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대학 때부터 온갖 업종과 업소를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그러다 졸업하고 사회생활도 아르바이트로 시작했지, 그 일자리 풍년의 시대에). 당시 평균 시급은 1800원, 머나먼 20세기의 일이었다.
일하던 카페에서 미군 부대를 통해 불법으로 싸게 들여온 버드와이저 한병을 팔면 내 1시간40분 시급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왠지 억울해진 나는 보다 높은 시급을 찾아 밤에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6시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호프집의 평균 시급은 2500원, 임금 상승이 무려 28%! 과외하는 친구들의 시급에 비하면 1/10에 불과한 액수였지만 어차피 밤에 하는 일도 없이 노닥거리던 나는 마냥 기뻤다. 커피 향기에서 벗어나 술독에 빠지니 고향에 온 것 같았다(진짜 고향에선 미성년자로 우유만 먹었지만, 여기가 바로 내 마음의 고향). 그래, 재즈 카페는 무엇이며 B. B. 킹은 누구더냐. 나는 이현우와 쿨의 노래를 틀고 서비스 오징어를 뜯어 생맥주를 마시면서 신이 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술 취한 진상들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으니, 그로부터 몇주 뒤….
나는 궁금해졌다. 고양잇과 동물들은 천적으로부터 흔적을 숨기고자 배설물을 땅에 파묻고 멀리 달아난다고 한다. 한데 어찌하여 천적도 없는 이 호모 사피엔스과 동물들은 자신의 토사물을 신문지 사이에 묻은 다음 소파 밑에 쑤셔넣고 달아난단 말인가, 그냥 말만 하면 내가 치워줄 텐데.
또한 궁금해졌다. 왜 사람은 술만 마시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할까. 그땐 심야 영업이 불법이어서 밤 12시가 되면 술집 문을 닫아야 했다. 그래서 사장은 셔터와 블라인드를 내리고는 밖에 나가 단속이 뜨는지 골목을 지켰고, 나는 아무도 없는 주방을 지키면서 안주도 만들고(손님들, 미안했어요, 왜 감자튀김은 익기도 전에 타버리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요) 설거지도 하고 술잔도 나르고… 창문에 달라붙어 나가야 한다고 부르짖는 취객들을 뜯어냈다. “거기는 문이 아니라고요! 여기 2층이에요! 그러다 죽어요! 30분만 기다리면 진짜 문으로 나갈 수 있어요!”
그러다가 원래는 그냥 학생이었는데 느닷없이 ‘거기 예쁜 학생’이 되어 못된 손을 쳐내며 동네 아저씨들 옆에서 양주를 따르던 날, 나는 참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영화 <코알라>를 보고 알았는데, 침은 뱉는 게 아니라 ‘흘리는’ 거라고 한다. 안 그러면 안주에 거품이 떠서 손님한테 들킨다고. 그렇다, 아르바이트도 그냥 하는 게 아니었다. 아르바이트에도 프로의 도(道)라는 것이 있으니,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다가 <스타크래프트>의 온갖 종족 이름을 외우는 첫 번째 단계에서 좌절했던 나는(근데 나는 PC방에서 게임하려는 게 아니라 일하려는 거였는데) 그 사실을 좀더 일찍 깨우쳤어야 했다.
하지만 프로의 테크닉을 익히면 뭐하겠는가, 월급이 프로가 아닌 것을. <코알라>를 보며 나처럼 밤일을 하는 21세기 아르바이터 우리(너랑 나랑 우리가 아니라 이름이 우리)는 시급 4300원을 받는다고 하여 마냥 부러워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르바이트를 몇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모은 돈은 모두 1천만원, 일본영화 <백만엔걸 스즈코>의 스즈코가 몇달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도 1천만원(100만엔). 그냥 100만원만 모아서 비행기 타고 아르바이트하러 일본 가는 게 낫겠다. 하지만 나는 일본어를 못하지.
스즈코는 100만엔을 모으면 다른 고장으로 이사 가서 다시 100만엔을 모으기 시작하는 아르바이트 전문가다. 그렇게 1년이 안 되는 사이 100만엔 모은 게 세번. 100만엔을 모아서 이사하자고 결심했다면 나는 이사를 못 가서 아직도 서울 시민일 텐데. 진상을 캐고자 나보다 한살 많은 일본인에게 물어봤더니, 그녀가 편의점에서 일하던 20세기 일본에선 시급이 800엔이었다고 했다. 어엿한 정규직으로서 일년에 1천만원을 모으기는커녕 마이너스 통장이 없는 것만도 다행이다(아, 근데 대출 있지), 여기며 허덕이고 있는 나는 100만엔 걸은 이미 늦었다 쳐도 100만엔 마담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 매우 슬퍼졌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나마 20세기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다행이라 여기게 되었으니 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이건 뭐지, 여기가 편의점인가 아르바이트 지옥인가. 그래도 나는 월급 떼인 적도 없고(정규직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떼인 적은 두번 있다, 퇴직금까지 치면 세번), 버르장머리 없는 10대들이 무서워서 담배 판 적도 없고, 강도를 당한 적도 없지 않은가.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세상은 뒤로 굴러가나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노인네처럼 ‘그때가 좋았지’ 했는데,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그때’가 되겠지.
월급은 받는데 할 일은 딱히 없어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히 모처에서 객원기자에겐 임금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는 블로그 글을 보았다. 진위는 모르겠지만 처음엔 일을 가르쳐야 하니 그렇다고 했다고. 음, 일을 가르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종일 놀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나는 뭘까. 나이 마흔에 고용조건만은 나무랄 데 없는 정규직이지만 일을 배울 능력도 없어서 내가 대신 해주고 있는 내 앞자리 사람은 뭘까. 어쨌든 객원기자였던 나를 가르쳐가면서 한달 교통비 30만원에 원고지 매당 7천원의 원고료까지 주셨던 모 잡지의 모 편집장님, 감사합니다. 그땐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감사한 일이 되었어요. 이러니 그때가 좋았지.
맥주 거품을 만드는 재능?
아르바이트 지옥에서 살아남는 두세 가지 방법
타고난 재능 <백만엔걸 스즈코>의 스즈코에겐 타고난 재능이 몇 가지 있다. 빙수 그릇에 얼음을 쌓고 시럽 뿌리는 재능과 복숭아를 따는 재능. 이걸 도대체 어디다 쓴단 말인가, 아르바이트에 쓴다. 바닷가에 가면 빙수가게에서 일하고 산골에 가면 과수원에서 일할 수 있다(하지만 얼굴이 아오이 유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쉽게 일을 구하진 못하겠지). 나에게도 재능이 있긴 있었는데 생맥주를 거품 없이 따르는 재능이었다. 단박에 맥주 따르는 법을 익혀 오로지 맥주로만 500cc 잔을 채운 나를 보던 사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원아, 맥주는 거품이 있어야 맛도 있고… 조금 들어가.” 그래서 거품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맥주 나오는 꼭지를 반대로 젖히면 된대요.
시차 적응 나도 한때는 나무늘보가 되고 싶었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 잠을 자고 깨어 있어도 자는 거나 마찬가지인 게으른 동물,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나뭇잎만 먹고살 수는 없어 나무늘보가 되진 못했지만 벌건 대낮에 커튼도 치지 않고 열두 시간 숙면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기에 새벽까지 일하던 시절, 밤마다 팔팔하게 술잔을 날랐다. 그 시절 내가 <코알라>를 보았다면 내 꿈은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는 코알라가 되었을 텐데. 나는 나무늘보가 되지 못했지만 대낮에 술 마시고 코알라(줄여서 콸라)가 된 우리에게 경의를.
무념무상 1990년대 한국, 아직은 ‘진상’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참 좋은 시절이었… 을 리가. 그때도 ‘진상’이라는 단어가 태어나기 위한 토양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으니, 그걸 견디고 살아남아 하루치 일당을 손에 쥐려면 영혼을 비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10대들한테 욕 얻어먹는 편의점 알바 세진(정유미)을 보면서 다정한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나온 말들은 이랬다. 근데 정규직이 되면 편의점 진상들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그 진상들이 편의점에 없을 때는 어디에 있을까? 사무실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