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장대비다. 세찬 빗줄기를 뚫고 늦은 밤 윤지혜가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갑작스럽게 비가 오네요. 관객이 내일 극장에 많이 오실까요?” 그녀의 말 속에서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 개봉 전야의 긴장감이 감돈다. 윤지혜는 <군도>에서 지리산을 누비던 군도 추설의 일원이자 억세고 강인한 명사수 마향으로 등장한다. 드센 사내들 사이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기센 여자다. 그런데 웬걸. “어머머머~.” 촬영용 스모그 머신 앞에 선 그녀가 박수까지 쳐가며 소리내 웃는다. 살짝살짝 코믹 춤까지 곁들여가면서 말이다. 매번 카리스마 넘치는 역을 맡아왔던 그녀에게 이토록 발랄하고 소탈한 면모가 있었던가. <군도>의 주요 인물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로 데뷔 16년 만에 가장 크게 주목받고 있는 윤지혜와 마주앉았다. 해갈을 전하는 비를 보며 문득 그녀를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군도> 개봉이다. 기분이 어떤가.
=살짝 긴장은 되는데, 잘될 것 같다. 자신 있다. 800만, 900만명 이상은 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녹음기를 가리키며) 이거 되게 무섭네. 나중에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라면서 발목 잡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웃음)
-주요 인물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합류한 걸로 안다.
=크랭크인 직전에 캐스팅됐다. 그전부터 윤종빈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해서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다. 미팅이 잡혔다고 하기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손으로 본인 얼굴을 가리키며) 감독님이 일단 내 상태만 본 거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셨고, 내 작품을 본 적도 없다고 하시더라. 첫 미팅 뒤에 “다음에 리딩 한번 해봅시다, 화장기 없이 한번 봅시다” 하시더라.
-<군도>의 한재덕 총괄프로듀서(사나이픽쳐스의 대표)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재덕 오빠가 내가 출연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의 제작부장이었다. 그때 오빠가 고생을 되게 많이 했다. 안 되는 거 억지로 되게 하려고.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보니 오빠가 영화계에 굉장히 큰 어르신이 되어 있더라. “어, 오빠. 왔어?” 하며 지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윤종빈 감독과의 미팅 전에 한재덕 프로듀서가 특별히 조언해준 게 있었나.
=팁을 줬다. 윤종빈 감독님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좋아한다고. 극중 마향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데 “아버지 고향이 전라도라서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그래, 그런 거 어필해”라고 말씀하시더라. 나름 작전을 알려주셨다.
-마향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해 들어갔나.
=아이를 둘러업고 활을 쏘는 여자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거기서 출발했고 몇몇 역사 속 인물들을 접목해봤다. 그중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굽히지 않는 깡과 투지가 있는 여성. 사연을 겪고 산채에 들어온 마향에게는 힘든 작전을 펼치고 고난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의지가 필요했다.
-영화에서는 마향의 전사(前史)가 그려지지는 않는데.
=원 설정은 이랬다. 먹을 게 없어 양반집 무덤을 파헤쳐서 패물을 훔치고 그걸로 먹고사는 여인. 한마디로 천하디천한 도둑년이다. 또 감독님이 말씀하길 남편과 같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남편은 죽고 마향 홀로 살아남아 군도에 합류하게 됐을 것이라고 하시더라.
-극 초반에 마향의 액션 신이 눈에 확 띄더라. 본격적으로 극을 열어젖히는 시작점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유의 장면이다. 과격하고 무섭고 ‘드럽기도’ 하고. 그런 게 난 좋더라. 액션 연기는 처음이었다. 겁이 많은 편인데 촬영 초반에 말에서 떨어졌다. 정말 외마디 비명을 “꽥~” 질렀다. 이후에도 긴장이 되더라. 또 한번은 활을 쏘다가 카메라 렌즈를 맞춰 촬영감독님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사실 내 액션은 현장 스탭들 덕에 완성됐다. 카메라워킹도 속도감 있게 가주고 상대 연기자가 실제로 힘껏 때리라고 해서 진짜 세게 때리기도 하고. 덕분에 액션을 잘하는 사람처럼 나왔다.
-“지혜씨는 구수하고 동양적인 얼굴”이라는 윤종빈 감독의 말도 그렇고 기존의 도회적인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나왔다.
=머리도 올리고,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보니 나한테도 되게 순한 얼굴이 있더라. 나도 놀랐다. 매번 ‘차도녀’다, 새침하다, 세다는 말만 들었는데 나의 색다른 면에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정우, 조진웅, 마동석 등 입담 좋기로 소문난 배우들이 다 모였다. 재담 실력은 견줄 만했나.
=내 입담은 입담 축에도 못 든다. (두손으로 박수를 치며) 하하하하~ 웃느라 바빴다. 듣고 있으면 어찌나 재밌는지. 근데 이들은 진짜 선수들이다. 나는 한번 낙마 사고를 겪은 뒤로 말을 탈 때마다 공포에 질려 연기고 뭐고 달리기만 했다.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까 같이 말에 오른 다른 배우들은 무섭고 힘든 와중에도 다들 연기를 하고 있더라. ‘아, 선수들한테 잡혔구나’ 싶었다. 연기 공부가 많이 됐다.
-<여고괴담>(1998)의 ‘2등 귀신’ 정숙으로 눈에 띄는 데뷔를 하고 꾸준히 연기를 해왔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굶주림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게서 보여지는 것, 내가 했던 것 이상의 것을 나에게서 찾아내려고 하지 않더라. “너한테는 그게 있으니까, 그렇게 하면 돼” 이 정도지 “너는 이렇게 하면 되게 재밌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를 더 확장시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데서 오는 갑갑함이 컸다. 사실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잖나. 그럴 때마다 나 자신에게 제일 많이 화가 났던 것 같다.
-<물고기자리>(2000)의 희수, <유령>(2012)의 구연주는 자신감이 넘치고 <예의없는 것들>(2006)의 그녀는 거칠 게 없다. 대체로 한정된 캐릭터들이 많았다.
=정형화되는 걸 원치 않지만 나름대로 내 캐릭터를 설정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강하려면 아예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끈한 게 재밌지 않나. 아니면 아예 건조하거나. 나는 어중간하면 안 되는 것 같다. <군도>에서 대호(이성민)가 매력적인 것도 이왕 하려면 ‘대빵’으로 해야지 싶어서다. 조윤(강동원)처럼 열등감을 느끼는 캐릭터도 좋아한다.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편안한 느낌보다는 어딘가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에 끌린다. 내가 예쁘고 사랑스러운 과는 아니지 않나. 한국영화에서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너무 제한적인 것도 있다.
-아직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을 텐데 꼭 해보고 싶은 캐릭터나 장르가 있나.
=심리 스릴러.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쭉 끌고 나가는 스릴러가 좋다. (콧소리를 섞으며) 코믹도 진짜 해보고 싶다. 너무 진지해서 웃긴다든지, 의외의 반전이 있다든지, 생각보다 멍청하다든지.
-<군도> 이후가 궁금하다.
=아직 정해진 작품은 없다. 많이 들어오면 좋겠다. “어, 누구였지? 아, 맞다! 윤지혜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끔 정체되지 않고 계속 변화해가고 싶다. 일단 작품이 오면 땡큐다.
magic hour
말 없는 상대와의 강렬한 대화
“왔어요?”라는 인사에 앞서 키스부터 하고 보는 여자. 첫 주연작 <예의없는 것들>에서 윤지혜가 연기한 술집 마담 ‘그녀’는 당돌하고 저돌적이다. 게다가 씻을 수 없는 상처에 삶을 통째로 저당잡힌 위태로운 여자이기도 하다. 윤지혜는 이 심상치 않은 인물을 연기했던 때를 떠올리며 “얼마만큼 나 자신이 깊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됐다고 전한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는 사람은 혀가 짧아 말을 하지 않게 된 살인업자 킬라(신하균). 말이 없는 상대방과 연기를 주고받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도 그녀는 “킬라를 바라보는 시선에 모든 것을 집중”(<씨네21> 567호)하며 액션과 리액션을 넘나들었다. <예의없는 것들>에는 강렬함 그 이상으로 쓸쓸한 윤지혜의 맨 얼굴이 확연히 찍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