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마이클 베이 회고전
2014-07-31
글 : 김혜리

<레이드2: 반격의 시작>은 건물을 액션의 공모자로 적극 활용한다. 이 영화에서 구조물은 곧 철과 콘크리트로 된 둔기이며, 다채로운 액션 동선의 가이드라인으로 기능한다. 떼 지어 달려드는 적을 홀로 맞이한 주인공 라마(이코 우웨이스)는 비좁은 화장실 큐브를 요새로 삼는다. 그는 화장실 문을 수도 밸브처럼 열었다 닫으며 감당할 만한 수의 상대를 불러들여 때려눕힌다. 하지만 금세 뻗어버린 적들로 가득 찬 큐브는 라마를 점점 밖으로 밀어낸다.

7/4

“흔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달리 물량공세로 승부하지 않는다.” “보통의 블록버스터에서 보기 힘든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일정한 완성도를 갖춘 거대예산 영화의 리뷰에서 자주 접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여기서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흔한, 보통’ 블록버스터는 예컨대 어떤 영화일까? <노아>?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엣지 오브 투모로우>? 다들 해당 사항이 없다.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제작비 1억달러 이상 영화에 인적 자원과 기술력을 집중 투자하게 된 이래 슈퍼히어로물을 비롯한 액션 블록버스터의 만듦새는 상향평준화되었다. 걸출한 작품은 드물지언정. 앞에 열거한 평을 쓴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비교 대상은 무엇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그것이 대표하는 마이클 베이 영화다. 그렇다면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표준화된 기성품일까? 기묘하게도 실상은 반대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제작위원회’가 다수결로 만든 절충의 산물이 아니라 마이클 베이라는 개인의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매우 사적인 영화다. 오늘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를 관람하는 164분 동안, 나는 어떤 ‘예술영화’를 볼 때보다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 뒤에 있는 감독의 취향과 태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트랜스포머> 연작은 블록버스터의 표준은커녕 예외적인 영화다. 만드는 영화마다 본인의 인장을 새기는 감독을 ‘작가’(auteur)라고 정의한다면 마이클 베이야말로 상작가다. 이 호칭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치판단이 포함된 심급을 추가해야 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 들어가 검색해보았다. 마이클 베이 작가론은 아직 출간된 바가 없나보다. 좀 놀랍다. 베이의 영화는, 실질적 관람보다 그것에 관해 떠들고 쓰는 일이 훨씬 ‘재미있는’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베이가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액션영화에 두루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베이의 영화를 매우 열심히 보았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마이클 베이 영화에는 흉내내기 불가능한 ‘독창성’이 있다.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는 단편 8편을 붙여놓은 것 같기도 하고 예고편을 하염없이 늘려놓은 것도 같다. 어쨌거나 우리가 익히 아는 단일한 장편영화의 형상은 아니다. 장면은 아무렇게나 시작해서 아무렇게나 끝나고, 시퀀스끼리는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으며 시간의 흐름을 헤아릴 수 없도록 밤낮이 널뛰는 와중에 약간이라도 감정이 섞인 장면에는 석양이 물든다. 마이클 베이 영화는 밤 장면에도 많은 광원을 배치해 환하게 밝혀지며, 빛을 반사하는 구슬 같은 땀방울로 더위를 강조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 해가 지는 패턴이 있는데, 이 설정은 해가 떠 있는 한은 내내 질주하고 때려부숴야 한다는 믿음의 반영 같다. 마이클 베이 영화에서 말초신경의 흥분과 직접 관련이 없는 세부에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아무리 러닝타임이 길어도 낭비로 간주된다.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서 어떻게 극장 실내에 대형 트럭이 버려져 있는지 궁금해하면 당신은 베이 영화의 새내기다. 같은 영화에서 과학자(스탠리 투치)는 “알고리즘! 수학!”이라는 단어 두개로 트랜스포뮴(트랜스포머를 이루는 무한 변형이 가능한 물질)의 조작 원리를 요약한다. 마이클 베이 영화에는 대체로 속도는 없고 속력만 있다. 사람은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파악해야 속도를 느끼는 법이다. 즉, 벡터는 없고 스칼러만 있다. 마이클 베이의 우주는 방향 없이 크기만 갖는 물리량이 지배한다. 양만 충분하면 질은 무관하게 무엇이든 원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트랜스포뮴은 그러므로 마이클 베이 우주의 에센스로서 아주 적절한 물질이다. 그러나 정말로 경외스러운 부분은 고집과 추진력이다. 마이클 베이는 열거한 난센스들이 상식이 될 때까지 커리어 내내 도끼질을 계속해왔고 대중은 거의 넘어갔다. 급기야 베이 영화를 보다 액션의 동선이 파악되는 예외적 순간이 오면 약간 불안하다. 그런 맥락에서 돌아보면 <타이타닉>의 여파 속에서 만들어진 <진주만>은 가장 작가성이 흐릿한 마이클 베이 작품이다. 아무래도 실제 미국사를 다루다보니 정적인 설명 장면도 꽤 있고 편집은 상대적으로 느리고 액션도 지나치게 일관성 있었다.

7/5

상업적 고려나 스튜디오의 의견이 반영됐다면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는 길어야 140분 선에서 마무리됐을 것이다. ‘더 크게 화려하게 시끄럽게’가 성가신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자 마이클 베이는 ‘더 길게’를 통해 흡족한 자극의 총량을 달성한 게 아닌가 싶다. ‘작가’ 마이클 베이가 견지하는 예술적 자부심의 든든한 근거는 공짜로 영화를 보는 저널리스트들의 리뷰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고 티켓을 사는 관객의 표결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마이클 베이 영화의 무엇을 사는 걸까? 배급과 광고의 힘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경우, 거대로봇의 액션만 따지면 <퍼시픽 림>이 낫고 캐릭터의 카리스마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월등하다. 미지의 세계에서 온 힘센 친구와의 우정은 <아이언 자이언트>나 <터미네이터>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니까 관객은 이런 오락영화의 상식적 장점을 즐기려고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표를 사는 게 아니다. 다른 영화에 없고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있는 것은 냉각기를 생략한 절정의 연쇄이며 관객의 신경을 향한 중단 없는 물리적 연타다. 게다가 이 쾌감은 극장 스크린에서만 얻을 수 있다. 한번 집으면 멈출 수 없는 팝콘과 탄산의 자극이 더해지면 체험은 완성된다.

마음의 평화를 구하기 위해 마이클 베이 영화를 시네마가 아닌 무엇, 현대미술과 비슷한 현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상표와 광고판을 관객의 코앞에 들이대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뻔뻔한 간접광고(PPL)를 앤디 워홀의 수프 깡통에 견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팝아트는 일상성을 걷어낸 공산품 이미지로 대량생산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마이클 베이의 PPL은 상품을 정확히 상품으로 판다. 팝아트가 여의치 않다면, 서사에서 탈구된 시각 임팩트에 몰두하는 마이클 베이를 일종의 추상표현주의 아티스트로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베이의 대학 스승인 영화학자 재닌 베이싱어가 비슷한 노력을 했다. “잉마르 베리만은 모든 훌륭한 필름메이커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영화를 정의한다고 말했다. 마이클에게 시네마는 속도와 빠른 운동이다. 시간과 공간, 빛과 색채를 이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마이클은 추상주의 아티스트며 거의 실험영화 감독이다.” 일리 있고 솔깃하다. 그러나 마이클 베이가 만드는 작품은 여전히 내러티브영화이며, 광학 효과와 순수한 감각적 체험만 제공하는 미술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매우 특정한 세계관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포함한다. 얼마나 파괴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파괴하고 그걸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다.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는 악당의 얼굴이 날아가는 자동차 바퀴에 치어 변형되고 침이 튀어나오는 슬로모션이 있다. 꽤 비중 있는 조연이 우스꽝스러운 잿덩어리로 산화하는 숏에는 어떤 애도나 상실감도 없다. 적을 해치울 때면 “넌 그냥 더러우니까 죽어줘야겠어” 같은 대사가 따라붙는다. 2001년 <필름 코멘트>에서 비평가 켄트 존스는 이렇게 요약했다. “마이클 베이 영화는 악당을 그냥 물에 빠뜨리지 않는다.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여 화학물질로 오염된 액체에 빠뜨린다.” <나쁜 녀석들2>에 대한 <살롱>의 찰스 테일러도 관찰을 공유한다. “악당은 총탄세례를 받는 걸로는 불충분하다. 지뢰밭에 떨어져 갈가리 찢긴 몸의 파편을 보여줘야 한다. 영구차가 카 체이스에 말려들면 시신이 도로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뒤에 달려오던 차가 시신을 치어 사지가 떨어져나가는 걸 보여줘야 직성이 풀린다.” 마이클 베이 영화를 갤러리 소관으로 넘기고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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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아들 집에서의 하룻밤

<동경가족>이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에 새롭게 덧붙인 대목은 막내아들 쇼지(쓰마부키 사토시)와 그의 애인 노리코(아오이 유우)의 이야기다. 정해진 직장 없이 살아가는 아들의 방이 ‘거지 소굴’일 거라 예상하고 앞치마까지 챙겨간 어머니(요시유키 가즈코)는 뜻밖에 정갈한 집에 놀란다. 이 질서를 가능케 한 인물은 노리코다. 어머니는 근심하던 자식의 단점이 누군가에겐 매력일 수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는다. 처음 만난 두 여자는 같은 대상을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 즉각 피어오르는 조건 없는 신뢰를 나누고, 소중한 이를 서로에게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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