노가 10대일 때, 그의 고향인 나폴리 축구팀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여느 나폴리 소년들처럼 그에게도 마라도나는 영웅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소렌티노는 테니스 코트였던 마라도나의 비밀 연습장에 숨어 들어가 그가 골문 구석으로 수백개의 슈팅을 반복하는 것을 훔쳐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마라도나의 축구는 그에게 ‘위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레이트 뷰티>의 축구 선수 시퀀스는 마라도나를 염두에 둔 장면 같다.

스코시즈의 영화도 좋아했는데, 특히 <코미디의 왕>(1983)을 보며 ‘외로움’의 감정이입을 경험한 뒤다. 그 외로움은 소렌티노의 모든 영화에 들어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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