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권유진] 대를 이어 영화에 날개를 달다
2014-08-06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명량>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권유진 의상감독

“한남동에 이사온 건 지난해 10월이었어요. 아직 개발이 미치지 않은 동네라 사람 사는 곳 같네요. 그전에? 사무실이 논현동에 있었어요. 의상 창고는 아직 경기도 용문면에 있어요.” 지저분할 줄 알았던 작업실이 의외로 깨끗하다. 임승희 의상감독과 함께 해인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고 있는 권유진(56) 의상감독은 “인터뷰 때문에 사무실을 급하게 치웠지 뭐예요”라고 웃으며 인사를 대신한다. 권유진 의상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1985년작 <길소뜸>으로 의상감독에 데뷔한 뒤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태백산맥>(1994),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등 코리안 뉴웨이브를 거쳐 <청연>(2005), <웰컴 투 동막골>(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최종병기 활>(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30년 가까이 충무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가 참여했던 <명량>(7월30일 개봉)과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 8월6일 개봉)이 한주 간격으로 여름 시장에서 격돌하는 걸 보면 그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명량>과 <해적>이 한주 간격으로 맞붙습니다. 어떠신가요.
=오래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1987)와 이혁수 감독의 <연산군>(1987) 모두에 참여했는데, 두 영화가 같은 날 개봉했어요. 난감했어요. (웃음) <명량>과 <해적> 둘 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어머님이신 이해윤 선생(<단종애사>(1956)로 데뷔한 뒤 50년 가까이 영화 의상을 만들어온 영화 의상감독)은 1977년작 <난중일기>의 의상감독으로 참여해 이순신 장군 갑옷을 만든 바 있습니다. <명량>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 기분이 묘하셨을 것 같아요.
=어머님께서 <성웅 이순신>(1971)과 <난중일기>에 참여하셨어요. 당시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어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과 박물관 자료를 토대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너무 밋밋하더래요. 그래서 “이건 고증이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순신 갑옷에 태극 문양을 넣으셨어요. 그걸 본 당시 방송국들이 그대로 갖다 썼대요. 어머님께서 “평생 실수한 게 그것”이라고 후회하세요.

-<명량>의 이순신 장군 갑옷은 검은색 찰갑(札甲)입니다. 어떻게 구상하셨습니까.
=임진왜란 때 찰갑과 두정갑을 주로 입었어요. 두정갑은 소, 돼지, 노루 가죽을 말려서 만든 편을 의복 안쪽에 대고 겉에서 쇠못으로 박아 만든 갑옷이에요. 이순신 장군 갑옷은 찰갑으로 만들었어요. 김한민 감독에게 농담 반, 진담반으로 “이 영화가 나온 뒤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바꿔버리자”라고 얘기할 정도로 각오를 가지고 임했어요.

-이순신 장군 찰갑에 황금색 용 문양을 넣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으니 일반 갑옷과 다르게 만들어야 했고, 바다를 지배하는 직책이니 물고기보다는 용이 어울릴 거라고 해석했어요.

-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왜군 장수 갑옷이었습니다. 왜군 장수 갑옷을 제작할 때 기준으로 삼았던 건 무엇입니까.
=도도(김명곤), 와키자카(조진웅), 구루지마(류승룡)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자 해군 제독 도도 다카도라는 일본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입니다. 양쪽 귀에서 튀어나온 투구는 도도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일본 수군의 총사령관이었으니 황금색을 컨셉으로 잡았어요.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시 유명한 인물이었어요. 감독님과 전형적인 일본 장수로 묘사하자고 의견을 나눴어요. 그래서 일본 갑옷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태의 가부도(투구)를 제작해 (조)진웅씨에게 씌웠어요.

-류승룡씨가 연기한 구루지마는 도도나 와키자카에 비해 치장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투구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검은색 털도 강렬하고.
=굉장히 호전적인데 불행한 장수였어요. 임진왜란 때 다이묘(영주)가 사망한 건 구루지마 형제뿐이었어요. 일본 갑옷 장인들도 도도, 와키자카, 가토 모두 알겠는데 대체 구루지마가 누구인가 궁금해할 정도로 일본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이에요. 구루지마 의상은 다케다 신겐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어요. 일본 전국시대 때 전쟁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을 떨친 장군이었으니 구루지마 역시 그를 숭상하지 않았겠나 생각했어요. 영화 속 구루지마가 쓴 투구는 다케다 신겐의 그것을 본떠 만들었어요. 마지막까지 결정하지 못했던 건 다케다 신겐처럼 흰색 털로 갈 것인가, 아니면 검은색 털로 갈 것인가였어요.

-흰색과 검은색의 차이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흰색은 다케다 신겐의 색깔이잖아요. <명량>을 본 일본 관객이 다케다 신겐이 왜 저기에 있지라고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투구에 달린 털은 야크털이에요. 검은색으로 염색해 한 가닥씩 조심스레 펴면서 내가 미용실에서 근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었는데도 영화를 보니 숱이 좀 적지 않나….

-얼굴을 가리는 면갑(마스크)을 구루지마에게만 착용시킨 이유가 있었나요.
=원래 다이묘들은 면갑을 해요. 면갑을 착용해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가게무샤(대역)를 내세워요. 영화에서 구루지마만 마스크를 쓴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비싼 배우들을 세워놓고 얼굴을 가리면 안 됐고, 구루지마가 등장하면서 마스크를 쓰윽 벗는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었어요.

-갑옷을 제작하기 위해 일본까지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가고시마에 있는 갑옷 만드는 곳이었는데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봤어요. 한국에서 결정한 디자인을 가지고 가서 그 디자인대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일본에서 갑옷을 만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의상 피팅 때 갑옷을 입은 배우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안 벗더라고요. (웃음)

-<명량> 현장에는 의상팀 수선 공간이 별도로 마련됐다던데요. 촬영하면서 손상된 갑옷을 현장에서 바로 수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액션” 하면 칼로 치고, 발로 밟고, 넘어지다가 “컷” 하면 옷 열개가 와요. 망가졌다고. (웃음) 처음에는 가죽을 대고 수선했는데 나중에는 함석을 박았어요. 또 찌그러진 채로 와요. 더 큰 함석을 잘라 덧대고. 촬영이 끝나갈 때쯤 갑옷들이 너덜너덜해졌어요. 이번에는 알뜰하게 썼어요. 남아 있는 갑옷이 없을 정도니.

-<명량>은 고증이 중요했다면 <해적>은 상상력으로 채워넣는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영화의 배경이 고려 말, 조선 초예요. 관군은 고증을 따라 경번갑을 입혔어요. 철사로 작은 고리를 만들어 가죽에 꿴 갑옷이에요.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상인들이 아라비아까지 진출한 데다가 고래가 국새를 집어삼켰다는 영화의 설정을 보니 해적은 상상력을 펼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칼이나 여러 소품을 배에 둘 수 있으니 복장은 간편하게 설정했어요. 산적은 여기저기서 깨지며 도망다니는 신세라 칼이고 뭐고 다 짊어지고 다니는 컨셉으로 정했어요.

-해적 중 이경영씨가 연기한 해적 대단주 소마의 의상은 특히 더 많은 상상력의 결과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대양에서 활동하는 해적이라 소마는 더욱 다양한 설정을 시도해봐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외국에서 가져온 진귀한 액세서리도 몸에 둘렀을 것 같고.

-어릴 때 어머님께서 영화 의상을 만드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주 재미있었어요. 집 안에 갑옷이나 칼이 있어서 친구들을 불러 칼싸움하고 난리가 났죠. 중학생 때 여러 작품이 흥행에 실패해 가세가 기울어졌어요. 그땐 인건비와 의상비를 다 어음으로 받았잖아요. 의정부로 이사갔는데 어머니께서 챙기셨던 물건은 전화기 딱 하나였어요. 이게 밑천이다. 사람들이 전화로 날 찾으니까, 하시면서요. 다시 재기하셔서 서울로 이사오고. 눈물겨운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 의상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외려 아버지께서 나를 종군기자로 만들려고 하셨어요. 내 이름도 2차 세계대전 종군기자 유진 스미스에서 따왔어요. (웃음) 덕분에 중학생 때 카메라를 배울 수 있었죠.

-영화 의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머니께서 <내시>(1986)를 찍을 때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요. 4시간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는데 침대에 누운 어머니를 보니 손발 모두 묶여 있더라고요. 밤에 병실을 나가신대요. <내시> 현장가야 한다고.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영화 의상을 본업으로 생각하고, 어머니께 엄청 깨지면서 재단, 재봉을 비롯해 영화 의상의 하나부터 열까지 배웠어요.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의 의상감독으로 데뷔하셨습니다. 기억이 많이 나시나요.
=그럼요. 주인공을 맡았던 김지미 선생님은 되게 잘해주셨어요. 어머니와도 작업을 많이 하셔서 저를 보자마자 “우리 꼬맹이, 오랜만이야. 내 차에 오줌 쌌던 놈”이라고 반가워 해주셨고. 어릴 때 저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어머니께서 항상 촬영장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제가 현장에서 헤집고 다니니까 김지미 선생님의 자가용에 집어넣으셨어요. 소변이 마려운데 차문을 못 열자 그만 차 안에 싸버렸대요. (웃음)

-지금까지 하신 작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청연>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고 들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영화 의상에 눈을 뜨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다양한 의상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청연>은 먼저 맡고 싶다고 제작사에 제안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면서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민간 비행사가 주인공이라는 얘길 듣고 정말 해보고 싶었어요. 배경이 일제 시대였고. <청연>은 일본, 중국 의상팀 모두 경험할 수 있어 좋았어요.

-오랜 파트너 임승희 의상감독과 함께 영화 의상팀 해인엔터테인먼트를 이끌고 있습니다. 두분의 역할 분담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요.
=기본적으로 모든 작품을 함께 작업해요. 사무실에서 ‘웹서핑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임승희 감독은 자료 조사에 뛰어나요. <광해, 왕이 된 남자>나 <명량> 같은 사극을 할 때 배경이 되는 시대를 주제로 한 각종 논문을 뽑아줘요. 그 자료를 줄 쳐가며 읽고 디자인 재료들을 찾아요. 저는 원단이라든가 의상 디자인이라든가 창작에 주력하고. 임승희 의상감독과는 최고의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해인’이라는 회사명은 어떤 뜻인가요.
=어머니의 이름에서 딴 바다 해(海)와 어머니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람 인(人)을 합쳤어요. 바다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뜻도 있어요. 임승희 의상감독을 스쿠버다이빙 온라인 동호회에서 만났거든요.

-윤종빈 감독은 권유진 의상감독을 두고 “항상 순수하게 작업에 열중하신다”고 말했어요. 반대로 임승희 의상감독은 “너무 순수해서 의상 제작에 너무 많은 비용을 쓴다”고 불만이 많아요. (웃음)
=시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원단이 있으면 꼭 사야 해요. 값이 얼마든.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때도 비싼 원단 샀다고 임승희 감독한테 엄청 깨졌어요. 한지민씨 치마를 제작할 때 우리나라에서 봐왔던 패턴과 다른 패턴을 하고 싶었어요. 동대문과 광장 원단 시장에서 일주일 넘게 뒤져서 원하는 패턴을 찾았어요. 보통 두마면 치마를 완성할 수 있는데, 패턴 때문에 라인을 맞추려면 다섯마가 필요한 거예요. 결국 원단 값만 40만원 넘게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임승희 감독이 중국 원단 시장에 보내주더라고요. 임승희 감독은 비싼 거 적당히 씁시다 그러고, 저는 비싼만큼 화면이 다르지 않냐 그러고. 결국 임승희 감독이 저한테 설득을 당하지만 말이에요. (웃음)

-얼마 전, 중국에서 서극 감독의 신작 <지취위호산>을 작업하셨습니다. 직접 경험해본 중국영화는 어땠습니까.
=<청연> 때 저를 신뢰해준 이치윤 프로듀서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그가 서극 감독님께 저를 추천해줬어요. 중국영화는 어떤 면에서 합리적이에요. 규모도 어마어마하고요. 의상 디자이너의 역할은 한국과 좀 달랐어요. 중국은 의상뿐만 아니라 분장, 헤어, 피부 톤, 소품까지 신경써야 해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인 수명이 오래간다는 것. 그립팀이나 조명팀 스탭 중에는 할아버지들도 많이 계세요. 그런 풍경을 보면서 우리나라 영화인의 수명이 좀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쿠버다이빙과 낚시를 즐겨 하신다고.
=스쿠버다이빙할 때는 영화 생각 안 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밤낚시를 가요. (웃음)

-혹시 어머님께서는 <명량>의 이순신 갑옷을 보셨나요.
=아직 못 보셨어요. 혼날지, 칭찬받을지 모르겠어요. <청풍명월>(2003) 때 갑옷을 검은색으로 만들었다고 무지 혼났어요. 시커멓다고.

-평가가 박하신가 봅니다.
=엄청 박하세요. 여태까지 의상 잘했다는 얘길 한번도 못 듣다가 <광해, 왕이 된 남자> 때 처음 들었어요. 의상 좋다고. (웃음)

지난 3월14일 낮 압구정동의 한 뷔페 식당에서 열린 이해윤 선생의 구순 잔치에 임승희 의상감독의 초대를 받아 간 적 있다. 조촐한 식사 자리인 줄 알았는데 정지영 감독, 배우 최민식과 주진모, 사나이픽쳐스 박민정 프로듀서, 김유선 의상감독, 원로 영화인 등 선후배 영화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권유진 의상감독은 식당에 온 동료 영화인들을 챙기고, 어머니의 영상을 틀면서 행사를 직접 진행했다. 영화 의상이라는 가업을 잇는 아들로서, 또 후배로서 어머니와 동료 영화인들을 챙기는 성심으로 제작한 이순신 갑옷이라면, 이해윤 선생도 분명 그 정성을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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