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 vs 세월호, 문창극 vs 월드컵. 화제와 이슈 사이에서 기웃거리다보면 하루가 짧은 대한민국이다. 며칠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유병언 부자 수배 전단지가 붙었다. 왜 잡아야 하나요? 발견하면 신고 안 하고 직접 잡아도 되나요? 등등 친절한 Q&A까지 곁들여 있다. 이것이 검거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케팅 효과로는 충분해 보였다. 그에게 걸린 현상금은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 위반에나 해당하는 무려 5억원이다. 아들까지 합치면 6억원이다. 만약 내게 6억원이 생긴다면, 이라는 기대심리 이면으로 ‘세월호=유병언’ 공식이 확립된다. 강남에서 아파트 하나 못 살 돈이지만 서민들의 포커스를 흐리기엔 더없이 큰돈이다. 부질없는 것을 알면서도 수배 전단을 볼 때마다 상상한다. 만약 내게 6억원이란 돈이 뚝 떨어진다면, 더구나 세금 한푼 내지 않아도 되는 알짜배기 돈이라면… 가만있자, 일단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야겠지?
기생집 자유이용권?
몇달 전 드라마를 준비하던 한 작가를 만났다. 그는 편성도 되기 전에 20부작을 탈고한 초능력 작가다. 완고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운데 타이에서 한달 넘게 글을 썼다는 얘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질투심이 화라락 타올랐다. 아마도 풀빌라였겠지. 거실에 앉아 있으면 창밖으로 풀장이 보였을 것이다. 글이 꼬이건 마음이 꼬이건 문만 열고 몸을 던지면 물속이다. 혹시 모르지. 풀장에 맥주 몇캔 던져놓고는 수영하다 마시고, 마시다 수영하고, 그러다 술기운에 글을 쓰고, 술 깨면 이게 뭔가 싶어 다 지우고, 정신 차리고 다시 쓰다 지치면 또 문 열고 다이빙을 하고… 그랬겠지. 아마 그랬을 거야. 그게 거의 모든 작가들의 희망사항이니까. 그런 호사 한번 누려보는 것이 꿈이니까. 만약 6억원이 생긴다면 나도 그런 호사 한번 누려보고 싶다.
임선규 작가의 일화는 호사스러운 글쓰기의 끝을 보여준다. 일명 ‘홍도야 우지 마라’라고 알려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집필하고 나서 작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인센티브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기와집까지 받았으니 어느 정도로 흥행했는지는 미루어 짐작조차 못할 정도다. 다음 작품을 쓰기 시작할 때 동양극장에서 이른바 ‘기생집 자유이용권’을 주었다고 한다. 임 작가는 그곳에서 기생들을 대상으로 구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야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며 빌며 먼 길을 떠나 죽음에 이르게 되얏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듣고 있던 기생들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안 돼요! 그렇게 죽이시면 아니되어요!’라며 모니터를 해주었다고 한다. 대중이 그러하다면 작가는 그 자리에서 극을 수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듯 말 듯하던 그녀는 동쪽에서 온 귀인을 만나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어…’라는 결말로. 그 자리에서 오가는 모든 말들은 기생집 한구석에 앉아 있는 보조작가가 그대로 받아 적어 대본 초안이 완성되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글쓰기의 한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집, 커피숍, 도서관에서 최면 걸기
하지만 부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것이 호사스러운 글쓰기라 매도할 수가 없다. 당시 기생들은 새로운 악극이 개막되자마자 달려가는 주 관객층이었고, 극을 보고 나면 널리 알려주는 마케팅의 선봉대이자 평론가이자 기자였다. 작가는 기생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며 나 이런 글 쓰네 하며 자랑한 것이 아니라 오피니언 리더들과 기획회의를 하는 동시에 다음 작품에 대한 인지도와 호감도를 높인 것이었다.
타이에서 글을 쓴 초능력 작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배경이 타이 정글이라 제작사에서 굳이 가자고 했단다. 여기저기 널린 것이 정글 이미지라 굳이 가보지 않아도 충분히 쓸 수 있다. 하지만 듣고 쓰는 것보다 보고 쓰는 것이 좋다. 보고 쓰는 것보다는 느끼고 쓰는 것이 당연히 좋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저자 유홍준)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만큼 누릴 수 있다’는 말은 많은 작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대부분 작가들은 집, 커피숍, 도서관 등을 전전하며 글을 쓴다. 그곳에서 마치 보고 온 것처럼, 그래서 잘 느끼는 것처럼 최면을 걸고 있다.
<아바타>의 숲을 보고도 모르는 이유
얼마 전에 우연히 기회가 닿아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를 다녀왔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크로아티아 국립공원이고 <꽃보다 누나>를 통해 잘 알려진 곳이라는 설명은 그곳에 가서야 들었다. 크고 작은 계곡을 타고 내리는 100여개의 폭포, 석회암 지대 특유의 부드러운 물빛, 넘어진 나무의 죽은 몸을 타고 피어난 이끼와 그 위에 찍힌 알 수 없는 동물의 발자국. 신세계를 보는 느낌이었다. 카메라만 대면 그림이 나오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 무렵 가이드를 해주던 형님이 말한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이곳을 보고 <아바타>의 숲을 디자인했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남들 다 아는 얘기를 너는 왜 모르냐? 예전에 <아바타>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서 흥행 절망을 한 영화를 제작해서 그래. 남들 다 아는 얘기를 형님은 왜 몰라?
그냥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부러웠다. ‘느낌 아니까’ 그런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나처럼, 우리처럼 ‘느낌 모르고’ 영화를 디자인하는 사람과는 다르겠지. 영화 <세기말>에서 정경순씨는 ‘영화인들이 매일 여관방에서 글을 쓰니까 영화에서 여관만 나온다’는 대사를 했었다.
호사스러운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밀려왔다. 대상을 보고 느끼며 글을 쓴다면 실력이 부족해도 조금 더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효율적인 글쓰기만 강요하는 지금 우리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조차 사치일지도 모른다. 유병언이나 잡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